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피플의 근무지 겸 휴식처였던 신사동 가로수길. 젠트리피케이션으로 금싸라기 땅이 됐다. 사진 조선일보 DB
패션 피플의 근무지 겸 휴식처였던 신사동 가로수길. 젠트리피케이션으로 금싸라기 땅이 됐다. 사진 조선일보 DB

“이제는 을지로를 떠날 때가 된 것 같아.”

얼마 전 서울 중구 을지로 3가 부근에 작업실을 둔 사진작가를 만났다. 사진관을 시작으로 5년째 을지로에서만 생활해 온 그는 다른 미술가, 인테리어 디자이너와 함께 곧 중구 필동으로 작업실을 옮길 예정이라고 했다. 을지로처럼 인쇄소와 현상소, 공구상가가 가까운 필동은 편리한 작업환경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상대적으로 월세가 저렴하기 때문이다.

을지로의 변화가 시작된 건 2015년으로 기억한다. 미술가 이병재와 사진가 이윤호가 수표동의 허름한 건물 한쪽에 작업실을 겸한 인더스트리얼 느낌의 바(Bar) ‘신도시’의 문을 열었다. 아메리칸 드림을 연상시키는 이 기묘한 공간을 중심으로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옛 물건들을 파는 ‘우주만물’, 디자인 스튜디오 ‘코우너스’, 종로구 샐러리맨 컬렉터들을 위한 부담 없는 가격대의 작품을 판매하는 ‘소쇼룸’과 같은 소규모 갤러리들,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먼저 터를 잡았다. 이후 또 다른 예술가와 그 친구들이 모여 아지트가 생겨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취향을 동경하는 청년들이 거리를 배회했다. 늘 그래 왔듯 라이프스타일 잡지들이 새로운 지역의 부흥을 먼저 포착했고, 방송국 카메라가 그 뒤를 쫓았다. 경리단길에 ‘장진우 거리’를 형성하며 청년 창업의 신화를 쓴 장진우 셰프의 ‘그랑블루’까지 들어섰다.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점과 대규모 자본이 밀려드는 건 시간문제였다.

예술가들이 모이는 곳은 늘 땅값이 오른다. 바다 건너 뉴욕의 소호나 윌리엄스버그까지 예로 들 필요도 없다. 서울은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낙후된 지역의 개발로 임대료 등이 상승하며 원주민이 밀려나는 현상)의 대명사다. 1990년대 중반 대학가 하숙집에서 홍대 앞의 변화를 목도하면서도 아무 생각 없이 신나게 라이브 클럽이나 쏘다니던 나는 가로수길과 삼청동에 이어 마침내 경리단길까지 금싸라기 땅이 되는 것을 보며 심각하게 거주지 문제를 고민하게 됐다. 내가 셋집을 구한 곳은 다 집값이 올랐다. 그것도 아주 무섭게.

패션지의 신입기자가 된 후, 홍대 앞을 떠나 처음 구한 나만의 거처는 신사역 부근이었다. 2005년의 가로수길은 그야말로 가로수가 우거진 한가로운 길이었고, 무엇보다 직장과 가까웠다. 일찌감치 패션직업학교가 들어서며 봉제거리가 형성된 이곳은 압구정동이나 청담동의 월세를 감당하기 힘든 신진 디자이너들의 쇼룸과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소품 가게, 화랑이 주를 이뤘다. 자연스럽게 사진 스튜디오와 패션 브랜드 홍보 대행사, 패션 잡지사가 인근에 터를 잡았다. 동종 업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만든 예쁜 카페와 술집이 생겨났다. 가로수길은 멋쟁이 패션 피플의 근무지 겸 휴식처였다. 스마트폰 문화가 급성장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가로수길은 소위 ‘사진발’이 좋은, 요즘 식으로 보면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인스타그램에 인증샷 찍어 올리기 좋은)’한 곳이었다.

이태원은 오래 전부터 이 도시의 이방인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머물 곳이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가로수길의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게 된 나는 경리단길로 이사했다. 동네 세탁소와 정육점 사이에 호그와트 마법 학교로 가는 9와 ¾ 플랫폼만큼이나 기이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은 ‘서울살롱’이 문을 연 것은 2012년 여름이었다. 장진우 거리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고 장진우 카페와 식당 정도만 유지되고 있던 상태였다. 원래 장진우는 셰프이기 이전에 클럽 매거진의 포토그래퍼였고, 해당 잡지사가 이태원 인근에 있었다. 그때 나는 집을 샀어야 했다.

을지로 인더스트리얼 느낌의 바 ‘신도시’. 사진 신도시 페이스북
을지로 인더스트리얼 느낌의 바 ‘신도시’. 사진 신도시 페이스북


‘밀려남’의 주기 빨라져

젠트리피케이션은 SNS 발달과 더불어 더욱 가속화되는 듯하다. 요즘은 그 주기가 짧아졌다. 익선동이 그렇고, 연남동과 상수동에 이어 요즘은 동대문 뒷골목과 필동 그리고 효창동이 들썩인다. 누군가는 예술가들을 ‘미생물’에 빗대어 표현하기도 했다. 가장 지저분한 지역에 들어가 더러운 것들을 다 먹어치우고 깨끗하게 해놓으면 땅값이 올라버려 또다시 더러운 곳을 찾아 헤맨다는 이유에서다.

예술가들이 정화한 지역의 몸값이 오르는 데는 교통의 편의성도 한몫한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비록 주거 환경이 낙후하더라도 대중교통 이용이 편리한 곳을 선호한다. 이 때문에 ‘힙 플레이스’라고 명명되는 지역들은 평창동이나 강남의 부촌과 달리 주차 공간이 확연히 부족하다. ‘뚜벅이’들에게 주차는 고려 대상이 아닌 탓이다. 

“필동에서는 더 이상 옮겨다니지 않아도 돼요.” 가을이 오기 전에 을지로를 떠난다는 작가는 큰 마음먹고 자그마한 건물을 한 채 구입했다. 가난하지만 지조 있는 선비들의 마을이었던 서울 남촌의 필동은 일제 시대에 필지가 여러 차례 나뉜 데다 해방 이후 도로 확장 및 신설 과정을 거치며 부정형 가구들이 다수 발생했다. 기기묘묘한 형태의 이 초소형 건물들은 중심가의 여느 부동산과 달리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리고 나도 집을 샀다. 1년 전 지인과 함께 효창공원역과 효창공원 사이에 손바닥만한 상가주택을 하나 장만했다. 여기엔 작업실을 겸한 문화 공간을 만들 생각이다. 재개발로 한창 어수선한 이곳에는 신생공간 ‘아카이브 봄’과 젊은 작가들의 작업실 그리고 하나둘 생겨나는 특색 있는 카페가 있다.

여전히 우린 가진 것이 별로 없고 밥벌이는 고단하기만 하다. 로또의 기적은 이번 주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일확천금을 기대하느니 염력이라도 배워 바닷물을 가르는 쪽이 더 현실성 있어 보인다. 이번 생은 정말 틀려먹은 걸까? 저축예금의 금리는 2%를 밑돌고 대출 이자는 자꾸만 쌓여만 간다. 비트코인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개미 투자자들의 영혼이 모쪼록 안녕하길.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내가 산 집값이 대출금을 갚고도 남을 만큼 올랐다는 것이다. 고작 1년 사이에 말이다. 기분이 좋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하다. 이 지역의 호재라는 ‘용산마스터플랜’ 같은 건 알지도 못했다. 한국이라는 좁은 땅에서 그래도 믿을 건 역시 땅뿐이란 말인가. 젠트리피케이션을 그토록 원망해놓고 이제는 조심스레 지역의 부흥을 기대해 보는 간사한 마음이란!

▒ 이미혜
패션·미술 칼럼니스트, 문화기획자, 보그코리아 컨트리뷰팅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