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에서 살아남을 정도로 생존력이 강하면서 매력적인 남자를 상상해본다.

친한 동생이 말했다. 그녀가 매료되는 남성 캐릭터에 대해. 영화 속이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윤리나 도덕 같은 것은 아랑곳 않는 인물들. 잔혹하나 매혹적인 인물들. 그러나 실제 삶에서 빠져드는 남자는 그와 달리, 유약한 외양을 지닌 ‘지성변태(이는 또 다른 친구가 애용하는 용어라고 한다)’라고 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재밌어서 한참을 웃었다. 무엇보다도 지성변태라는 용어가 마음에 들기도 했고 지성변태가 가리키는 남자들이 어떤 부류인지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다. 나뿐 아니라 다른 여성들도 무리 없이 이해하는 듯해서 모종의 공범의식까지 들었다. 내가 느끼는 지성변태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지적 우월감과 그 외의 것들에 대한 복잡한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자의식 강한 남자들. 세상의 중심에 자신이 서 있다고 소리치지 못하고 겉으로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모든 것을 자신의 지성 아래 해석하고 그걸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그득한 이들. 비딱하게 세계의 변방에 걸친 채 외부를 평가하고 냉소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개인들. 존재의 불안을 타인의 인정을 통해 갈구하면서도 짐짓 아닌 척, 초월한 척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자신의 초라함을 노출증 환자처럼 내지르듯 들이밀기도 하는, 애정결핍으로 여성들 사이를 유영하는 양의 탈을 쓴, 털 빠진 늑대들.


결정적인 순간 초라해 보이는 ‘지성변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지성변태는 애인으로 두기보다는 친구로 두는 편이 더 좋지 않아? 똑똑한 편이니 적절히 거리감 조절하며 같이 있기에 편하잖아. 아는 것도 많고 심심하지 않게 이야기를 늘어놓을 줄 알고 감성도 풍부한 편이라 내 말을 그럭저럭 잘 알아듣기도 하고. 굳이 그런 남자들이랑 피곤하게 애정 관계로 엮일 필요 없이 그들을 누릴 방법은 많잖아. 그들은 기본적으로 심심하고 외부 자극에 목말라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관객, 여럿보다는 진지하고 상냥한 관객을 원하거든. 바로 너와 나 같은.”

이어서 그녀에게 나는 영화나 소설 속에서 끌리는 캐릭터를 설명했다.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부터 일관적으로, 가볍고 유쾌하고 매력적인 남자들을 좋아했다. 외화 ‘스타스키와 허치’에서는 스타스키(벤 스틸러)에 푹 빠졌고, 로버트 레드포드와 폴 뉴먼이 콤비로 나오는 영화들에서는 폴 뉴먼에게 매료됐다. ‘독수리 오형제’에서는 1호보다는 2호를 선호했고, ‘들장미 소녀 캔디’에서는 밝고 유쾌한 스테아를 좋아하느라 테리우스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아, 이렇게 연륜과 취향이 나오고야 만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간 뒤 본격적으로 연애에 뛰어들면서 내가 반하거나 좋아하고 사귀었던 남자는 조금 다른 유형들이었다. 그들 나름대로 또 일관적이기는 했다. 장난삼아 그들 유형을 ‘무인도에서도 같이, 아주 잘 살아남을 인간형’이라고 일컫는다. 누군가 마음에 들면 상상한다. 저 남자와 무인도에 단둘이 떨어져 있게 된다면 어떨까. 우리는 멋진 팀이 되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함께 있는 시간이 지겹지는 않을까. 둘 사이의 갈등을 잘 해결할 만큼 대화가 가능한 상대일까. 그는 착하고 나를 존중해 주고 나 또한 존중할 수 있고 싫어하는 부분이 견딜 수 없지 않아야 하고 협상을 통해 변화를 서로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공급자이자 생산자, 조달자로서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

남자를 만나면, 운전 실력과 요리 실력, 농부·광부·어부·수리공 실력까지 점검해 보는 내가 의외로 안 따지는 건 지성이다. 지금 당장의 풍부한 지식보다는 지식을 흡수하고 활용할 수 있는 지적 능력과 동물적인 순발력과 그에 관련된 지능에 더 점수를 준다. 그러다 보니, ‘지성변태’ 남자들에게는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과 무인도에 둘만 살아남았다가는 내가 그들을 먹여 살리고 뒤치다꺼리하는 것도 모자라 끊임없는 잔소리까지 들어줘야 할 것 같으므로.


남자는 생활력 강하면서 매력적이어야

내가 좋아하는 유형의 남자를 다른 말로 정리하면, 생활력·생존력 강한 남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꼭 덧붙여야 할 중요한 조건이 있다. 매력적이어야 한다. 무인도에서 같이 잘 살아남으려면, 함께 있는 것이 좋을 만큼 매력적이어야지 안 그러면 밤에 몰래 죽여버리고 싶지 않겠나. 차라리 혼자 있는 편이, 불편하기 그지없는 누군가와 어쩔 수 없이 부딪혀야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물론 이를 위해서 무인도는 그럭저럭 문명의 이기를 갖춘, 생명의 위협으로부터는 벗어난, 안전은 보장된 곳이어야 하겠지만. 그리고 가장 가까이 있는 한 인간이 제일 무서운 적이 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있으므로 그를 몰래 처리하고자 하는 내 의도를 나는 미리 용서해버리고 만다. 나 또한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데, 상대는 그러하지 않겠는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과 붙어있는 것 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그러므로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해야 한다, 후훗.)

그래도 나이가 들면서 취향에도 변화가 생겼다. 예전에는 무인도에서 살아남아 부족 하나쯤은 함께 거뜬히 이룩할 만한 사람을 좋아했다면, 이제는 부족 만들기보다는 삶을 선택과 집중 속에서 조용히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사람에게 더 매력을 느낀다. 지적 능력이나 예술적 감수성이 중요해진 까닭이기도 하다. 어쩌면 내가 나이가 들고 더 이상 출산에의 욕망에 시달리지 않게 되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들장미 소녀 캔디’를 보며 왜 한 명만 선택해야 하는가 의문을 가졌고 이후로는 유전자 좋은 남자들의 아이를 다양하게 낳고 싶다고 말해 엄마에게 등짝 스매싱을 수차례 당한 여자에게는 커다란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마음에 드는 남자가 나타나기를 무작정 기다리고 꿈만 꾸는 여자로 사는 것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배우 탕웨이가 했다는 말을 예전에 친구가 전해준 적이 있다.

“여자가 운명의 상대를 만났는데 어찌 놓칠 수가 있겠는가.”

감탄에 감탄을 반복하며 그 말이 나왔다는 인터뷰를 찾아봤더니 실제 느낌은 조금 달랐다.

“여자는 누구나 자신의 운명을 바꿔줄 상대와 만날 것이라 믿고 있다. 누구라도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이해한 버전이 여성의 호탕함이 느껴져서 더 마음에 든다. 운명이든 우연이든 사후적 해석이든 중요하지 않다. 내려놓을 때와 떠날 때, 잡을 때와 남을 때를 아는 것, 기회를 선택하는 직관과 취향을 믿는 것, 그것은 자신에 대한 신뢰에서 시작된다. 가파른 인생에서 믿을 것이라고는 나 말고 누가 또 있겠는가. 그리고 당신, 이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 나는 함께 무인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듯한 사람을 뜨겁고 성실하게 사랑하는 중이기도 하다.


▒ 이서희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영화학교 ESEC 졸업, 파리3대학 영화과 석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