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수영의 책을 들춰보는 시인 이성복. 사진 고운호 조선일보 기자
시인 김수영의 책을 들춰보는 시인 이성복. 사진 고운호 조선일보 기자

올해는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정수인 김수영(1921~68년)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되는 특별한 해다. 한동안 ‘죽은 시인의 사회’를 살다 보니, ‘시여, 침을 뱉어라’라고 일갈했던 ‘불멸의 시인(김수영)’과 차마 쓰지 못하고 시가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보존된 시인’을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시인들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이성복을 찾아 나섰다.

6월 26일, 아침부터 거세게 쏟아지는 장맛비를 뚫고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송추에 있는 그의 작업실로 들어섰다. 창문으로 초록 나무가 쏟아져 들어오는 작은 복층 오피스텔은 생활의 냄새가 거의 없었다. 여백 속에 기척 없이 놓인 건 나무 둥치, 보리수 몇 알, 파란 약통, 돌부처, 대리석 연필꽂이…. 흰 종이에 단어 몇 개 부려 놓은 ‘시’처럼 이 공간은 이성복이라는 시인의 설치미술 작품처럼 보였다.


예상과 달리 서가가 텅 비었다.
“책은 이제 많이 읽지 않는다. 가끔 읽는 건 수학과 과학책이다. 난 수학에서 아름다움을 본다. 존 키츠(영국 시인)가 그랬다. ‘아름다운 건 진리고 진리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이를테면 수학 공식이나 패턴에서 느껴지는 그런 명료함인가.
“눈의 결정체를 봐라. 아름답다. 패턴이 드러날 때 얼마나 아름다운가. 모습도 수학자가 아름답다. 수학자들의 수필집을 보면 헝클어진 머리에 운동화 신고 계단에 털썩 앉아 있는 사진이 있다. 딱 노숙자 폼인데 정말 아름답다. 그들의 눈은 유배자의 눈, 이방인의 눈이다. 딴 곳을 바라보는 눈.”

선생의 눈도 그렇다. 이곳을 보는데 저곳을 보는 눈. 차원을 꿰뚫는 느낌이 섬뜩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은 마르케스의 눈이고 김수영의 눈이고 릴케의 눈이다. 딴 데서 온 사람들이지. 늘 딴 데 가 있는 사람이고. 자기가 온 내면의 고향이 있는 거다. 여기 붙들려서 거기 추억을 갖고 사는. 오직 바깥을 보는 사람, 그걸 실성했다고 그런다. 그런데 시를 쓰려면 실성해야 한다.”

이성복은 1952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불문과를 나와 1980년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로 ‘생의 참모습으로서의 비참’을 문단과 독자들에게 선물로 안겼다. “모두 병들었으나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로 끝나는 시 ‘그날’을 비롯해 그가 남긴 말의 흉터가 지극히 싱싱해 유신시대부터 지금까지 잊히지 못하는 시인이 됐다. 젊은 날 걸작을 낸 후 서울 문단을 떠났고, 유배자의 자리를 자처하듯 30년간 대구 계명대에서 불문학과 문예창작을 가르쳤다. ‘남해금산’ ‘그 여름의 끝’ ‘아, 입이 없는 것들’…. 그의 시어가 가리키는 진실만큼, 삶이라는 병명을 자각하며 ‘아름답게 병든 채로’ 살았다.

오랫동안 시를 발표하지 않았기에, 오랫동안 그를 죽은 자로 착각하는 나 같은 사람도 있었다. 그의 시집 갈피마다 기형도의 ‘그것’처럼 죽음의 임지로 향하는 자의 단호한 리듬, 기어이 패배를 완성하고자 하는 정직한 욕구가 배어 있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나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으나 그 이면의 마음은 훨씬 나약하고 어여뻤다.

이번에 김수영문학관에서 김수영에 관한 특별 강연을 했다. 이성복이 김수영을 말하는 건 한국 시사에 기록될 아름다운 장면이다.
“김수영은 ‘시미아’다. ‘시에 미친 아저씨’. 당시에 블랑쇼, 릴케, 하이데거를 읽고 정신의 핵심을 꿰뚫었다. 김수영 시대에 살았던 시인들이 이념에, 도덕에 꺾여 빛이 바래도 김수영은 푸릇푸릇하다.”

김수영은 1960년대 사람인데 여전히 생생하다. 선생은 한국의 김수영과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를 늘 함께 언급했다.
“김수영이 1921년에 태어나서 1968년에 죽었다. 47살에. 신기한 게 나쓰메 소세키도 보들레르도 비슷한 나이에 죽었다. 문제적 인간들이다. 일본인들은 나쓰메 소세키를 일본의 셰익스피어라고 한다. 나쓰메 소세키는 영국에서 돌아와 40대에 이미 신화적 존재가 됐다. 동양·서양, 전통과 근대, 개인과 집단의 문제가 혼재할 때 길을 냈다. 혼돈 속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갔다. 김수영이 한국의 그 자리다. 인간 정신의 최전선.”

김수영은 특별한 스승이었나 보다.
“슈베르트는 잘 때 안경을 쓰고 잤다. 자다가 악상이 떠오르면 바로 기록하려고. 그 정도로 음악에 미치고 정성이 있던 사람이었다. 그 슈베르트가 좋아했던 사람이 베토벤이었다. 베토벤이 죽기 열흘 전에 슈베르트가 찾아갔는데, 베토벤이 그때 ‘너, 너무 잘한다’라는 얘길 해줬다. 슈베르트는 열흘 후 베토벤의 관을 메고 갔다. 베토벤의 음악은 구조적이고, 슈베르트는 멜로디가 훌륭하다. 슈베르트는 자기가 죽을 즈음엔 베토벤 협주곡을 들었다. 임종할 때, 주변에 모인 친구와 가족들을 둘러보며 울먹였다. ‘다 있어도 베토벤은 없네’ 하면서.”

이성복 시인은 시를 쓰는 대신 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총망라된 시론집(詩論集) ‘극지의 시’ ‘불화하는 말들’ ‘무한화서’ 3권을 2015년 냈다. 이성복 시인의 주방 싱크대 안에 놓인 그의 책들. 사진 고운호 조선일보 기자
이성복 시인은 시를 쓰는 대신 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총망라된 시론집(詩論集) ‘극지의 시’ ‘불화하는 말들’ ‘무한화서’ 3권을 2015년 냈다. 이성복 시인의 주방 싱크대 안에 놓인 그의 책들. 사진 고운호 조선일보 기자

시 생각은 언제 하나.
“‘논어’ 안연편에서 공자는 제자 안연에게 자기를 극복해서 예(禮)를 회복하는 방법으로 ‘예가 아니면 보지를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를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는 ‘사물(四勿)’을 제시했다. 여기서 예를 시로 바꿔 읽어보라. 뭘 볼 때, 말할 때 항상 시를 생각한다. 김수영이 그랬으니까.”

무언가 쓸 때도 항상 김수영을 생각하나.
“나는 산문을 쓸 때 열 줄씩 겨우겨우 쓰는데, 김수영은 단칼에 내리꽂는다. 현실참여형 작가이면서도 불가능성을 지키고, 불가능에 닿도록 썼다. 불가능, 무의미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글은 진부해지고 낡는다. 다들 달의 앞면만 보고 쓸 때, 김수영은 뒷면을 열어뒀다. 그러니 시대의 메시지가 바뀌어도 더 힘있게 읽히는 거다.”

이젠 선생 얘기를 좀 하자.
“나는, 나는… 매우 약한 사람이다. 정신력이 약한 사람의 특징을 두루 갖고 있다. 나는 나보다 잘난 사람 앞에서는 매우 분개한다. 하지만 그 사람이 잘났다는 건 인정하지. 김수영은 나보다 너무 뛰어나서 짜증이 난다. 하하. 하지만 그대가 거기 있어 내가 여기 있다. 나도 문제적 인간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단식 투쟁해서 상주에서 서울로 왔다. 야심가였다. 나는 김수영의 가족묘에 들어가고 싶다.”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애타는 마음이다.
“장 라신(17세기 프랑스 극작가)이 죽을 때 그랬다. 죽으면 선생 옆에 묻어달라고.”


시집 ‘래여애반다라(來如哀反多羅)’를 마지막으로 낸 그가 2013년 이후 띄엄띄엄 발표한 시는 스무 편을 넘지 않는다. 그중 한 편이 ‘모란이 질 무렵’이다.


모란이 질 무렵

어디 가보아야 하는데 거기가 어딘지 몰랐다
해거름 녘에 붉게 핀 것들을 보고
한 사람은 작약이라 했고, 또 한 사람은 모란이라 했는데
나도 같이 거기 왜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날 모란이라 했던 사람의 아이는 몹시 아팠고,
우리는 모두 같이 걱정했는데,
그 후 아이가 어떻게 됐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해거름 녘에 붉게 핀 것들이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우리는 어디 기대어 좀 울고 싶었던 기억밖에 없었다.


그는 시를 쓸 땐 다음 말을 뭐로 써야 할지 모른다고 했다. 인생과 닮아서 무엇을 쓸지, 왜 쓸지, 어디로 갈지 모르는 상태로 첫 말을 쓸 뿐이다. 종교를 갖기엔 믿음이 부족하고, 문학을 하기엔 버텨낼 용기가 없어 그저 ‘시의 자리’에서 가만가만 서성인다는 이성복.

이성복은 여전히 이곳에서 시를 기다리는 중이다. 사진 고운호 조선일보 기자
이성복은 여전히 이곳에서 시를 기다리는 중이다. 사진 고운호 조선일보 기자

여기(작업실)선 주로 뭘 하나.
“아무것도 안 한다. ‘시를 써야지…’ 하면서 온다. 오기 위해서 온다. 나는 운전하는 걸 좋아한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뭔가 하는 것 같거든. 또 좋아하는 건 하염없이 기다리는 거.”

여기서 하염없이 시를 기다리는가.
“다시 쓸 수 있을까. 얼마든지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리 부러져 침상에 있다가 깁스를 풀면 금방 걸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나. 그런데 안 된다. 근데 또 뱀이 한 마리 들어오면 진짜 걷는다. 뱀이 오면 나도 쓸 수 있을까. 한편으론 할 말은 다 끝낸 것 같기도 하다.”

언젠가 ‘극지의 시’ 강연에서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외국 시, 특히 랭보와 보들레르를 잘 베꼈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나는 잘 베끼는 사람’이라고…. 왠지 위안이 됐다. 고흐가 밀레를 베꼈다고 할 때와는 또 느낌이 달랐다.
“나는 니체, 보들레르, 카프카, 김수영의 영향권에 있었다. 김수영을 베끼고 보들레르를 베끼고… 선생이 남긴 밥을 먹으면 나도 선생처럼 될까 싶다. 그런 간절함. 언어가 이미 남의 것인데 어떻게 베끼지 않을 수 있나. 그런데 언어가 신기한 게 베끼는 순간에 다른 문맥이 돼 버린다.”

표절과는 다르다고 했다.
“훔치는 것은 안 된다. 새들이 짝짓기할 때 집을 짓잖아. 자기 둥지 지으려고 남의 집 뜯어오면 안 되는 거지.”

생각하기에 따라 부끄러울 수 있는 고백을 왜 하나.
“그게 진실이니까. 내가 얼마나 개새끼인지 나는 안다.”

어쩌면 까발림과 숨김 사이의 갈등이 문학의 자리일 수 있다. 정확한 자리로 던지는 투포환 같은 것. 약한 사람은 진실을 너무 일찍 떨어뜨리고, 강하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끝까지 풀지 못한다.

시는 삶의 위기와 불길을 노래했지만, 실제 삶은 그 어떤 문인보다 평안했다는 게 놀랍다.
“많은 시인이 비장하게 죽었다. 기형도, 김소월, 이상, 백석…. 그렇게 살아서 죽은 게 아니라 죽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된 거다.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할 땐 불문학이 그리 대단한 줄 모르고 졸업하면 대기업에나 취직하려 했다. 그런데 거기서 김현(문학평론가)이라는 대가를 만났다. 좋은 스승을 만나 좋은 잡지(‘문학과 지성사’)로 데뷔했다. 시인이 교수(대구 계명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지내다 재작년 은퇴했다)로 살았으면 온실에서 산 거지. 복이다 싶으면서도, 어떨 땐 내가 오리 비슷하다 싶다. 날지도 못하고 헤엄도 시원하게 못 친 것 같은 기분.”

어떤 야심이 있나.
“정말 하고 싶은 건 김수영처럼, 나쓰메 소세키처럼, 카프카처럼 살아보는 거다. 그렇게 살다 죽으면 좋겠다. 그런데 우리 집안이 장수 집안이라 죽기까지 불가능한 지점을 응시하는 게 괴롭다. 어머니가 99세에 돌아가셨다. 60대부터 오래 살았으니 언제 죽어도 좋다 하셨는데, 죽기 전엔 일주일을 우셨다. 울음을 참으려고 이불깃을 깨물었다. 아버지도 85세까지 살다 가실 때 그 눈빛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