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를 위하여’의 작가 이문열. / 조선일보 DB

황제를 위하여
이문열 지음|민음사
8500원|전 2권 각권

참으로 오래간만에 이문열의 소설 ‘황제를 위하여’를 다시 읽었다. 정씨가 임금이 된다는 예언서 ‘정감록’을 패러디한 소설이다. 갑오 동학농민 혁명이 일어난 해에 태어난 ‘정씨’ 성의 사내 아이가 미래의 군주로 점쳐진 가운데 그 아이가 성장해가면서 추종하는 무리를 형성해 근현대사의 격변기를 좌충우돌하며 통과하는 희극이 벌어진다. 정확하게 1980년 계간 ‘문예중앙’에 연재되면서 발표된 소설이다. 연재될 때 첫 회를 읽으며 배를 잡고 웃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기억 저편에 자리 잡은 소설을 내 의식이 다시 소환한 것은 요즘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댓글 조작 사건’의 주범 드루킹(본명 김동원) 때문이다. 드루킹이 인터넷 논객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시대 예언서인 ‘송하비결’로 나름 현실의 변화를 예측했다는 언론 보도를 접하자마자 이 소설이 떠올랐다. 오래간만에 만난 작가 이문열도 “최첨단 인터넷 기술을 악용한 사람과 ‘송하비결’이라니…”라며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소설은 잡지사 기자 ‘나’가 계룡사의 사교집단을 취재하러 간 길에 우연히 만난 노인으로부터 ‘황제’로 불린 사람과 그를 추종한 집단의 역사를 듣게 되고, 그 기록이 담긴 책 ‘백제실록’을 읽게 된다. 하룻밤 그 노인의 이야기와 신비한 책에 빠져들었던 ‘나’는 다음 날 노인과 헤어지면서 ‘백제실록’을 놔두고 나온다. 몇 년 뒤 ‘나’는 그 책을 읽은 기억을 바탕으로 책을 쓰게 되고, 그 과정이 소설 ‘황제를 위하여’를 낳는다. 존재하지도 않는 책을 ‘가짜 텍스트’ 삼아 동양의 여러 고전에 흩어진 고사성어가 인용되고, ‘정감록’을 비롯한 각종 예언서가 동원된다.


옛 말투 사용한 문체 눈길

이 소설은 케케묵은 의고체(擬古體) 문장으로 시대착오적인 인물을 그려냈다. “갑오 사월 황고 고경(古鏡)을 얻으시다, 시월 산승이 내려와 성탄을 고하다”라는 ‘백제실록’의 기록을 요즘 말로 풀이하자면 ‘황제의 아버지가 갑오년 사월 예언이 담긴 옛 거울을 얻고, 시월엔 산에 살던 중이 집을 찾아와 성스러운 탄생을 알렸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그중의 행적을 두고 “진실로 한가로운 구름 같고 외로운 학 같은 자취였다”는 기록을 전하면서 동시에 ‘황제’를 조롱한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전한다. “그 무렵 한 협잡꾼이 스님의 복색으로 삼남을 돌며 요사한 말과 괴이한 행동거리로 양민의 재물을 탐하고 부녀를 희롱하다 붙들려 이듬해 전주 감영에서 효수된 일이 있는데, 그가 바로 그 산승과 비슷하다는 주장이었다.”

이 소설의 기둥은 예언서의 문구로 현대사를 엉뚱하게 해석하는 황제의 세계관이다.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자 황제는 “푸른 옷을 입고 남쪽으로부터 오니 왜(倭) 아니고 호(胡)도 아니로다”는 예언서를 인용하면서 ‘푸른 옷’을 미군 제복의 등장으로 풀이한다. 그런 시각으로 현실을 보는 ‘황제’가 일제 강점기엔 기미년 독립 만세 사건의 영웅이 되기도 하고, 부하들을 이끌고 만주에 가서 무장투쟁에도 나선다. 사실 그 화려한 행적을 뒤집어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의 연속이라 잇달아 폭소를 터뜨리게 된다. 38년 전 소설인데 여전히 재미있다.

박해현 조선일보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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