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고급차 가운데 최고 수준의 준자율주행차 기술을 적용한 기아차 K9. 자율주행 중인 K9 계기반. 사진 기아자동차
국산 고급차 가운데 최고 수준의 준자율주행차 기술을 적용한 기아차 K9. 자율주행 중인 K9 계기반. 사진 기아자동차

운전대, 맡길 수 있을까. 집에서 회사까지 거리는 10㎞가 조금 넘는데 출근 시간은 한 시간을 넘기기가 예사다. 시도 때도 없이 막히기로 유명한 서울 중랑구 동일로를 지나야 하기 때문이다. 군자지하차도에서 시작되는 정체는 보통 영동대교까지 이어진다. 4㎞ 남짓한 도로에서 30분 넘게 갇혀 있다 보면 별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서울을 관통하는 한강 위를 거대한 콘크리트로 덮어 남과 북(?)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하는, 내가 생각해도 참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어서 빨리 자율주행 시대가 열렸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기사를 둘 형편은 못 되니 차가 스스로 운전하는 시대라도 빨리 왔으면 정말 좋겠다. 그러면 막히는 도로에서 운전대를 부여잡고 하염없이 앞차 꽁무니만 보며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을 텐데…. 아직 레벨 5 수준의 완전 자율주행차가 정식으로 출시되진 않았지만 여러 자동차 회사에서 어느 정도 스스로 운전할 수 있는 준(準)자율주행 기술을 선보이고 있다. 희망적이다. 그런데 과연 이들 기술은 얼마나 쓸모 있을까. 얼마나 믿을 만할까.

기아자동차는 신형 K9을 출시하면서 국산 고급차 가운데 최고 수준의 첨단 주행 기술을 적용했다고 자랑했다. 이들이 말하는 첨단 주행 기술에는 준자율주행을 가능케 하는 첨단 운전자 지원 시스템(ADAS)이 포함된다. 앞차와의 간격을 스스로 조절하며 달리는 어댑티브 크루즈컨트롤과 차선을 벗어나지 않도록 해주는 차선 유지 보조 시스템이 ADAS의 핵심 기술이다. 기아차의 자랑이 허언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K9의 준자율주행 기술을 테스트해봤다.

대시보드 왼쪽에 있는 차선 유지 보조 시스템을 켜고 어댑티브 크루즈컨트롤을 실행하자 차가 설정한 속도로 스스로 달렸다. 잠시 후 계기반에 자율주행이 가능하다는 초록색 스티어링휠 표시가 떴다. 스티어링휠에서 손을 뗐다. 곧게 뻗은 도로뿐 아니라 굽은 도로도 스티어링휠을 스스로 돌려가며 알아서 달린다. 앞차와의 간격이 가까워지면 스스로 브레이크를 밟아 간격을 유지했다. 양옆 차로에 차가 지나가면 계기반에 경고를 띄웠다. 기아차 측은 K9에 적용한 크루즈컨트롤이 내비게이션을 기반으로 해 도로 환경을 파악하며 달린다고도 설명했다. 그 덕에 굽은 도로에서 속도를 낮추니 불안함이 덜하다. 인상적인 건 과속카메라를 인식해 카메라 앞에선 스스로 속도를 낮춘다는 거다. 고속도로에선 자율주행으로 달릴 수 있는 시간이 10분을 훌쩍 넘는다. 10분쯤 지나면 경고음이 한 번 울리고 ‘핸들을 잡아주세요’라는 문구가 계기반에 나타났다. 그래도 운전대를 잡지 않으면 경고음이 요란해지다가 자율주행이 풀렸다. 막히는 길이나 복잡한 도로에서는 운전대를 맡기기가 불안하지만 한산한 고속도로에서는 맡겨도 되지 싶다.

BMW 역시 7세대 5시리즈에 첨단 기능을 대거 탑재했다. 준자율주행 기술도 그중 하나다. 스티어링휠 왼쪽에 버튼을 따로 만들었는데 이 버튼을 누르면 자율주행이 활성화된다. 초록색 스티어링휠 표시등이 계기반에 뜨면 운전대에서 손을 떼도 된다는 뜻이다. 스스로 달리는 시간이 1분도 채 되지 않아 K9보단 짧지만 차선을 읽으며 스스로 달리는 폼은 안정적이다. 초록색 스티어링휠등은 약 6초 후에 노란색으로 바뀌면서 스티어링휠을 잡으라는 손 모양을 계기반에 띄웠다. 그래도 스티어링휠을 잡지 않으면 약 40초 후에 이 아이콘이 빨간색으로 바뀌면서 자율주행이 자동으로 해제된다. 미처 대응하지 못하면 스르륵 차선을 넘어가니 주의해야 한다.

차선을 읽으며 스스로 달리는 BMW 5시리즈. 사진 BMW
차선을 읽으며 스스로 달리는 BMW 5시리즈. 사진 BMW


스스로 차선 바꾸는 기능은 적용 못 해

메르세데스 벤츠는 신형 E클래스를 비롯해 S클래스에도 준자율주행 기술을 담았다. 대시보드 왼쪽에 있는 스티어링휠 모양 버튼을 누르면 자율주행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고, 차선 위에 차가 있는 그림의 버튼을 누르면 차선을 벗어나지 않도록 해준다. 자율주행 실력은 일품이다. 차선을 제법 잘 읽는다. 스스로 달리는 시간은 1분이 조금 넘어 5시리즈보단 길지만 K9보다 짧다. 하지만 자율주행이 풀렸을 때 브레이크를 밟아 안전을 도모하는 게 마음에 든다. ‘주인님, 이제 스스로 운전하세요’라고 경고하는 것 같다.

단, 신형 S클래스는 국내에 들어오면서 액티브 레인 체인지 어시스트가 빠졌다. 자율주행을 실행한 상태에서 시속 80~180㎞로 달리다가 방향지시등을 켜면 차가 스스로 차선을 바꾸는 기능 말이다. 왜냐고? 국내 도로교통법에 따르면 모든 차의 조향장치와 제동장치를 비롯한 그 밖의 장치를 운전자가 정확하게 조작해야 한다. 그러니까 국내에서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자동차가 차선을 스스로 바꾸는 기능을 발휘하는 건 아직 불법이다. S클래스뿐 아니라 테슬라 모델 S나 BMW 5시리즈 등도 준자율주행 기술에서 스스로 차선을 바꾸는 기능이 빠져 있다.

볼보 S90은 크루즈컨트롤을 실행한 다음 스티어링휠에 달린 버튼을 눌러 파일럿 어시스트를 활성화해야 하는 게 번거로울 뿐 아니라 자율주행도 생각만큼 잘하지 못했다. 제네시스 G80 역시 스스로 달리는 실력은 형편없었다. 그냥 쭉 뻗은 도로에서 살짝 꺾였을 뿐인데도 바로 차선을 넘어가기 일쑤였다. 그것도 경고음 하나 없이. 이래서 운전대를 믿고 맡기겠나. 준자율주행 기술만 놓고 봤을 때 발군의 실력을 보인 건 K9이다. 벤츠 S클래스나 BMW 5시리즈는 액티브 레인 체인지 어시스트가 빠진 게 아쉽다.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준자율주행 기술은 편의장비가 아니라 안전장비다. 운전하다가 깜빡 졸거나 딴 생각을 하다 앞이나 옆을 제대로 보지 못해 사고가 나는 것을 막기 위해 보조하는 장비라는 거다. 국내에서 준자율주행 기술을 실행하다 사고가 났을 때 이를 책임져야 하는 건 오롯이 운전자다. 앞에서도 말했듯 운전자는 운전과 관련된 모든 행동에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준자율주행 기술만 믿고 운전하면서 딴짓하는 건 삼가시길. 아직 마음 놓고 운전대를 맡길 세상은 오지 않았다.

▒ 서인수
모터트렌드 코리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