낸시 보로윅의 사진집 ‘The Family Imprint’. / 김진영

무언가에 익숙해지면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가끔씩 잊곤 한다. 그중 하나가 아마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일 것이다. 익숙하던 무언가가 변하거나 사라질 때, 우리는 그것이 소중하다는 걸, 그래서 과거에 소중했던 것이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가족을 주제로 한 사진 가운데 근래 가장 인상 깊게 본 작업은 독일 출판사 핫체 칸츠(Hatje Cantz)에서 2017년에 출간된 낸시 보로윅의 ‘패밀리 임프린트(The Family Imprint)’다. 이 사진집은 2017 PDN 사진집 어워드, NPR 책 어워드에서 수상하는 등 좋은 평가를 받은 책이다. 내가 이 사진집을 처음 만난 건 2017년에 열린 세계적인 사진 전시회이자 박람회인 파리 포토(Paris Photo)의 핫체 칸츠 부스에서였다. 당시 낸시는 굉장히 밝은 미소로 책 사인회를 하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의 밝은 얼굴과 달리 책의 주제는 부모의 죽음을 다루고 있었다.

‘사랑과 상실에 관한 딸의 포트레이트(A Daughter’s Portrait of Love and Loss)’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사진집은 사진가인 낸시 보로윅의 부모가 4기 암 선고를 받으면서 나오게 됐다. 2011년 낸시의 엄마는 유방암 재발 선고를 받았다. 낸시의 아빠 역시 췌장암 선고를 받았다. 낸시는 엄마와 아빠에게 남은 마지막 몇 년의 시간을 사진에 담기로 했다. 낸시의 부모들 역시 죽음을 앞둔 상태였지만, 딸 낸시의 피사체가 되는 것에  기꺼이 동의했다. 이렇게 딸의 포트레이트(인물 사진) 작업이 시작됐다.

이 사진집은 기본적으로 시간순으로 구성돼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낸시의 부모가 보냈을 마지막 몇 년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해준다. 암 선고를 받은 두 사람은 치료도 받고 휴가도 간다. 낸시는 부모가 모두 살아 있는 어느 가을날 결혼식을 올린다. 먼저 병세가 악화된 아빠가 죽고 장례식을 치르고, 그로부터 1년 후에는 엄마가 죽고 다시 장례식을 치른다. 낸시와 형제들은 부모가 남긴 물건들과 집을 정리한다. 이것이 이 사진집의 기본적인 이야기 구조다.

이러한 이야기만 생각하면 이 사진집이 그저 슬프고 우울할 것이라고 예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사진집은 ‘부모의 죽음’이라는 주제로 한정되기보다는 가족 모두의 이야기를 잔잔하면서도 즐겁게 풀어나간다는 인상을 준다.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의연하게 해나가는 엄마, 아빠의 모습 덕분이다. 6장의 연속 사진에서 식사 중인 아빠는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고, 엄마는 박장대소를 터트린다. 죽음을 함께 준비하는 두 사람은 공동묘지의 지도를 펼쳐놓고 어디에 자신들이 묻히는 게 좋을지 의논한다. 아빠는 그의 유언대로 큰 풋볼 저지와 이니셜이 새겨진 야구 모자, 가장 좋아하는 청바지를 입은 채로 관에 들어간다. 아빠의 마지막 옷차림은 남편을 떠나보내는 순간에 엄마를 미소 짓게 만들어준다.

가족의 죽음이라는 슬픈 상황임에도, 사진집을 보는 이로 하여금 책의 마지막까지 미소 지으며 보게 만드는 강력한 힘은 이 사진집에 담긴 수많은 물건들에서 비롯된다. 이 사진집의 표지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건 십자수 그림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본 많은 사진집은 표지에 사진을 넣거나 글씨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진이나 글이 아닌 다른 이미지가 들어가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십자수라니. 사진집의 표지라기엔 생소한 이미지였던 것이다.

낸시 보로윅의 ‘The Family Imprint’ 표지. / 김진영


가족의 기억 담긴 물건들까지 담아

표지를 장식한 이 십자수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힌트는 책 안에 있었다. 이 사진집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가족에 관한 다큐멘터리 사진만 담은 것이 아니라, 가족의 물건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낸시는 책 초반부의 양 페이지에 진짜 앨범처럼 보이도록, 부모의 결혼식 사진을 레이아웃했다.

이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낸시의 아빠가 젊은 시절 콧수염을 길렀다는 점과 결혼식날 검정 디테일이 들어간 하얀 턱시도를 입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다시 책의 표지를 펼쳐 보니, 십자수 속 남자의 콧수염과 턱시도가 눈에 들어왔다. 십자수 속 장면은 바로 낸시 부모의 결혼식 장면이었다. 이 십자수는 평소 십자수를 좋아하던 아빠가 결혼 무렵 두 사람의 모습을 새겨 만든 것으로 그 후 소중하게 간직해온 물건이었던 것이다.

낸시의 부모가 주고받은 러브레터. / 김진영

이 사진집에는 이렇게 부모의 기억, 나아가 가족의 기억이 담긴 물건들이 곳곳에 재미있게 등장한다. 사진집을 넘기다보면 마치 책 안의 팝업북처럼 한 면만 책의 내지와 붙어 있는 카드가 툭하고 펼쳐진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 촌스러운 디자인의 이 카드는 낸시의 부모가 주고 받았던 러브레터다. 아빠가 늘 걸고 다니던 목걸이, 부모의 투병 가운데 결혼을 한 낸시의 청첩장, 엄마의 스크랩북 등은 가족 모두가 공유하는 그 무엇이었다. 가족 앨범이 그렇듯 이 사진집에 어설프게 배치되어 총 여섯 차례 등장하는 가족 사진에는 장난치길 좋아하던 젊은 부모의 모습, 어린 시절 낸시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와 같은 형식으로 사진집을 만들면서 낸시는 사진만 선별한 것이 아니라 집 안의 수많은 사적인 물건들 가운데 소중한 이야기가 담긴 것들을 선택해 실었다. 짐작컨대 낸시는 자신이 찍은 사진만으로는 가족의 이야기를 온전히 담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부모의 물건을 정리하기 위해 빈 집에 돌아온 그녀는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의 사진이 부모의 마지막 몇 년간을 담은 것이라면, 집에 남아 있던 수많은 물건에는 부모가 살아온 수십 년의 삶이 담겨 있다는 것을 말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녀가 만든 ‘사랑과 상실에 관한 딸의 포트레이트’ 사진집 속에는 인물의 포트레이트뿐만이 아니라 물건들의 포트레이트 역시 반드시 담겨야만 했던 게 아닐까.


▒ 김진영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 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