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는 함께하는 두 사람이 서로 발견하고 성장하는 일이다.
연애는 함께하는 두 사람이 서로 발견하고 성장하는 일이다.

나의 20대, 몇 차례 연애가 끝난 뒤 내린 결론은 매번 똑같았다. 연애는 행복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야! 초반의 설렘과 오가는 호감을 확인한 뒤 찾아오는 환희, 서로를 알아가는 즐거움을 빼고 나면, 글쎄. 안달하거나 회의하고 섭섭해하다 혼자 화를 내거나 매력적이지 못한 나 자신을 나무라는 시간이 더 많았다. 마음을 퍼붓고 상대에게 빠질수록 종잡을 수 없기 일쑤였다. 기대하지 않은 좋은 일이 생기면 뛸 듯이 기뻤지만 아뿔싸, 한 번의 기쁨이 몇 곱절의 기대를 불러일으켰고 기대는 무한의 실망을 일궈냈다. 제멋대로 건 기대라 이뤄지지 않는다고 상대를 탓할수록 나만 비루해질 따름이었다. 쏟는 에너지만 생각하면 연애만큼 비효율적인 일도 없을뿐더러, 기쁨의 총량만 생각해 본다면 연애는 행복해지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사회적 기준과 조건이 연애 가로막아

연애로 알아버린 괴로움은 깊고 쓰고 때론 달콤해 중독적이었지만, 안락과 평온과 행복을 쉬이 가져다주지 않았다. 굳이 분류해 보자면, 당시의 연애는 동사에 가깝고 행복은 형용사와 비슷했다. 들썩이고 날뛰고 변화무쌍한 연애가 형용사에 가까워지는 때는 권태가 찾아올 무렵이었다(행복과 안정이 함께 오는 시기도 있었지만, 이를 유지하는 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확률만큼 어렵다고 느꼈다). 기쁨과 고통의 낙차가 좁아진다고 연애가 더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고통이 시들해진 만큼 기쁨도 밋밋해졌다. 기쁨과 고통은 연애를 진두지휘하는 샴쌍둥이처럼 밀착돼 있었다. 

고통이 떠나면 기쁨도 떠났다. 그렇게 한두 번의 열렬한 연애를 거친 뒤, 나는 내 연애세포의 멸종을 선언했고 그 짧은 생에 이른 애도를 표했다. 앞으로의 연애에서 별달리 기대할 것이 없으리라 짐작하는 순간 두려움이 생겼다. 지난 연애는 드릴처럼 내 안에 큰 구멍을 뚫었고 아픔이 여물어도 심장의 지형은 변해 버려 복원 불가하다고 믿었다. 저 공허한 자리를 채울 날이 오기는 할까. 만일 삶이란 더 적고 덜한 것들로만 남아있다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뜨지도 터지지도 않은 채로 어영부영 살아가게 된다면.

 그런데도 사랑은 다시 찾아왔다. 나는 나이를 먹었지만 사랑은 세 살 먹은 아이처럼 떼를 쓰며 뒤집어지거나 업어 달라 보채기를 멈추지 않았다. 사랑이 세운 성곽의 지하 미궁 속을 쩔쩔대고 헤매고 있을 때면 모든 걸 폭파하고 저 멀리 대피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헤매다 지쳐 좁은 창밖으로 넘어본 남의 풀밭은 왜 그토록 더 푸르고 아름다워 보이는지. 근처를 지나가는 누군가가 호기심에 시선 한 번 맞춰줘도 내 곁의 누군가보다 더 나은 사람처럼 보이는 것도 여전했다. 그나마 나이가 들면서 조금 나아진 것은 연애가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더 나은 선택지가 눈앞에 있는 듯 보일 때, 그러나 애를 써도 몸과 마음은 방향을 틀지 않을 때, 내 몸과 마음을 명상하듯 바라볼 줄 알게 된 것이다. 얽힌 길이라도 따라가야 할 것 같은 마음에 무작정 뛰어가는 걸음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던 눈길을 돌려 나를 본다. 서툴더라도 노력하다 보면 이전보다는 더 긴 호흡으로 멈출 수 있다.

우리는 자주 우리의 사랑과 그와 관련된 선택으로 괴로워한다. 관계 내부의 문제보다 관계 밖의 가능성에 더 괴로워할 때도 많다. 관계를 둘러싼 통념도 한몫한다. 우리에게는 의도치 않았음에도 학습된 통념이 많다. 사랑한다면, 남자라면, 여자라면, 진심이라면 등의 가정 아래 우리를 압박하는 좁고 가파른 길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이와 같은 조건 속 통념들이 우리의 사랑을 고통으로 내모는 데 한몫한 건 아닐까. 여자는 남자보다 어려야 더 좋다거나, 남자는 안정적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가 여자의 경우보다 더 중요하다거나, 남자가 사랑한다면 여자가 필요할 때 언제 어디서든 달려와 줘야 한다거나, 연인 사이 각종 기념일을 잘 챙기지 않으면 애정이 식은 것이라거나, 남자는 한눈을 팔게 돼 있으니 여자가 잘 관리해야 한다거나 등의 숱한 세상 말들 사이에서 우리는 그 혹은 그녀가 내게 맞지 않는 상대고 우리의 연애가 잘 흘러가지 않는 증거를 무수히 찾아낸다. 이와 같은 잣대는 연애가 살짝 삐걱거릴 때마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와 ‘그와 나는 맞는 짝이 아니다’의 증거가 된다.


연애할 땐 새로운 변화 시도해야

나 역시 비슷한 회로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도 찬찬히 살펴보면 보이는 것이 있다. 우리에게는 좀 더 개인적이고 세밀한 조건이 촘촘하게 많다. 사회적 기준과 조건으로 설명되지 않는, 개인화된 조건들 말이다. 연애는 함께하는 두 사람의 가장 개별화된 얼굴을 드러내는 일이다. 내가 나라서, 네가 너라서 발견하고 감탄하고 성장하는 일이다. 당장의 사랑이 더디게 흘러가서 고통스럽다고 해도 더 머물러 함께 나아가고 싶다면, 남아 있고자 하는 내 마음의 지형을 잘 파악해 보면 좋다. 불필요한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도록. 나의 어리석음을 추궁하는 것보다, 보편으로 주어진 말들이 내게 맞는지 돌아보는 것도 좋다. 

아무리 멋진 옷이라도 내 체형에 맞지 않다면 맞는 옷이 아닌 것처럼, 연애든 일이든 삶이든 내 사이즈를, 내 깜냥을 파악하는 게 필요하다. 원한다면 사이즈를, 깜냥을 바꿔볼 수 있다. 상대를 바꾼 뒤가 아니라 바꾸기 전에. 그게 더 효율적이다. 보편적 기준이라도 그들끼리의 배합과 각각의 중요도에 따라 개인차가 드러난다. 나의 경우, 삶과 사람을 향한 품위 있는 태도와 대화로 합의를 이끌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성별과 나이로 사람을 구분하는 방식은 진부하다고 느낀다. 진부함을 모조리 부정하진 않는다. 내게 맞는 진부함의 정도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진부한 가치관으로 똘똘 뭉친 사람은 불편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진부함 또한 찌개 속 스며든 조미료 맛처럼 내 세계에 존재한다.

한때 무척 좋아했던 누군가를 떠올리며 그를 좋아한 이유를 되돌아봤다. 그는 단 한 번도 타인을 이야기할 때, 상대를 단정 짓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이야기했다. 누군가 자신에게 피해를 줬다면 그 피해 사실을 이야기할 뿐, 그 사람을 판단하는 말을 삼갔다. 나로 인해 힘들었을 때도 특정 행동으로 인한 자신의 힘듦을 호소할 뿐 나를 정해진 유형으로 몰아넣지 않았다. 우유부단하고 소심하다고 그를 몰아갔지만, 나에겐 그를 판단할 자격 같은 건 없었다. 내가 느낀 그의 소심함은 신중함과 사려 깊음의 맥락 속에 놓인 것이었다. 그에게는 문명의 편의와 청결한 환경을 중시하는 도시인의 진부함이 있었다. 소박한 삶보다는 번잡한 대도시의 삶에서 평안을 찾았다.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이유가 있느냐고들 하지만, 나는 종종 반복되는 이유를 발견한다. 취향을 파악하고 사랑의 지형을 이해할 때 고민과 갈등을 줄일 수 있다. 선택과 집중에 보다 편안해진다. 연애의 지도에도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새로운 연애마다 많든 적든 지형은 변화를 일으키니까. 그리고 잊지 말 것. 지도는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없던 길을 나서는 것도 짜릿한 일이니까.


▒ 이서희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영화학교 ESEC 졸업, 파리3대학 영화과 석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