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풍미한 ‘스리 테너’의 공연 모습.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루치아노 파바로티(왼쪽부터). 사진 트위터 캡처
한 시대를 풍미한 ‘스리 테너’의 공연 모습.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루치아노 파바로티(왼쪽부터). 사진 트위터 캡처

 세계 양대 스포츠 행사인 올림픽과 월드컵의 축제 분위기를 한층 돋우고 세월이 지나면 당시의 기쁨을 추억하게 하는 도구는 클래식, 그중에서도 성악이다. 2018 평창 동계 올림픽 개회식의 주인공은 ‘올림픽 찬가’를 부른 소프라노 황수미였고, 2018 러시아 월드컵 오프닝의 히로인은 카잔 출신의 소프라노 아이다 가리풀리나였다.

한동안 올림픽과 월드컵 조직위원회는 행사용 음악과 주제가에 심혈을 기울였고, 메이저 음반사들은 빅 이벤트에 맞춰 신보를 내놓곤 했다. 하지만 과거와 비교하면 평창 올림픽과 러시아 월드컵에서 클래식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초라했다. 확실한 흥행 보증수표였던 ‘스리 테너(파바로티·도밍고·카레라스)’의 빈자리가 너무 컸고, 음반 산업도 침체된 탓이다.

월드컵을 앞두고 클래식 시장이 꿈틀댄 건 1990년 이탈리아 대회부터였다. 영국의 음반사 데카는 1989년, 월드컵 조 추첨식에 맞춰 루치아노 파바로티 스페셜 앨범 ‘네순 도르마(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 중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출시했고, 고조된 분위기는 월드컵 전야 로마 야외공연에서 극에 달했다. 백혈병에서 회복한 호세 카레라스를 선배인 파바로티와 플라시도 도밍고가 위로하기 위해 셋은 한자리에 모였다. 세 명의 테너가 같은 콘서트 무대에 선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주빈 메타가 지휘한 실황 앨범은 지금까지 1300만 장이 판매됐고, 앞으로도 깨지기 힘든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당시 파바로티의 독점 흥행 권한이 있던 프로모터 티보 루다스는 1994년 미국 월드컵, 1998년 프랑스 월드컵으로 ‘스리 테너’ 공연을 연달아 기획했다. 미국 대회부터 국제축구연맹(FIFA)은 수입이 예상되는 월드컵 관련 문화 행사는 반드시 FIFA와 협의하는 조항을 대회 조직위원회에 하달했다. 하지만 ‘스리 테너’ 공연을 제외하면 FIFA 의도대로 공연이 활성화되진 않았다.

LA 다저스 스타디움(미국 월드컵), 에펠탑 광장(프랑스 월드컵)의 ‘스리 테너’ 공연은 FIFA 공식 이벤트였지만 형편없는 음향 때문에 진성 클래식 고객의 만족도는 높지 않았다. 그런데도 루다스는 “오페라가 살아남으려면 더 많은 청중과 만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스타디움 공연을 강행했고, 2001년 한국에선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스리 테너’ 공연이 열렸다. 그러나 당시 파바로티(68)·도밍고(62)·카레라스(57)의 나이와 목소리는 모두 전성기가 지난 상태였다.


바르셀로나 올림픽부터 클래식 활용   

월드컵과 무관하게 런던 하이드파크와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50만 명 단위의 대형 야외 공연을 꾸릴 수 있던 루다스와 파바로티에게 월드컵은 4년마다 서는 큰 시장이자 판촉 기회였다. 2007년 파바로티가 사망하고 지난해 카레라스가 은퇴한 상황에서 스리 테너 중 현역은 다시 바리톤으로 음역을 낮춘 도밍고뿐이다. 도밍고가 게르기예프가 지휘하는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전야제에 출연했지만, 비중은 오히려 후배 테너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에게 뒤졌다. 스리 테너의 퇴장과 함께 클래식도 월드컵 무대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

본격적으로 상업적인 테마 음악이 쓰인 올림픽은 1984년 LA 올림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막식 타이틀 주제가 음악을 맡았던, 영화 ‘스타워즈’ 작곡가 존 윌리엄스의 존재만으로 세계인의 시선을 끌었고, 이전 모스크바 대회에서는 볼 수 없던 잔재미를 음악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당시 폴리돌, 도이체 그라모폰, 필립스, 데카 등 다국적 레이블과 세계 160여 개국에 보급망을 소유하고 있던 폴리그램은 야심 차게 올림픽용 트랙 테마를 제작했다.

올림픽 중계 사상 처음으로 LA 올림픽에는 권투·수영·농구 등 각 스포츠 종목에 따라 테마 음악이 다양하게 연주됐고, 작곡은 당대 인기 작곡가 조지오 모로더가 책임졌다. 그래서 육상 천재 칼 루이스가 등장할 때의 음악과 수영 선수인 매트 비욘디가 역영할 때의 음악이 모두 달랐다. 종목 특성에 맞춰 코드화된 음악적 기호들은 바로 광고와 연계되면서 코카콜라·나이키 광고 영상에 차용됐고, 올림픽 테마 음악에 천문학적인 돈이 거래되는 배경이 됐다. 1988 서울 올림픽도 모로더의 관장 아래 그룹 코리아나의 ‘손에 손잡고’가 주제가로 쓰였다.

올림픽이 클래식을 적극적으로 차용한 대회는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였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조직위는 그룹 퀸의 리더 프레디 머큐리와 스페인의 명소프라노 몽세라 카바예에게 주제가를 맡기고 1987년 일찌감치 듀엣곡 ‘바르셀로나’를 취입했다. 그러나 1991년 머큐리가 갑작스레 에이즈로 사망하면서 올림픽 조직위는 공식 주제가를 변경했다.

이때 대체 아티스트로 등장한 인물이 카탈루냐 출신의 또 다른 스타, 테너 호세 카레라스와 미모의 여성 보컬 사라 브라이트만 듀오였다. 이들이 부른 ‘Amigos Para Siempre(영원한 친구)’는 지금도 피겨 스케이팅 음악으로 자주 사용된다. 바르셀로나 대회 개·폐회식엔 당대 최고의 성악가들이 마치 갈라쇼를 하듯 전면에 나섰다. 도밍고, 카레라스뿐 아니라 알프레도 크라우스, 후안 퐁스, 테레사 베르간자, 빅토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 등 명가수들의 연주가 대회 개·폐회식을 수놓았다.

러시아 월드컵 개막식에서 영국의 팝스타 로비 윌리엄스와 러시아 소프라노 아이다 가리풀리나가 함께 공연하고 있다. 사진 트위터 캡처
러시아 월드컵 개막식에서 영국의 팝스타 로비 윌리엄스와 러시아 소프라노 아이다 가리풀리나가 함께 공연하고 있다. 사진 트위터 캡처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는 중국 피아니스트 랑랑이,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선 베를린 필 음악감독 사이먼 래틀이 ‘미스터 빈’ 로완 앳킨슨과 깜짝 출연해 영화 ‘불의 전차’ 음악을 지휘하고 연기했다.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에선 발레리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부터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까지 러시아 예술가들이 총출연했고,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가 ‘오륜 찬가’를 불렀다.

결국 향후 월드컵과 올림픽 개최지가 갖춘 문화 역량에 따라 대회에서 클래식이 차지하는 비중이 달라질 것이다. 2020년 도쿄 올림픽,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 2024년 파리 올림픽, 2028년 LA 올림픽에 등장할 클래식 아티스트들은 자연스럽게 개최국을 대표하는 예술가로 인식될 것이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개회식과 미국·캐나다·멕시코 3개국에서 분산 개최되는 2026년 월드컵에서 깜짝 클래식 스타가 등장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 한정호
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