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의 한 장면.

타노스(Thanos)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빌런(악당)인 타노스는 지난 10년간 전 세계 영화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마블의 영웅들을 어렵지 않게 제압했다. 타노스는 타이탄 행성과 와칸다를 오가며 수많은 영웅들과 싸우면서 겨우 생채기만 조금 남을 뿐이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마블코믹스의 히어로물에 기반한 영화 세계관) 10주년을 기념하는 영화의 빌런다운, 진정한 최종 보스의 포스를 마음껏 보여줬다.

그렇다면 타노스를 영화 역사상 최악의 빌런으로 꼽을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타노스가 아무리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더라도 그건 2시간 29분의 영화 러닝타임 안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타노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먼지가 되어 사라져버린 영웅들처럼 영화관을 나오면 타노스라는 빌런의 존재감도 사라진다.

‘최악의 빌런’ 정도의 수식어를 붙이려면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기준을 충족하는 빌런을 아주 잘 다루는 영화 감독이 있다. 바로 영국의 영화 감독이자 각본가인 켄 로치다. 옥스퍼드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영화판에 뛰어든 켄 로치는 광산노동자들의 힘든 삶을 다룬 ‘케스(Kes·1969년작)’로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켄 로치는 현대 사회가 어떻게 노동자의 삶을 무너뜨리고 있는지, 또 이런 위협에 맞서 개개인이 어떻게 연대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켄 로치가 여든이 되던 2016년에 찍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는 비인간적인 관료주의 시스템이 한 명의 인간을 어떻게 소외시키고 죽음으로 내모는지 가감 없이 보여준다. 주인공 다니엘은 평생 목수로 일했지만 나이를 먹어 더 이상 일할 곳을 찾기 힘든 노인이다. 심장에 이상이 생겨서 질병 수당을 신청하려고 하는데 심사에서 탈락하면서 문제가 생긴다. 다니엘은 재심사와 항고 절차를 진행하려고 하지만, 복잡한 절차 때문에 번번이 좌절한다. 국가가 정해 놓은 관료주의 시스템은 형식적인 데다 까다롭고 비인간적이다. 스마트폰 대신 전화기를 쓰는 다니엘에게 ‘온라인으로 양식을 다운받아 작성하라’는 말은 설명이 아니라 암호에 가깝다. 정부의 질병 수당 심사 과정에서 다니엘은 인간이 아닌, 처리해야 할 일거리의 하나로 전락한다.

그런 와중에도 다니엘은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인 싱글맘 케이티와 그녀의 두 아이를 돌봐준다.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과의 추억이 담긴 가구를 팔 정도로 상황이 나빠지지만, 케이티의 가족을 위해 지갑을 연다. 작은 연대는 작은 희망으로 이어진다. 도움을 받기만 하던 케이티 가족은 나중에 국가에 의해 쓸모없고 불편한 일거리로 낙인 찍힌 다니엘을 구원해준다. 다니엘은 케이티의 가족을 도와주면서 자신의 가치를 느낀다. 삶에 지친 다니엘이 문을 걸어 잠그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할 때 도움의 손을 내미는  이는 케이티의 딸인 데이지다. 그렇게 세상이라는 파도에 밀려나 망망대해로 떠밀려가던 다니엘과 케이티의 가족은 손을 잡고 물살을 견뎌낸다.

여기서 영화가 끝났다면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로 기억됐을 것이다. 하지만 켄 로치는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다니엘은 어렵게 잡힌 항고 재판 날, 법원 화장실에서 심장마비로 죽는다. 심장병에 걸린 채 치료도 받지 못하고 밥 한 끼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는 노인이 건강하게 살아가는 건 판타지에 가까운 일이다. 켄 로치는 당연한 현실을 보여주고, 그 장면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허탈함에 고개를 돌린다. 그렇게 다니엘과 케이티 가족이 쌓아 올린 작은 희망, 작은 연대는 허무하게 끝이 난다.

타노스가 전 우주의 절반을 가루로 만들 때도 별 감흥이 없었지만, 다니엘의 죽음 앞에서는 좌절하고 분노하게 된다. 타노스가 나나 내 가족의 삶을 무너뜨리는 건 불가능하지만, 관료주의 시스템은 언제고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수많은 다니엘이 있다. 켄 로치는 2016년 칸 영화제에서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수상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켄 로치는 “소득 불균형 문제는 갈수록 커지고 있고, 많은 사람이 힘든 시기를 겪고 있다”며 “이 영화는 그 많은 사람 중 단 한 명의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켄 로치는 1966년작인 ‘캐시, 컴 홈’에서도 비인간적인 관료주의 시스템을 고발했다. 그로부터 5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켄 로치가 고발했던 괴물은 생채기만 조금 남겼을 뿐 여전히 굳건하다. 어쩌면 관료주의 시스템이라는 빌런이 가진 초능력은 늙지도 죽지도 않는 ‘영생’인지도 모르겠다.


다니엘이 케이티를 위로하고 있다.


창의적 발상이 관료주의 무너뜨려

영화 역사상 최악의 빌런을 무너뜨리려면 조금 더 창의적인 발상이 필요할 것 같다. 영국만큼이나 관료주의 시스템이 공고하기로 이름난 일본에서 2016년에 나온 ‘신고질라(シン・ゴジラ)’를 보자.

고질라가 도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데도, 일본 정부의 각료와 공무원들은 매뉴얼을 찾기 바쁘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고질라와 일본 자위대의 전투 장면이 아니다. 일본 정부가 비상대책반을 만들 때마다 각을 세워가며 복사기를 다시 일렬로 배치하는 장면이야말로 영화의 하이라이트였다. 복사기 줄을 맞추는 사이 고질라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갔을지 생각하면 아찔해진다. 사람들을 죽이는 건 고질라지만, 그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린 건 관료주의 시스템이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달리 ‘신고질라’는 인류가 고질라를 격퇴하면서 희망적으로 끝난다. 다니엘을 끝내 죽음으로 몰아넣은 관료주의 시스템을 ‘신고질라’는 어떻게 해결한 걸까.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부의 고위 관료들은 헬기를 타고 이동하다 고질라의 일격에 몰살당한다. 살아남은 젊은 관료들은 매뉴얼을 집어던지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짜내서 고질라를 동결하는 데 성공한다.

물론 현실 세계에 고질라가 나타날 가능성은 지금 우주 어딘가에서 타노스가 인피니티 스톤을 모으고 있을 가능성만큼이나 작다. 하지만 세계 곳곳에서 비인간적인 오작동을 일으키고 있는 관료주의 시스템을 보고 있으면, 바닷속 어딘가에 고질라가 잠들어 있기를 바라게 된다.


이 영화엔 이 술

티냐넬로(Tignanello)

티냐넬로는 이탈리아 키안티 지역의 전통을 깬 수퍼투스칸(Supertuscan)의 대표적인 와인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키안티 와인을 만들 때 반드시 백포도를 섞어야 하는 법이 있었다. 와인메이커들은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고급 와인을 만들 수 없다고 항의했지만, 이탈리아 공무원들의 관료주의는 꿈쩍하지 않았다. 이때 전통적인 제조법 대신 새로운 제조법으로 만든 티냐넬로가 나왔다. 티냐넬로가 성공을 거두면서 키안티 와인 제조법도 바뀌게 됐다.

-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스파이스 트리(Spice Tree)

스카치 위스키 업계는 보수적인 규정이 많다. 대표적인 규정이 최저 알코올 도수 기준인 40% 규정과 물이나 곡물·효모 외에는 아무것도 첨가할 수 없다는 규정이다. 최근에는 이런 보수적인 규정을 깨려는 시도도 늘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회사가 컴파스 박스(Compass Box)라는 위스키 제조사다. 컴파스 박스는 전통적인 오크통 제조방식에서 벗어나 다른 종류의 나무를 조립해 만든 오크통에서 숙성시킨 위스키도 만든다. 국내에도 판매 중인 스파이스 트리가 대표적이다.

- 유성운 한국위스키협회 사무국장

이종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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