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케 히시다‘보더︱코리아’. 사진 김진영
유스케 히시다‘보더︱코리아’. 사진 김진영

해외에 나가면 한국을 방문해본 적 없는 외국 친구들로부터 서울에 사는 것이 무섭지 않느냐는 질문을 더러 받았던 기억이 있다. 이들은 미디어를 통해 전해지는 한반도에 대한 이미지와 수사를 통해 남북이 항상 긴장 관계에 있을 것이라 전제하고 이런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맥 빠지는 답변을 하곤 했지만 말이다.

한국에 사는 우리도 미디어의 영향에서 예외는 아니다. 미디어는 북한에 대해 특정한 이미지를 만든다. 북한에 관한 뉴스는 북한 주민들의 일상보다는 북한의 체제 위기나 핵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뉴스로서의 시의성이나 사람들의 관심사에 비춰 볼 때 이런 보도 방향은 충분히 이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뉴스들 때문에 내가 북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반쪽일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거시적인 차원의 쟁점들로만 북한에 대한 이미지를 채우고, 미시적인 차원에서는 텅 빈 채였다.

북한의 일상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사진집은 그래서 더욱 생경하고 흥미롭게 다가왔다. 2017년 일본 출판사 리브로 아르테(Libro Arte)가 출간한 유스케 히시다(菱田雄介)의 ‘보더︱코리아’는 일본 사진가인 유스케가 2009년부터 2015년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북한을 방문하고, 또다시 여러 차례 한국을 찾아서 두 나라의 모습을 담은 사진집이다. 유스케는 ‘보더’, 즉 38선이라는 경계가 원래는 하나였을 남과 북을 70년간 갈라놓으면서 이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꿨는지에 흥미를 가졌다.

그는 북한에서 먼저 인물이나 장소를 촬영한 후에, 한국에서 이와 비슷한 성별과 연령의 사람 혹은 장소를 유사한 구도에서 촬영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사진집의 왼쪽에는 북한의 모습을, 오른쪽에는 한국의 모습이 담기도록 구성했다. 책의 왼쪽과 오른쪽 페이지를 가르는 중간 접지선이 마치 한국과 북한을 가르는 보더, 38선이라도 되듯이 말이다.

한국과 북한을 양 페이지에 병치하는 이와 같은 기본적인 레이아웃은 만약 유스케가 북한의 모습만 담았거나 혹은 한국과 북한의 모습을 따로 나눠서 사진집에 담았더라면 불가능했을 감상과 질문을 낳는다. 이 사진집은 기본적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남과 북을 비교하게 한다. 병원에서 갓 태어난 신생아의 모습이나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의 모습은 남과 북이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부모의 손을 꼭 잡고 산책하는 아이의 모습이나 바다에서 수영을 즐기는 사람의 모습도 그러하다. 이 사진들은 남과 북이 유사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차이도 눈에 띈다. 북한 학생들이 입은 교복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얼굴이 새겨진 배지가 달려 있고 한국 학생들의 교복에는 학교 마크가 달려 있다. 북한의 가정집에는 김일성·김정일의 초상사진이 걸려 있다면, 한국의 가정집에는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그렇다면 이 사진집이 말하고 싶은 것은 대체 어느 쪽인 걸까? 남과 북이 닮았다는 것인가, 아니면 다르다는 것인가?


보편적 인류애보다 문화적 다양성 보여줘

이 사진집을 보면서 서로 다른 문화 혹은 국가를 함께 모아 보여준 사진사(史)의 유명한 사례가 떠올랐다. 바로 1955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인간가족(The Family of Man)’ 전시다. ‘전 세계 인류의 본질적인 하나됨’을 보여주기 위해 기획된 이 전시는 273명의 사진가가 세계 각국에서 촬영한 503점의 사진을 선정해 탄생, 죽음, 즐거움, 슬픔, 일, 놀이 등 삶의 여러 순간들을 보여줬다. 전시 기획자 에드워드 슈타이켄은 전시 서문에서 ‘일상적인 삶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요소와 감정’을 강조했다. 보편적 인류애라는 휴머니즘 정신으로 무장한 이 전시는 미국 순회전과 세계 순회전을 통해 40여 개국에서 약 900만 명의 관람객을 끌어들여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둔 전시로 기록돼 있다.

대중적 성공과 달리, 프랑스의 이론가인 롤랑 바르트는 이 전시가 “인류 공동체라는 애매모호한 신화”에 기대고 있다고, 즉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가상의 공동체에 기대고 있다고 혹독히 비판한다. 바르트는 이 전시가 ‘인간가족’이라는 신화를 작동시키기 위해 먼저 차이를 보여준 후 이 차이들을 보편성으로 수렴시키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 전시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른 피부색을 가지고 서로 다른 옷을 입은 수많은 인물들을 등장시키지만, 이들은 궁극적으로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태어나고 일하고 웃고 죽는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유스케는 70년간의 단절을 겪고 있는 한국과 북한이라는 두 문화를 어쩌면 이제는 신화일지도 모를 ‘하나의 국가’로 보는 관점과는 거리를 두는 듯하다. 그의 사진 곳곳에는 한국과 북한에 고유하게 존재하는 문화적 표식이 담겨 있다. 같은 성별,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이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고 한들 그것은 외견상의 유사성에 불과하다. 그의 사진 속에는 슈타이켄이 그토록 배제하려고 했던 마크·글자·도안이 등장한다. 이것들의 차이만큼이나 한국과 북한 사람의 사고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외견상의 유사성을 넘어 이 사진들에 대해 생각해보면 남과 북이 유사하다 혹은 다르다라는 두 가지의 감상 외에 다른 지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바로 각 문화가 한 사람의 정체성과 사고방식에 미치는 힘이다.

유스케 히시다 ‘보더︱코리아’. 사진 김진영
유스케 히시다 ‘보더︱코리아’. 사진 김진영

유스케가 이 사진집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남과 북의 비교 자체가 아니라 남과 북의 닮음 혹은 차이를 낳은 문화의 힘이 아니었을까?

사진집의 여러 페이지를 오가며 나는 다시 북한에서 갓 태어난 아기와 한국에서 갓 태어난 아기의 사진을 마주한다. 이 사진집에는 어쩌면 이 아기의 성장 과정이 담겨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북한에서 자라난 아이는 체제에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김일성·김정일 배지를 달 것이고, 한국에서 자라난 아이는 소속감을 갖기 위해 학교 마크가 있는 교복을 입을 것이다. 두 아기의 사진은 태어남과 동시에 거부할 수 없도록 주어지는 문화의 힘을 역설하고자 함인지도 모른다.

나는 바르트의 말을 거꾸로 인용하고 싶다. 유스케의 이 작업은 탄생이라는 인류 보편의 순간으로부터 문화적인 다양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이다.


▒ 김진영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 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