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가천대 캠퍼스에서 만난 배우 이순재. /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올해 나이 84세로 최고령 현역 연기자인 이순재가 주연으로 참여한 영화 ‘덕구’가 잔잔한 감동을 전한다. 지난 4월 개봉한 이 영화로 벌써 30만 명이 넘는 관객이 스크린에서 그를 만났다. 영화 속에서 그는 외국인 며느리가 낳은 두 손주를 키우며 인도네시아 로케이션까지 소화했다. 착한 메시지가 좋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노개런티로 출연했다. 돌아보면 그는 강함을 숨기지도 약함을 전시하지도 않았다. 늙어서 순한 노인이 아니라 늙을수록 싱싱해지는 어른으로, 그 삶의 자국을 선명하게 남기는 우리들의 ‘직진 순재’.

이순재를 4월 18일 그가 석좌교수로 있는 성남의 가천대학교에서 만났다. 봄날의 대학 교정은 푸르른 청춘들로 시끌벅적했다. 흰머리 휘날리는 노인은 화사한 꽃나무 아래서도 시든 기색이 없었다. ‘꽃보다 아름다운 할배’ 주위로 스마트폰을 든 학생들이 몰려왔다. 카메라 플래시와 팝콘 같은 웃음이 동시에 터졌다.


학생들이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엇을 가르치나.
“한 학기 동안 무대에 한 작품을 올린다. 우리는 배역을 제비뽑기한다. 내 원칙이 기회 균등이거든. 그러다 보면 잘하는 사람이 단역을 하고 못하는 사람이 주역을 할 때도 있다. 신기한 건 못하는 아이들이 자기 능력을 재발견하는 경우가 더 많다. 내가 가르치는 연기의 기본은 화술이다.”

결국 대사 전달력이 좋은 배우들이 끝까지 살아남는 거 같다.
“과거 후시녹음 시절엔 성우들이 녹음을 해줬다. 신성일씨도 청춘 스타였지만 경상도 사투리 악센트가 있어 TV에서 활동을 하지 못했다. 고(故) 추송웅씨도 마찬가지였고. 최무룡, 허장강, 황해 선배는 화술의 기본기가 확실해서 동시녹음을 했다. 나는 요즘 젊은이들한테도 너희들 유행어는 10년 지나면 없어지니 변하지 않는 표준어를 구사하라고 가르친다. 우리말의 정형을 아름답게 제대로 구사해야 한다는 게 우리 직종의 의무다.”

고등학생 시절 6·25전쟁 중에 연극을 처음 올렸다. 그때 배우의 꿈이 시작된 건가.
“당시 충남여고에서 예술제를 하는데 영어로 한다고 해서, 학교 영어 선생한테 ‘햄릿’을 써보라고 부추겼다. 나는 피난 와서 대전고 청강생이었는데, 일을 꾸며서 극을 올리는 뒷바라지를 했다. 그때 같이했던 후배가 미 연방 하원의원 했던 김창준이다. 전쟁통이지만 천막극장에서 영화도 보고 거기서 아버지 만나 도망도 가고, 할 건 다했다.”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한 소위 엘리트인데 연기 쪽으로 선회한 계기가 있나.
“1950년대에 좋은 영화를 참 많이 봤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장 뤼크 고다르 같은 거장의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 상업과 예술의 경계에 있던 미국 영화를 접하고 감탄했다. 로렌스 올리비에가 제작·감독·주연한 ‘햄릿’을 보면서 ‘저런 예술이라면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끼리라도 한번 해보자’ 해서 서울대 내에 연극 동아리를 만들었다.”

철학을 전공했던 게 연기에 도움이 되던가.
“하하하. 철학을 열심히 공부했으면 대학교수까지 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거(철학)나 이거(연기)나 막연하긴 마찬가지다. 실용적인 학문이 아니니. 인내력이 필요한 학문이다. 당시에 우리 학교엔 칸트·헤겔을 다루는 한국 철학의 거목들이 다 있었다. 지도교수에게 들은 말이 여태 잊히지 않는다. ‘4년간 (공부)해서 무슨 철학을 알겠느냐. 어려운 책 읽는 연습했다 생각해라’.”


대화 중 갑자기 예기치 않은 방문객이 들이닥쳤다. 이순재가 중랑구에서 국회의원 하던 시절의 경쟁자, 흔히 하는 말로 ‘정적’이었던 이상수 전 노동부 장관이었다. 이순재는 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상수 전 장관(평민당)에게 700표 차로 패했고, 4년 뒤엔 3800표 차로 이겨 14대 국회의원(민자당, 서울 중랑갑)으로 정치 활동을 했다. 이 전 장관에 대해 그는 “내 철학이 정치도 마음을 열고 소통하면 적이 될 수 없다는 거다. 나는 보수 쪽이고 저 친구는 진보라 정치적으로는 달라도 인간적으론 친구가 됐다. 당적을 떠나서 돕는다”라고 했다.


정치를 해 보니 어땠나. 연기보다 어려웠나.
“지역에 홍수가 나도 내 탓, 불이 나도 다 내 탓 같았다. 서울 중랑구에서 봉사하던 8년간,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늘이 얼마나 푸른지를 몰랐다. 정치에서 배운 건 오로지 겸손이다. 우뚝 서면 못 한다. 바닥부터 기어야지. 봄·가을에 두 번씩 가정 방문하고, 계절마다 재래시장 가서 고등어 써는 할머니 손도 많이 잡았다. 배우를 해서 그런지 손만 잡아도 니 편 내 편 딱 안다.”

어떻게 니 편 내 편을 아나.
“고등어 썰다가 고무장갑 낀 채 손 내밀면 저쪽 편이고, 장갑 벗고 잡으면 내 편이다. 당시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MBC에서 1991~92년 방영된 주말 드라마)’가 시청률 60%를 찍던 시절이라 ‘대발이 아빠’인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덕을 봤나? 아니다. (드라마 속에서) ‘마누라 구박해서 표 안 나온다’고 유세 다니지 마라더라고. 버려지다시피 한 가난한 동네에 개천도 덮고 길도 닦고 등기소도 내고, 참 열심히 했다. 60세에 다 그만두고 본업으로 돌아가면서 나처럼 돈 없는 사람 말고 좀 부자 정치인이 와서 이 동네를 살려줬으면 했는데,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더라. 지금도 나는 중랑구의 아무 집이나 가서 ‘밥 좀 주시오’ 하면 반겨준다. 그만큼 친밀했다.”

영화 ‘덕구’ 스틸컷. / 영화진흥위원회

오랫동안 대가족의 아버지, 대통령, 왕 등 권위가 있는 인물을 연기해서 그런지 자존감이 강해 보인다. 영화 ‘덕구’에서는 고깃집 불판을 닦으며 손주들 키우는 남루한 노인인데도 불쌍해 보이지 않더라.
“손주한테도 계속 가르치지 않나. 지금 형편이 어려워도 너는 명문가의 후예다. 네 목표는 대통령이다. 가난해도 자존감은 강한 영감이다. 일련의 사극에서도 그렇고, 나는 상황은 비참할지언정 심지가 강해서 약해 보이진 않았다. 교훈적 역할이 되고자 했다.”

62년간 연기를 해왔는데, 어떤 역할이 어렵나.
“얼마 전 했던 ‘돈꽃(MBC에서 작년 11월부터 올해 2월까지 방영한 주말 드라마)’처럼 존재감이 확실한 캐릭터는 오히려 쉽다. 평범한 월급쟁이 남편 같은 무난한 역할이 어렵다. 극에는 (그런 인물이) 필요하지만, 특징이 없거든. 양보를 해야 하는데 과욕을 부리면 균형이 깨진다.”

과장된 감정 연기를 경계한다. ‘배우는 자기가 울면 안 된다’는 말도 했다.
“연기는 상대를 위해, 관객을 위해 내 욕심을 절제해야 한다. 배우가 슬픈 장면에 다 울고 기쁜 장면에 다 웃으면 관객이 민망해진다. 너무 열연하면 안 된다. 광기를 터뜨리는 건 오히려 쉽다. 심경은 표정에 자연스레 스미는 거다. 근육을 일그러뜨리면 그건 개그맨이지.”

유현목 감독의 1967년작 영화 ‘막차로 온 손님’의 이순재(왼쪽)와 문희.

1935년생으로 방송계에서 송해를 제외하고 최고 어르신이다. 현역으로 최전선에 있는 기분이 어떤가.
“나이 먹어서 앞에 있는 거지, 돋보여서 앞에 있는 건 아니지 않나. 나는 빛나는 정상에 한 번도 올라가 본 적이 없다. 웬만한 사람은 다 탔던 동아연극상도 한 번을 못 탔다.”

하지만 늘 정상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tvN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서 별명도 늘 앞서간다고 ‘직진 순재’였고.
“실제로는 영화를 100여 편이나 했으면서 대종상도 한 번 못 탔다. 밀어주는 후견인도 없었고, 내가 잘했을 땐 늘 더 잘하는 사람이 나타나 상을 채가곤 했다. 옛날엔 트로피값을 내야 한다고도 했고. 유현목 감독과 ‘막차로 온 손님’을 열심히 했을 땐 기대를 했는데 이만희 감독의 ‘싸릿골의 신화’를 했던 최남현 선생이 받았다. 시상식에 가서 턱시도를 입은 최 선생을 축하해드렸다. 그 양반도 정말 거목이었다.”

이순재는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과거의 대배우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추억했다. “최남현, 김승호 선생은 토속 작품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최무룡 선생은 메소드 연기의 달인이었고. 김진규, 신영균, 박노식 같은 분들도 일가를 이룬 배우였다. 신성일은 독보적인 톱스타였다. 지금으로 치면 10조원쯤은 거뜬히 벌었을 거다. 그런데 우리 때는 (출연료로) 약속어음을 받아가며 일했다. 제대로 돈 받으며 일한 건 1990년도 말부터다.”

어쨌든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2007년 방송연예대상을 수상했다.
“‘거침없이 하이킥’은 예능이 아니고 시추에이션 드라마다.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 같은 정통 희극 연기의 연장선상이다. 사실 비극성을 강조하는 연기는 다 비슷하다. 희극 연기에서 진짜 아이디어와 실력이 나온다. 그때 나문희씨랑 발성, 눈, 표정을 정말 열심히 연구하며 맞췄다.”

불멸의 캐릭터 ‘야동 순재’는 어떻게 나왔나.
“영감이 야한 거 보다 들키면 그거만큼 마나님한테 창피한 게 어디 있나. 당시엔 내가 그래도 명문고, 명문대를 나왔는데 탤런트 돼서 망가졌다는 소리는 듣기 싫어서 ‘빼자!’ 그랬다. 그런데 김병욱 감독이 메인이 난처해야 웃음이 나온다는 거다. 다행히 세상이 변해서 그런 생활문화가 양해가 되더라고.”

돌아보니 전성시대는 언제던가.
“나이 먹고 더 괜찮아졌다. 1970년대 후반 TBC 드라마 시대 때는 군웅할거 시기였다. 그중에도 최불암이 ‘수사반장’으로 탤런트 랭킹 1등을 먹었지. 나는 나이 먹어서 MBC에서 ‘사랑이 뭐길래’ ‘허준’ ‘상도’ ‘이산’ ‘베토벤바이러스’ 같은 좋은 작품들을 했는데,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쭉 전성기다.”

인생 캐릭터가 나올 때는 감지되는 어떤 기운이 있나.
“그런 기회가 더러 온다. 그럴 땐 놓치지 말고 치고 올라가야 한다. 고만고만하게 하다 못 살리면 주저앉는다. 내가 ‘이산’의 영조를 맡은 것도 ‘허준’ 할 때 스승 유의태 역할을 잘했기 때문이다.”

연기도 삶도 눈치보는 스타일은 아니다. 사랑받는 비결이 뭔가.
“염치를 갖고 지킬 걸 지키면 어른으로 대접해준다. 나는 누구한테든 강요하고 위세 부리는 걸 가장 경계한다. 우리 직종이 바닥부터 시작해서, 나는 어디 가서 폼 잡은 적이 없다. 오히려 ‘네까짓 게, 딴따라 주제에’ 이런 괄시를 많이 받았다. 장가가기도 힘들 정도였다. 재벌도 권력자도 아니지만, 무시당해도 흔들리지 않은 건 내가 하는 예술에 자부심이 있어서다. 나는 연기하려고 술도 안 했고 좋아하던 담배도 끊었다. 나이 들어도 생명력을 유지하려면 새로운 과제를 달갑고 고맙게 받아야 한다.”

기나긴 인생에서 깨닫고 지키는 어떤 룰이 있나.
“하나 더 먹겠다고 달려들면 갈등이 커지고 적이 생긴다. 정치할 때 그걸 배웠다. 나는 표는 못 받아도 욕은 안 먹었다. 제일 가난한 동네에서 날 한 식구로 받아줬고, 정적과는 친구가 됐다. 살아 보니 인생이란 건, 여러 욕심이 있겠지만 조그만 손해는 감수하고 좀 모자란 듯 사는 게 좋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