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박사의 신동막걸리’의 반반 막걸리와 육전, 배추전, 호박전. 사진 C영상미디어 장은주
‘이박사의 신동막걸리’의 반반 막걸리와 육전, 배추전, 호박전. 사진 C영상미디어 장은주

봄의 술잔엔 꽃잎을 띄워 낭만을 찾고, 여름 장마철엔 전을 지져 길고 긴 빗소리에 장단을 맞춘다. 가을 단풍이 지면 도토리묵을 무쳐 다람쥐 식량을 축내고 겨울 추위엔 김장 김치와 두부 한 모를 탐낸다. 이게 다 막걸리 때문이다. 막걸리를 좋아하는 마음의 총량을 매일 쪼개 소분하자면 하루에 한 병씩은 너끈히 비워야 할 정도다. 비구름을 품은 텁텁한 더위에 지쳐 어깨 끝이 축축 처진다. 막걸리 한 사발로 힘을 얻어야 한다. 용강동으로 향한다. 마포역 1번출구를 기점으로 신석초등학교를 향해 걷는다.

도보 15분 정도의 이 거리를 ‘마포음식문화거리’라 부른다. 마포갈비와 주물럭 브랜드화 추진, 주변 전통시장을 연계한 상권 활성화를 명목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약 150개의 크고 작은 음식점들이 밀집해 있으며 그 구색도 다양하다. 그중 양대창은 물론 평양냉면까지 접수한 ‘청춘구락부’, 일본인들이 더 즐겨 찾는 고급 이자카야 ‘코료오리 하루카’, 애주가들의 성지인 모던 한식 주점 ‘락희옥’ 등 수준 높은 음식점들이 식도락거리에 의미를 더한다. 그리고 한 집 더. ‘이박사의 신동막걸리’를 빼놓을 수 없다.

보통과 다르다. 여느 막걸리 주점답지 않다. 간판에 막걸리를 내걸었지만, 싱글몰트 위스키 ‘라프로익’을 연간 100병 정도 팔며 전 세계 최고의 판매고를 올리기로 유명하다. 8년 전, 스무 평 남짓한 1층 매장에서 소위 대박을 친 뒤 2층까지 차지하고 여전히 성업 중이며 용강동의 명물로 자리잡았다.

‘이박사의 신동막걸리’의 제철메뉴인 제주부채새우. 사진 김하늘
‘이박사의 신동막걸리’의 제철메뉴인 제주부채새우. 사진 김하늘

처음 이 집을 맞이했을 때가 생각난다. 상호부터 호기심을 일으켰다. 박사가 만들었나? 얼마나 특출나게 맛있으면 신동막걸리라 이름 지었을까? ‘이박사’는 이원영 사장이 활동하는 싱글 몰트 위스키 동호회 아이디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그는 가게 건물 지하에서 IT(정보기술)콘텐츠 회사를 운영하며 한 달에 1억원은 너끈히 버는 능력 있는 사업가였고, 동시에 바이커이자 내로라하는 식도락가였다. 1억원을 호가하는 두가티 오토바이로 전국 방방곡곡 식도락 여행을 다니며 버는 족족 먹고 마셨다. 맛집은 말할 것도 없고, 양조장 투어까지 샅샅이 다니며 경험과 취향을 견고히 다졌다.

그러다 우연히 경북 칠곡군 지천면 신동재에 위치한 ‘신동 양조장’을 만났다. 신동막걸리의 공급처다. 100년이 넘는 역사의 양조장에서 노쇠한 양조 어르신이 빚어내는 막걸리 원액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그 자리에서 몇 통을 조달해 위스키 동호회 회원들과 나눠 마셨다. 평들이 하나같이 좋았다. 그날로 잘나가던 IT콘텐츠 회사를 정리했다. 수중에 남은 현금 3000만원을 들고 파리만 날리던 1층 초밥집으로 갔다. 초밥집 사장에게 3개월만 막걸리를 팔아보겠다며 창업 자금의 3분의 2를 주고 가게를 빌렸다.

나머지 자금은 무형문화재 고태주 선생의 ‘봉화 유기’에 투자했다. 그는 이를 고급스러운 느낌을 줘 한 푼이라도 더 벌어들이기 위한 ‘장사꾼의 전략’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막걸리의 가치를 허투루 담아 전하고 싶지 않았으리라. 음식은 그의 고향인 경북 영천에서 아버지가 농사지은 재료를 받아 어머니의 음식을 직접 만들어 냈다. 봉평 메밀 가루로 부친 배추전, 호박전 등 전문 요리사만큼의 기술은 없었지만 부모님이 일구고 일러주신 기본을 팔았다. 유동 인구가 적은 곳이지만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막걸리의 묵직함에서 오는 포만감

1층은 이른 시간부터 만석이다. 2층으로 올라가 간신히 자리를 잡는다. 기본 안주로 오징어 내장 조림이 나온다. 찜에 쓰이는 오징어의 내장을 활용해 일본식으로 졸여낸 것이다. 핵심 재료는 여전히 부모님에게 받아 쓰고, 맛의 절정에 오른 재료들은 철마다 구해 메뉴로 낸다. 전체 메뉴의 40% 정도를 차지하는 제철 메뉴는 계절마다 그 존재감을 발휘하며 단골들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나도 그 단골 중 하나다. 우선 ‘수퍼 드라이 막걸리’와 ‘젊은 호박전’ 한 접시를 시킨다. 수퍼드라이 막걸리는 공급처인 경북 봉화군의 법전 양조장에서 빚는 청량주에 감미료를 전혀 섞지 않도록 특별주문해 납품받는다. 오직 이 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수퍼드라이 막걸리의 맛은 그야말로 고연(固然)하다. 폭탄 같은 단맛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차디찬 씁쓸함이 홀연히 사라져 아련한 정취로 남는다. 달큰함이 은은하게 도는 젊은 호박전과 함께하면 그 조화가 높이 튀어 오르지 않고 얌전히 잘 맞아 떨어진다.

새콤한 채소무침과 곁들이는 육전. 사진 C영상미디어 장은주
새콤한 채소무침과 곁들이는 육전. 사진 C영상미디어 장은주

어울림이 좋은 것을 하나 더 꼽자면 이 집의 베스트셀러인 육전이다. 곁들여 나오는 새콤한 채소 무침이 술의 잔상과 가볍게 섞이고, 찹쌀가루로 부친 육전까지 함께 씹으면 고소함까지 더해진다. 첫 주전자와 전 한 접시를 뚝딱 비우고 신동막걸리 ‘원액’과 편육을 시킨다. 신동막걸리는 원액, 일반, 이 둘을 섞은 반반 세 종류가 있다. 일반은 8도 가량의 도수다. 이를 보다 센 도수의 원액과 반씩 섞은 것이 반반이다. 나는 주로 원액을 찾는다. 목구멍을 타고 부드럽게 넘어가며 느껴지는 농밀함이 좋다. 경북 영주에서 올라온 돼지고기로 삶은 편육 한 판을 시켜 원액과 함께 넘기면 그 묵직한 무게감이 기분 좋은 포만감을 안겨준다. 어떤 술과 안주를 조합해도, 어떤 사람과 함께해도 맛있다.

‘IT업계 출신의, 막걸리를 팔아 포르쉐를 타고 다니는 사장’. 이원영 사장의 별명이자 그가 일궈낸 그 자신이다. 그는 시골에서 상경해 20대의 절반을 용접과 땜질을 하며 보냈다. 매일같이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위험천만한 삶의 현장에서도 힘든 줄 모르고 일했다. 컴퓨터가 좋아 뒤늦게 대학에 진학해 산업공학을 배워 밥벌이를 했다. 번 돈은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데 다 쓰다시피 했다. 막걸리를 팔지만 전통은 잘 모르고, 음식을 일일이 만들지만 기술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전통을 팔고 기본을 판다. 신동막걸리는 그가 열심히 살아온 삶의 선물이자 즐기며 살아온 삶의 산물이다.


▒ 김하늘
외식 컨설팅 회사 ‘브랜드테일러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