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현대문학의 거장 필립 로스가 5월 22일 맨해튼의 한 병원에서 타계했다. 그는 생전에 상복이 많았지만 노벨 문학상과는 끝내 인연이 없었다. 사진 AP연합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 필립 로스가 5월 22일 맨해튼의 한 병원에서 타계했다. 그는 생전에 상복이 많았지만 노벨 문학상과는 끝내 인연이 없었다. 사진 AP연합

아버지의 유산
필립 로스 지음|문학동네
1만3800원|284쪽

미국 소설가 필립 로스가 5월 22일 지병으로 85세에 타계했다. 폴란드계 유대인의 시선으로 미국 현대사를 조명해온 로스는 전 세계적으로 미국의 생존 작가 중 최고봉으로 꼽혔다. 그의 대표작 ‘미국의 목가’를 비롯한 소설 11권이 우리말로 이미 번역돼 고정 독자층을 거느려왔다. 비소설 중엔 그가 부친의 죽음을 지켜본 과정을 담은 책 ‘아버지의 유산’이 있다.

로스가 쉰 살을 맞을 무렵 여든여섯 살의 부친이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모친은 앞서 별세한 상태였다. 그의 부친은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평생 보험회사원으로 근무하면서 관리자까지 됐다. 그런 부친 덕분에 로스는 대학 교육까지 받고 유명 작가로 우뚝 섰다. 그러나 그가 뉴욕에서 활동할 때 뉴저지에 홀로 살던 부친이 안면근육마비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고령에 뇌수술을 받아야 할 고비에 처했다. 그는 부친을 돌보면서 죽음을 주제로 한 한 편의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 과정은 아버지를 재발견해 과거와 현재를 잇고 더 나아가서 스스로의 미래를 어렴풋이 느끼는 의식(儀式)에 가까웠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조부가 면도할 때 쓰던 컵을 건네받았다.

“사는 건, 아버지한테는, 기억으로 이루어지는 거지. (중략) 나는 아버지를 태우고 다니고, 아버지하고 함께 앉아, 아버지가 평생 해낸, 유대인 한 세대 전체가 해낸,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일이 그분들을 미국인으로 만들어갔다는 생각을 해.”


아버지의 죽음 지켜본 과정을 책으로

아버지의 병세는 수술을 해도 완치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로스는 뇌수술을 앞둔 아버지가 혹시 수술 이후 의식을 찾지 못할 때를 대비해 ‘사망 선택 유언장’을 만들었다. 그때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보험회사에 갔다가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생명보험은 세상에서 가장 팔기 힘든 거야. 왜인지 아니? 고객이 이길 수 있는 길은 죽는 것뿐이기 때문이지.” 로스는 그런 아버지에게 보험사가 작성한 연명 치료 거부 서류를 전화로 읽어주면서 “죽어야만 이길 수 있는 고객에게 처음으로 보험증권을 판 보험사 직원이 된 느낌이었다”고 고백했다.

아버지는 결국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의사는 로스에게 인공호흡기를 뗄 순간을 결정하라고 했다. “죽는 것은 일이었고, 아버지는 일꾼이었다. 죽는 것은 무시무시했고 아버지는 죽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이제 귀에 담을 수 없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했다.”

아버지가 숨을 거둔 뒤 로스는 유대인의 전통 수의(壽衣)를 입혀 장례식을 치렀다. 한 달 보름이 지난 뒤 그는 꿈을 꿨다. 아버지가 “나는 출근할 때 걸치던 양복을 입었어야 했다”라며 나무라는 꿈이었다. 로스는 “내가 아버지에게 영원히 엉뚱한 옷을 입혀놓았다”고 깨달았다. “꿈은 나에게 내 책이나 내 인생에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내 꿈에서는 내가 영원히 그의 어린 아들로서 살 것이라고, 어린 아들의 양심을 갖고 살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모든 아버지로서 계속 살아서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심판하듯이. 어떤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