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함께 굴러줄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사람을 만났더라도 따로 구르기는 멈추지 않는다.
일상에서 함께 굴러줄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사람을 만났더라도 따로 구르기는 멈추지 않는다.

작년 가을이었다.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오후에 중학교 2학년인 첫째와 그 친구 두 명을 내가 학교에서 픽업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동안 그들의 대화를 듣는 재미가 쏠쏠했다. 사춘기 소녀들의 터질 듯한 에너지로 차 안이 가득 차면 내부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나의 지난 시절도 눈앞의 풍경처럼 생생해졌다. 들뜨는 마음에 입술이 들썩여도 흐름을 깨트릴까 귀만 팔랑거렸다. 그맘때쯤 친구 G는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사귀어 매일이 설레는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G는 차에 오르면서 말했다.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아, 오늘은 토비와 사귄 지 한 달이 되는 날이에요.”

“벌써 한 달이니? 축하해.”

“내일 토비를 만나면 터져버릴 때까지 꼭 안아줄 거예요.”

G는 얼굴 가득 터질 듯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두 팔로 자신을 감싸 안으면서, 꿈꾸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 전 주말에는 G의 엄마인 데브라와 함께, 토비를 비롯한 학급 아이들을 데리고 영화를 보며 저녁을 먹었다. G와 토비는 걷는 내내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데브라와 나는 아이들 뒤를 따라 걸으며 사랑하기에 참 좋은 나이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사랑과 성에 관한 관심이 폭발하는 시기에 서로의 몸과 마음을 소중히 다루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도. 둘 다 같은 나이의 딸 둘을 키우고 있어서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더 많았다. 아이들은 학교의 정기적인 성교육은 물론 가정의 보호자로부터 개방적인 성교육을 받아왔다. 성에 관한 관심과 이야기를 금기시하지 않고 잘 알고 배우고 존중과 배려와 함께 살아야 하는 것임을 학습해왔다. 나의 경우는 특히, 타인은 물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차분히 살피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습관을 지녀야 함을 가르치려 애썼다. 그리고 그날 데브라와 나눈 이야기 중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은, 여자의 성을 방어하고 보호해야 하는 것으로 가르치진 말자는 다짐이었다.

성이란 기쁨과 즐거움을 찾아가는 삶의 재료이기에 소중히 잘 다뤄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받은 성교육은 여성의 성을 보다 위축시키고 삶을 좀 더 제한하는 도구로 쓰이기도 했다. 여성의 몸은 임신과 출산의 도구이기에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여성 스스로 자신의 몸을 타인과 사회의 수단으로 소외시켜 왔다. 자신의 몸을 자신의 즐거움의 원천이기 전에 타인의 욕망 속 대상이 됨으로써 가치 있다고 느낀다거나, 아이를 낳아 키워야 할 몸이라는 조건 아래 조심히 다뤄야 한다는 설정은 여성에게 성의 즐거움과 가치를 외부 조건과 판단에 맞춰놓는 일이다.

자신의 욕망에 앞서 타인의 욕망을 당연히 앞세우고 사회의 잣대를 더 중요하게 놓아두는 습관은 스스로 원하는 것을 파악하는 능력을 발달시키지 못하게 한다. 남자에게 성은 당연한 즐거움이되 여자에게 성은 즐거움 이전에 보호해야 할 영역인 양 구분하는 사고방식은 여자를 연애에 있어 더욱 취약한 상태로 만들어 놓기도 한다. 연애의 끝을 여자에게 더 큰 실패이자 지우기 힘든 낙인처럼 여기게도 만든다.

다행히 G는 운이 좋은 편이다. 아직은 편견에서 자유롭게 자라는 중이다. 아이는 오래전부터 남자친구를 사귀고 싶어 했다. 토비와의 연애에 돌입해서 그들이 하는 일은, 점심시간에 함께 점심을 먹는 것이다. 마주 보고 앉아, 다른 아이들 속에 있어도 둘만이 고립된 듯 둥둥 떠 있는 일이다. 중력으로부터 잠시 해방되는 일, 그러다가 사랑의 공간을 데구루루 구르는 일. 그리고 G와 내 딸은 지난 가을 오후, 중력에 관한 멋진 이야기를 들려줬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였다.

“G는 전생에 졸탄이라는 행성의 거주자였다. 졸탄이라는 행성에는 중력이 없었고 그곳에 살고 있는 졸토니모들은 지구의 새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들은 새를 닮았지만 날지 않았다. 허공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온종일 허공을 구르면서 다른 졸토니모들과 지내는 행복한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졸탄 행성에 불행이 찾아왔다. 중력이 생겨나고 만 것이었다. 중력의 지배를 받게 된 졸토니모들은 더 이상 허공을 구를 수 없는 삶을 살게 됐다. 그건 무척이나 갑갑한 일이었다.”

그때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나의 딸 C가 말했다. “나는 바로 졸탄 옆의 행성 쏠탄 행성에서 살고 있었어. 비록 별은 달랐지만, 너를 멀리서 사랑하고 있었단다. 그래서 중력을 무릅쓰고 너를 찾아갔어. 함께 구르려고. 언덕을 함께 구르는 것도 꽤 재밌는 일이거든.”

G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C의 손을 잡고 외쳤다. “오오, 나도 기억 나 !”

둘은 두 손을 마주잡고 까르르 웃어댔다. 사랑스러운 아이들. 그들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나 역시도 중력이 있는 지구, 허공을 더 이상 데굴데굴 구를 수 없는 갑갑한 이 세상에 불시착했지만, 너희들과 함께해서 행복하구나.


사랑에도 중력이 작용해

대부분의 연애는 허공에 떠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사랑에도 중력이 작용한다. 일상으로 끌어내려지는 사랑은 때로 바닥을 각자 뒹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함께, 기꺼이, 나와 굴러줄 누군가를 만나 즐거운 구르기를 이어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사람을 만났더라도 따로 구르기는 멈추지 않는다. 함께 구르는 사람을 연인 한 사람으로 두지 않고, 주변에 든든한 구르기 친구와 동지를 두고 살면 좋다. G와 C의 우정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정이든 사랑이든 함께 구르기는 어처구니없이 끝을 맺기도 한다. 새로운 만남이 곧 시작될 수도 있고 그렇게 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모두 괜찮다. 연애의 끝도 연애를 하지 않음도 ‘실패’로 규정하지 않기를 바란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많은 여성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긴급구조요청과 같은 메시지를 받기도 했다. 연애의 힘든 과정과 고통스러운 끝맺음을 자존감 추락으로 이어버리는 경우를 자주 보기도 했다. 사랑과 성에 대한 방어적 태도를 깊이 내면화하면서 체득한 습관이기도 하다. 삶을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살다 보면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다. 사랑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종종 행복해야 보람 있고, 사랑받아야 가치 있다고 느낀다. 자신의 존재를 매달듯 외부에 걸어놓는 일이다. 줄이 끊기면 추락하고 상대가 놓아버리면 허우적댄다. 삶의 기본값은 행복이 아니다. 나는 항상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 또한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이자 최대한의 일은 삶으로부터 성장하는 일이다. 여기서 쉬이 무너지지 않는 즐거움이 온다. 어느 순간 부쩍 성장해서 예상했던 모습과 달리 인생을 누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다. 삶의 선물이자 기쁨이다.

G는 그로부터 한 달 만에 토비와 헤어졌다. 이유를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충분한 포옹과 키스가 없었거든요. 나에게는 더 많은 허그와 키스가 필요해요.”

아이는 자신의 욕망과 필요를 배워가는 중이다. 스스로 자신의 고유한 무게를 파악할 때 중력의 구르기는 더 즐거워진다.


▒ 이서희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영화학교 ESEC 졸업, 파리3대학 영화과 석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