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이치 사카모토의 전시가 열리고 있는 서울 중구 남창동 ‘피크닉’. 사진 글린트
류이치 사카모토의 전시가 열리고 있는 서울 중구 남창동 ‘피크닉’. 사진 글린트

‘패션과 음악은 어떤 관계일까?’ 지난 6월 말 류이치 사카모토 전시가 열리고 있는 서울 중구 남창동에 위치한 ‘피크닉(Piknic)’을 찾았을 때 든 생각이다. 1970년대에 지어진 붉은 벽돌의 제약회사 건물을 개조한 이 복합문화공간은 요즘 흔히 말하는 인스타그래머블(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하다는 뜻)의 모든 요소를 갖췄다. 카메라에 담고 싶은 예쁜 외관과 소셜미디어에 공유하고 싶은 기가 막힌 풍경에 ‘미쉐린 가이드’가 선정한 창의적인 퀴진 레스토랑 ‘제로 컴플렉스’가 입점해 있고, 유명 음악가의 전시까지 열리고 있으니 말이다. 이곳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남산 순환로를 따라 힐튼 호텔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피크닉’이라는 간판이 보이는데, 골목길이긴 해도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로 늘 북적이는 곳이라 근방에만 가면 느낌이 올 것이다. 전시장은 마치 패션쇼장 같았다.

드리스 반 노튼의 2016-2017 F/W 남성복 컬렉션 무대. 사진 드리스 반 노튼
드리스 반 노튼의 2016-2017 F/W 남성복 컬렉션 무대. 사진 드리스 반 노튼

건물 1층에 들어선 카페에는 런웨이처럼 긴 원목 테이블이 한가운데 놓여있다. 그 위로는 다양한 종류의 샹들리에가 줄을 지어 반짝인다. 드리스 반 노튼의 2016-2017 F/W 남성복 컬렉션 무대에서 인테리어 아이디어를 얻은 게 분명해 보였다. 주차장부터 입구까지의 오솔길은 파리 중심의 그랑팔레 안에 프랑스 남부 베르동 계곡을 통째로 옮겨놓았던 샤넬의 어느 쇼를 연상시켰다. 그 옛날 옷가게 주인들이 부유한 고객들에게 자신의 최신 디자인을 선보이기 위해 고안한 마케팅 수단에 불과했던 유행복 전시회가 어떻게 오늘날에는 종합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는지 그 과정을 여기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현대 패션쇼는 확실히 여러 영역의 디자이너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이번 전시의 주인공인 류이치 사카모토 역시 패션계와 인연이 깊다. 1978년 선구적 전자음악 그룹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YMO)’의 멤버였던 그는 잘생긴 얼굴과 패션 감각으로 당시 아이돌급의 인기를 누렸다.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옆머리를 직선으로 깎아 치는 YMO의 ‘테크노컷’ 헤어스타일이 유행하기도 했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우리에겐 동양인 최초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영화 음악 감독이자 피아니스트로 더 유명하지만, 사실 그는 음악 작업 외에도 패션모델, 영화배우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불과 2년 전에도 그는 H&M·겐조 컬렉션 화보에 모델로 등장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1970년대 일본 아방가르드 록 뮤지션과 도쿄 스트리트 패션을 콘셉트로 한 겐조의 2018 S/S컬렉션은 아예 류이치 사카모토를 브랜드의 뮤즈로 삼았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YMO의 다른 멤버들과 함께 패션 디자이너 요지 야마모토의 쇼 음악을 작업하기도 했다. 요지 야마모토의 쇼에서 음악은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2002년까지 파리 런웨이 무대에 사용된 음악을 모은 음반 ‘더 쇼(The Show)’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그의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아 ‘뮤직 포 요지 야마모토(Music for Yohji Yamamoto·1995)’라는 피아노 연주곡을 완성한 바 있다. 이후 류이치 사카모토는 이와이 슌지가 제작한 영화 ‘새 구두를 사야 해’의 OST 작업을 맡았을 때 ‘패션쇼(Fashion Show)’라는 제목의 곡을 삽입했다. 그 부드럽고 명랑하며 때로는 슬픈 음악을 들어보면 “패션은 현실을 살아가고 사랑하며 또한 슬퍼하는 평범한 사람이 입을 때 비로소 완전해진다”고 말했던 요지 야마모토가 떠오른다.


패션과 음악이 서로 영감 주고받아

패션쇼를 옷을 판매하는 수단이 아닌, 표현의 수단으로 격상시킨 천재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의 환상적인 무대 뒤편에는 15년간 맥퀸쇼의 음악을 맡아온 DJ 존 고슬링이 있었다. 1980년대 영국의 아트 록 밴드 ‘사이킥 TV(Psychic TV)’에서 드럼과 키보드 주자로 활동했던 존 고슬링은 1987년 밴드를 떠난 후 10년간 DJ로 활동하다 맥퀸을 만났다. 알렉산더 맥퀸이 살아있을 당시 그의 쇼는 늘 화제였다. 케이트 모스의 홀로그램이 등장하는가 하면 자동차 도색 로봇이 나타나 모델이 입은 흰색 드레스에 총천연색 페인트를 방사하는 등 파격의 연속이었다.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존 고슬링은 “맥퀸이 요구하는 음악은 너무나 특이해서 그런 걸 찾는 것보다 새로 만드는 것이 오히려 쉬웠다”고 말하며 이를 “늑대들과 스코틀랜드 전통 음악이 펑크와 교차하는 사운드트랙”이라고 표현했다.

몇 년 전부터 존 고슬링은 또 다른 음악가 스티브 맥키와 힘을 합쳐 전 세계의 패션 음악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스티브 맥키는 1990년대 영국에서 인기 있던 얼터너티브 록 밴드 ‘펄프(Pulp)’의 베이스 기타리스트 출신으로 2017년 S/S 컬렉션부터 구찌쇼 음악 감독을 맡고 있기도 하다. 풍부한 음악적 지식과 록 뮤지션 특유의 실험 정신, 대중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두 사람의 패션 뮤직은 패션쇼 사운드 디자인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다. 최첨단 기술의 장이자 전위 연극과 현대 미술의 경계를 오가는 오늘날의 패션쇼는 새로운 음악의 실험 무대가 된 셈이다.

가을까지 계속되는 피크닉의 류이치 사카모토 전시 타이틀은 ‘류이치 사카모토: 삶, 삶(Ryuichi Sakamoto: Life, Life)’이다. 이곳을 운영하는 전시기획사 ‘글린트(Glint)’는 2013년 전설적인 독일 음반 레이블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해 화제가 된 전시 ‘ECM: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기획한 바 있다. 지난 5월 26일부터 시작된 전시는 연일 초만원이다. 패션과 음악이 어떻게 서로 영감을 주고받는지 궁금하다면 한번 방문해보자. 이번 전시에서는 요지 야마모토가 의상을 맡았던 류이치 사카모토의 오페라 ‘라이프’를 재구성한 설치작업도 볼 수 있다.

가능하다면 옷장 안에서 가장 근사한 옷을 꺼내입고 방문할 것을 추천한다. SNS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모든 전시가 끝나는 옥상 정원에 이르고 나면 카메라를 꺼내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야마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연주곡을 들으며 푹신한 의자에 반쯤 누워 남산의 파란 하늘과 진초록빛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패션이나 음악을 잘 모르더라도 꽤 흥미로운 시간이 될 것이다.


▒ 이미혜
패션·미술 칼럼니스트, 문화기획자, 보그코리아 컨트리뷰팅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