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인문대에서 만난 배철현 교수. 사진 조인원 조선일보 기자
서울대 인문대에서 만난 배철현 교수. 사진 조인원 조선일보 기자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가 낸 인문 에세이 ‘수련’은 종교인이 쓴 이른바 ‘힐링 에세이’와는 차원이 다르다. 오래 참으면서 생각한 사람의 지적인 악력으로 날린 문장은 짧고 단순하지만, 빠르게 날아와 뼈에 창처럼 박힌다. 2016년 ‘심연’에 이어 최근 출간한 ‘수련’ 그리고 이어질 ‘정적’과 ‘승화’까지 배 교수는 종교 없는 자들을 위한 ‘21세기형 경전’을 쓰는 중이다.

배 교수는 하버드대에서 셈족어와 인도·이란어 고전문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스 철학부터 이슬람교 ‘코란’, 기독교 ‘성경’까지 인문 고전과 종교의 텍스트를 뜨거운 사유의 용광로에 녹여 보석 같은 잠언으로 정련한 이 모든 저작의 목표는 ‘더 나은 내가 되는 것’이다. 그는 서문 제일 첫 문장에서 “나는 ‘위대한 나 자신’을 흠모한다”라고 썼다. 그리고 이런 위대한 개인이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우며 공동체에 절실한 인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선 ‘자발적 고립’이 필수 조건이라고 했다.

배 교수는 50세가 된 2012년부터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의 전원주택으로 이사가 자발적 고립을 실천하고 있다. 직장인 서울대에서 70㎞ 떨어진 곳이다. 새벽 5시 30분에 출발하면 학교까지 1시간 10분 걸린다. 그는 “단언컨대 인생 최고의 결정”이라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1시간가량 좌정(坐定)한다. 좌정은 직립의 역행. 다리를 묶고 시선을 묶는 행위다. 그다음, 머릿속으로 ‘무엇을 하지 말까’를 고민한다. 가평 전원주택에서 70분간을 달려 직장에 출근한 배 교수를 4월 24일 캠퍼스에서 만났다.

‘무엇을 할까’가 아니라 ‘하지 말까’를 고민한다니 역발상이다.
“쓸데없는 걸 안 하는 행위가 창조다. 어원이 그렇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니’ 하고 나온다. 혼돈에서 쓸데없는 걸 덜어내는 게 창조다. 그게 질서고, 그 질서를 우주라고 한다.”

그다음엔 무엇을 하나.
“책을 읽는다. 성 오거스틴의 ‘고백록’, 몽테뉴의 ‘수상록’ 등, 자기의 희망과 절망을 섬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히브리어 ‘성경’은 매일 읽는다. 경전은 다른 책과 달라 정성을 쏟을수록 의미를 보여준다. 단어 하나가 히스토리다. 침묵 속의 웅변이라고, 쓰인 것보다 쓰이지 않은 비밀들이 발견되길 기다린다.”

그가 히브리어 ‘성경’을 꺼내 몇 글자를 원문으로 읽어나갔다. 고대어가 지닌 형상과 발성이 가히 신비로웠다. 순식간에 기원전으로 시간이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특별히 좋아하는 구절이 있나.
“‘구약성경’ 중 룻기는 간단하지만 단어가 춤을 춘다. ‘시편’이 아주 좋다. (히브리어로 글자를 짚어 읽으며) ‘행복한 사람은 악을 행하는 사람의 꾐에 넘어가지 않고, 죄를 짓는 사람의 곁에 서지 않고, 남을 욕하는 자의 자리에 있지 아니한다’라고 쓰여 있다.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행복한 사람은 뭘 하는 사람이 아니라 뭘 안 하는 사람이다. 나는 단어에서 출발하는 고전문헌학자라 개념을 어떻게 파악할지를 항상 중요시한다.”

행복(Happiness)과 우연을 뜻하는 단어 해프닝(Happening)의 어근이 같다는 지적도 새로웠다.
“행복은 우연한 사건일 뿐이다. 18세기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슬로건으로 ‘행복 장사’를 시작했다. 혹자는 플라톤의 ‘윤리학’에 등장하는 유다이모니아(eudaimonia)를 행복이라고 오역하는데, 틀렸다. 유다이모니아는 자기 삶에서 찾은 고유 임무에 최선을 다한다는 뜻이다.”

요즘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뜻의 ‘소확행(小確幸)’이 유행이다.
“행복은 절제의 예술이다. 행복학파인 아테네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한 말이 있다. ‘나는 밀크와 치즈 하나만 있으면 행복하다.’ 행복은 결국 적게 가지는 데서 온다. 에피쿠로스가 말한 행복의 조건은 세 가지다. 첫째, 수준을 알라. 둘째, 친구를 사귀라. 셋째, 묵상하라. 특히 에피쿠로스는 친구를 정원 공동체로 확장했는데, 이게 4세기 이후 수도원이 됐다. 적게 재배해서 나눠 먹는 공동체다.”

공부는 원래 좋아했나.
“훌륭한 스승을 만났다. 하버드대에 있을 때 고대 근동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존 휴너가르드 교수의 수업을 들었다. 고전 에티오피아어를 배웠는데 너무 어려워서 그만두려고 찾아갔더니 나를 지그시 보며 묻더라. ‘너는 뭐가 재미있니?’ 그 질문을 받고 멍해졌다. 그때까지 공부는 그냥 하는 거였지 재미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거든.”

배철현 교수의 신작 ‘수련’. 사진 교보문고
배철현 교수의 신작 ‘수련’. 사진 교보문고

휴너가르드 교수는 그에게 두 가지 화두를 던졌다. ‘재미있는 걸 하라’ 그리고 ‘Show yourself(스스로를 드러내라)!’. 그때부터 배철현의 ‘myself(자신·自信)’를 찾는 여정이 시작됐다.

그가 스승에게 받은 가장 큰 선물은 조깅하는 습관이었다. “그분이 마라톤 선수였다. 나한테도 운동하고 나머지 시간에 공부하라고 했다. 내 두 번째 스승은 우리 집 두 마리 진돗개다. 그 아이들이 나를 뛰게 한다. 스승이 다른게 아니다. 나를 변화시키면 스승이다.”

당신은 무엇을 가르치는 스승인가.
“학교에서는 종교학을 가르친다. 교과과정으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가르친다.”

그 많은 종교를 가르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종교는 문명을 만든 사상적 근간이다. 기독교엔 서양사가 있고 이슬람교엔 중동의 역사가 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이해하려면 유교와 도교를 알아야 한다. 더불어 나는 희랍어, 라틴어, 아랍어, 히브리어를 공부했고 경전을 해석해서 영원의 세계와 죽음의 문제를 가르친다.”

당신에게 신(神)은 어떤 존재인가.
“‘구약성경’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그 존재를 물었을 때 신은 ‘나는 나다’라고 한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도 번역한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한 사람이 신이다. 나는 이 구절을 ‘내가 되고 싶은 나’라고 바꿔 말하고 싶다.”

각 종교에서 추출한 지혜가 있다면 무엇인가.
“샬롬(Shalom)이다.”

샬롬은 기독교에서 ‘평안’을 뜻하는 인사로 쓰이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히브리어로 ‘샬롬’이라고 하고, 아랍 사람들은 아랍어로 ‘(마아) 살라마’라고 한다. 오래된 셈족어 어근 ‘샬람(shalam)’에서 나온 말이다. 기원전 23세기 신전 경제 문서의 쐐기 문자에서 발견됐는데, 진짜 뜻은 ‘돈을 다 갚은 상태’다.”

2015년 8월 26일 저녁,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있는 ‘건명원’에서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 조선일보 DB
2015년 8월 26일 저녁,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있는 ‘건명원’에서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 조선일보 DB

샬롬이 돈을 다 갚은 상태라고?
“은유적으로 풀이하면 태어나면서 진 빚을 다 갚은 상태, 삶에서 자기가 해야 할 임무를 다한 상태다. 코란에 따르면 마지막 날 신이 내려와서 ‘마아 살라마’라고 묻는데 그 말은 ‘맡겨진 임무에 최선을 다했느냐?’다. 심판은 십계명을 어겨서 벌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할 일을 안 해서 벌받는 거다. 단테의 사후세계 여행서인 ‘신곡’에는 곱씹어볼 만한 아주 중요한 구절이 나온다. 지옥의 세 번째 노래에서 단테가 안내자인 베르길리우스(로마의 서사시인)에게 ‘지옥의 성문에도 못 들어가서 신음하는 저 사람들은 누구냐?’라고 묻는다.”

가히 충격적인 장면이다.
“그 사람들은 살아 있을 때 칭찬도 받지 않고 욕도 먹지 않고 산 미지근한 영혼들이다. 자신의 삶에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소심하고 비겁한 자들, 죽은 채로 삶을 낭비한 자들이다. 단테는 이 비겁한 자들을 지옥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최악의 인간으로 묘사한다. 홀로코스트 생존 작가인 엘리 위젤이 말했다. 역사적 폭력 앞에서 아무런 태도를 보이지 않는 모습이 최고의 악(惡)이라고. 그 개념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쓴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도 나온다.”

사람이 미지근해지고 비겁해지는 이유가 뭔가.
“목숨을 바쳐서 할 만한 감동적인 임무를 찾지 못해서다. ‘비겁함’은 위대한 자신에 대한 상상력 부재에서 온다. 그렇다면 죄(罪)는 무엇인가. 영어 단어 ‘err(실수를 범하다)’의 근본 의미는 ‘길을 잃다, 목적을 상실하다’다. 죄는 목적을 상실했을 때 나오는 실수다. 그래서 우리는 청년들에게 수시로 ‘목적’을 물어야 한다. ‘너는 뭐가 재미있니’ ‘너는 뭘 하고 싶니’라고. 지식은 ‘내가 누구인지, 내 임무는 무엇인지’ 아는 것이고 무식은 그걸 모르는 상태다.”

배 교수는 2013년부터 서울남부교도소의 수감자들에게 랠프 월도 에머슨(미국 사상가 겸 시인)의 ‘자립’이나 성 오거스틴의 ‘고백록’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노숙자들에게 철학, 시, 미술사, 논리학 등을 가르쳐 갱생을 도왔던 미국의 클레멘트 코스(인문학을 배울 수 있는 교육 과정)가 모델이다. 살인과 성범죄 등을 저지른 수용자들이 모인 그 교실은 ‘플라톤의 동굴’이 됐다. 2015년엔 대한민국 최초의 인문학교 ‘건명원(建明苑)’도 발족시켰다. 기업인 오정택 두양 회장이 100억원을 기부해서 서울 북촌에 만든 건명원에는 첫해 모집 인원이 30명인데 900명이 몰렸다.

배 교수의 주도로 최진석(서강대 중국철학), 김대식(카이스트 뇌과학), 주경철(서울대 서양사학) 등 국내 석학들이 교수진으로 참여했고, 동서양의 고전·과학·역사·예술을 총망라한 ‘지식의 향연’이 펼쳐졌다. 서울대 출신, 고졸 출신, 실업자, 케임브리지대 졸업생이 함께 뒤엉켜 ‘세상에 없던 학교’가 탄생했다.

결국 선생이 전하는 복음의 실체는.
“‘더 나은 자신이 되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다’는 걸 알면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고 흉내 내는 삶을 멈출 수 있다.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하니 타인의 삶에 중독되고 분노하는 거다. 방송에서 남 먹는 거 쳐다보고 갑질하는 재벌들 욕하는데, 따져보면 근본적인 적폐는 내 안에 있다. 해결책이 뭐냐. 자발적 고립이다. 그 시간에 자기 자신을 심오하게 쳐다봐야 한다.”

좌정하면 정말 진부한 삶에서 헤어나올 수 있나.
“확신한다. 자기에게 편리한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단 10분간이라도 자신에게 집중해보라. 그 자리는 예루살렘보다, 메카보다 거룩하다. 나를 변화시키니 종교적인 시간이다. 내가 날 위하지 않으면 누가 날 위하겠나. 그 자리에서 내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뭔가를 떠올려 보라. 한 달 동안 안 해도 될 일을 적어서 정말로 안 하도록 노력해 보라. 그러면 자기가 진짜 할 일이 생길 거다. 그걸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