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 게르기예프가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 (LSO)를 지휘하고 있다. / LSO

1998년 모라토리엄(국가 채무 상환 유예)을 선언한 러시아는 2000년 대선에서 ‘힘 있는 러시아 재건’을 내세운 블라디미르 푸틴을 선택했다. 푸틴은 유라시아에 걸친 전 세계 최대 영토국의 문화적 위상을 대외적으로 알릴 파트너로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Valery Gergiev·1953년생)를 꼽았다.

1988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키로프(현 마린스키) 극장 감독에 오른 게르기예프는 구소련 붕괴의 혼란기에 본인의 지명도를 이용해 국제적 지원을 강구했다. 1992년 아나톨리 솝차크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은 게르기예프가 청한 ‘백야 축제(하지에 고전 음악·오페라 등 공연)’와 마린스키 지원을 위해 시의 대외 투자 자문푸틴을 게르기예프에게 소개했다. 푸틴은 프랑스 투자자들에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신네덜란드섬 개발 계획을 브리핑하면서 게르기예프를 만났다.

게르기예프는 마린스키의 번영을 위해 일찍부터 정·경 분야 엘리트를 집중적으로 우군으로 포섭했다. 러시아 최대 상업은행 스베르방크의 게르만 그래프 현 회장, 알렉세이 쿠르딘 전 러시아 재무장관은 1990년대 중반부터 게르기예프와 공고한 유대 관계를 맺었다. 푸틴 정권에서 관료로 승승장구한 이들이 게르기예프 프로젝트에 러시아 금융권의 지원을 주도했다.

게르기예프와 푸틴의 공조로 힘을 얻은 마린스키 극장은 결국 2010년대 들어 가장 성공한 오페라하우스로 떠올랐다. 1840년에 개관한 마린스키 극장에서는 매년 ‘백야축제’가 열린다. 전 세계에서 이 축제를 즐기기 위해 100만 명 이상이 모여든다.

2014년 소치 올림픽 개막식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듯이 현재 러시아가 세계에 내놓은 고급 예술의 중심에 게르기예프가 있다. 2008년 오세티아 분쟁, 2014년 크림반도 위기에서 철저히 러시아 정권에 영합했고, 2014년 런던 트라팔가광장에서 열린 런던심포니 야외음악회에선 우크라이나 시위대가 지휘자 게르기예프를 조롱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178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마린스키 극장의 내부. / 마린스키 극장

오는 11월 뮌헨 필 이끌고 내한 공연

게르기예프가 움직이는 곳에 러시아와 관련된 돈이 함께 돈다. 러시아의 대규모 유전 개발 사업의 키를 쥔 러시아 국영 석유 회사 로스네프트와 손잡기 위해 미국의 엑손모빌과 영국의 BP가 경쟁했고, BP는 마린스키 극장의 현지 후원과 마린스키 오케스트라·발레단의 영국 투어를 공식 후원하면서 2010년대 중반까지 러시아 유전 시장에서 우위를 확보했다. 러시아 국영 에너지 기업 가즈프롬은 게르기예프가 새로 주관한 볼쇼이 러시아 음악 페스티벌을 후원했고, 뮌헨 필 감독으로 활동하는 독일에선 2015년 가즈프롬 독일지사를 통해 러시아·독일 제2차세계대전 종전 70주년 기념공연을 스폰서했다.

미국에서도 러시아 비즈니스를 강화하는 움직임에 게르기예프 연관 공연이 빠지지 않는다. 2017년 11월, 게르기예프와 마린스키 오케스트라는 미국 투어 도중, 워싱턴D.C.의 한 성당에서 ‘통일 콘서트’ 공연을 개최했다. 미국 내 러시아 정교회 지도자와 여야 정치인이 참가한 이 공연은 워싱턴 내셔널 오페라 거액 후원자, 수전 레어먼(Susan Lehrman)이 펀딩을 담당했다. 푸틴으로부터 대통령 메달을 받은 레이먼은 세계적 사모펀드 칼라일 그룹 창업자 데이비드 루벤스타인(David Rubenstein)을 초대했다.

게르기예프의 활약상은 국내에서도 두드러진다. 2015년 11월 서병수 부산시장은 2021년 개관 예정인 부산 오페라하우스의 콘텐츠 확보와 네트워크 구축을 위해 서울에서 게르기예프와 간담회를 가졌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2017년 6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해 게르기예프를 초대 ‘서울 글로벌 대사’에 임명하고 남북 오케스트라 협연을 비무장지대(DMZ)와 평양에서 여는 방안을 논의했다. 서울시 산하 세종문화회관은 올 11월 게르기예프가 감독하는 뮌헨 필 내한 공연을 주최한다. 2016년 8월, 평창대관령음악제 당시 정명화 예술감독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마린스키 극동 페스티벌과 상호 교류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게르기예프는 차이콥스키 콩쿠르 심사 위원장을 맡아 대회에 입상한 피아니스트 손열음·조성진,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과 자주 협연을 하고 마린스키 오페라 투어로 만난 테너 이용훈도 중용했다. 마린스키 오케스트라 이외에도 빈 필, 런던 심포니, 뮌헨 필 한국 투어로 국내 팬과 자주 만났고, 2012년 런던 심포니 투어에선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던 소녀 피아니스트 임주희를 소개했다. 2017년에는 마린스키 극장의 연해주 분관인 프리모르스키 스테이지를 방문했고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무용수 김기민이 주역을 맡은 ‘백조의 호수’를 공연했다. 올해 가을에는 마린스키 발레단이 세종문화회관을 방문할 예정으로, 역시 김기민의 출연이 기대된다.

게르기예프는 여러 경로로 한국 기업의 차이콥스키 콩쿠르 후원을 독려하는 한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여름에 열리는 마린스키 극동 페스티벌 참여도 유인하고 있다. 연결고리는 러시아-시베리아 횡단 열차(TSR·Trans-Siberian Railway) 사업이다. 2016년 러시아 정부는 현재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된 TSR을 홋카이도까지 연장하는 방안을 일본에 제안했다. 게르기예프는 홋카이도의 도청 소재지인 삿포로에서 매년 여름 열리는 퍼시픽 뮤직 페스티벌(PMF) 예술감독이다. 게르기예프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일찍부터 5성급 호텔을 개관한 현대그룹의 존재를 알고 있다.

이렇듯 부지불식간에 게르기예프의 존재감은 이미 한국 공연·예술계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2012년 APEC 블라디보스토크 회의에서 푸틴은 ‘문명 간 실효적 대화의 발전’을 강조했다. 유럽과 아시아 경계를 역내에서 러시아가 허물겠다는 선언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의 분원,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분관도 오픈할 예정이다. 한·중·일 국민은 비행시간 2시간대에 유럽을 체험하고 러시아의 존재감을 인식하라는 권유가 더 정교해질 전망이다. 1986년 고르바초프의 블라디보스토크 선언이 30년을 지나 예술로 본격화된다. 러시아 동진(東進)의 중심에 게르기예프가 있다.


▒ 한정호
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 런던 시티대 예술정책 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