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집’과 다가구주택이 밀집한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에서 바라본 가산디지털단지. 옛 구로공단 2·3단지엔 고층빌딩이 들어섰고 이름도 가산디지털단지로 바뀌었다.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벌집’과 다가구주택이 밀집한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에서 바라본 가산디지털단지. 옛 구로공단 2·3단지엔 고층빌딩이 들어섰고 이름도 가산디지털단지로 바뀌었다.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은 두 번의 산업도시화를 경험했다. 1920년 이후 도시 이름이 ‘경성(京城)’이었던 시기에 첫 번째 산업도시화를 겪었고, 1960~70년대에도 산업도시화가 진행됐다. 특히 1960~70년대엔 국가가 주도적으로 산업화 정책을 실시해 서울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산업도시화도 빠르게 진행됐다.

당시 산업화의 상징으로 평가받는 지역은 구로공단이다. 1970년대 후반에는 약 11만명이 구로공단에서 노동자로 종사하기도 했다. 빠르고 급격한 산업화는 이들 노동자를 위한 독특한 유형의 주택을 독특한 지역에 형성되게 했다.

구로공단은 크게 1단지, 2단지, 3단지로 나뉜다. 1단지와 2·3단지는 분리돼 있다. 그리고 1단지와 2·3단지 사이 지역에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기거했다.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많았고 이들은 칼잠을 자며 일을 했다. 그래서 직주(職住) 근접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직장에서 가까운 공단과 공단 사이의 공간은 노동자의 주택지로 최상이었다. 이 지역이 바로 가리봉동, 현재는 조선족 이민자들의 공간으로 알려진 지역이다. 돈을 벌기 위해 건너온 조선족 이민자들은 15만~20만원의 싼 월세를 내고 이 지역에 거주한다.

가리봉동 벌집을 1층에서 바라본 모습. 좁은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아 방마다 LPG통을 놓고 난방과 취사를 해결한다. 2013년 촬영했다. 사진 김경민 교수
가리봉동 벌집을 1층에서 바라본 모습. 좁은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아 방마다 LPG통을 놓고 난방과 취사를 해결한다. 2013년 촬영했다. 사진 김경민 교수

작가 신경숙의 자전적 소설 ‘외딴 방’을 보면, 주인공은 16세부터 구로공단 공장에 취직해 일을 시작한다. 그녀가 거주하는 가리봉동의 집(벌집)에는 37개의 방이 다닥다닥 붙어있다고 묘사돼 있다.

이 시기엔 급격한 산업화를 뒷받침하기 위해 상당한 규모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특히 구로공단은 의류 관련 수출기업이 많았기에 유럽의 산업혁명기처럼 어린 여성 노동자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들을 위한 주택 ‘벌집’은 너무나 열악했다. 벌집은 겉으로 보기엔 2~3층 높이에 50~100평(165~330㎡) 정도의 양옥 주택이지만, 집에 들어서면 통로의 좌우에 꽤 많은 수의 방문이 있다. 대략 한 층에 10개의 방이 있다. 1~2층에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불법 증축으로 보이는 3층까지 있는 건물엔 대략 30여개의 방이 있었다.

당시 자료에 의하면 벌집 한 채에 방이 평균 21.6개였다. 서울시 불량주택지역의 평균 방 수 2.93개에 비교하면 엄청나게 많은 수치였다. 벌집은 대개 무허가로 증축된 것으로, 정상적인 주택으로 기능하기 힘들었다. 벌집엔 화장실이 층마다 하나밖에 없는 경우가 허다했고, 대변기 1개당 평균 사용인수가 26명이었다. 아침에 화장실을 사용하기 위해 긴 줄을 서야 했고, 빨래 자리를 잡기 위해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방 크기는 매우 작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작은 방을 여러 명이 공유했다는 것이다. 구로공단은 24시간 쉬지 않고 가동했기에 3교대 근무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1~2평(3.3~6.6㎡)의 방에 6~8명이 공동으로 세를 얻은 다음 조를 짜 돌아가면서 잠을 자는 것이다. 3~4명이 잠을 자고 일어나 공장으로 가면 그 자리에 다른 조 사람들이 들어와 잠을 청하는 식이다. 방이 좁기 때문에 두 사람씩 머리 방향을 반대로 눕거나, 다리를 서로 포개 누워 잠을 청하기도 했다.

이처럼 1970년대 불법으로 증·개축된 가리봉동 벌집은 어린 노동자들을 위해 계획적으로 제공된, 좋은 주거공간이라기보다는 소유주의 이익(임대료) 극대화 욕구가 그대로 드러난 공간이었다. 1960~80년대 노동자들을 위한 숙소로 쓰인 이 공간은 1990년대에 탈선한 학생들의 공간으로 잠시 활용됐고, 현재는 조선족 이민자를 위한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가리봉동과 구로공단 일대 지역. 구로공단 1단지는 구로디지털단지, 구로공단 2단지와 3단지는 가산디지털단지로 바뀌었다.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가리봉동과 구로공단 일대 지역. 구로공단 1단지는 구로디지털단지, 구로공단 2단지와 3단지는 가산디지털단지로 바뀌었다.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가리봉 벌집, 맨체스터와 비슷

벌집은 열악한 주거공간이지만, 산업도시화를 겪은 다른 도시의 주택유형과 비교할 때 의의가 상당하다. 산업혁명 당시 영국 산업도시의 노동자 주택 역시 주거 여건이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영국 노동자들은 대략 2평(6.6㎡)의 공간에 3명쯤이 살았으나, 어떤 경우엔 6~8명이 살기도 했다. 여성 노동자가 남성보다 많았고, 근무 형태는 2~3교대가 흔했다. 그리고 당시의 대표적 노동자 숙소는 중앙에 복도를 내고, 복도 양쪽에 작은 방들이 여러 개 있는 구조다. 벌집 구조와 기본적으로 대동소이하다.

벌집 1층 단면 구조. 김영기, ‘구로공단 인근의 노동자 및 저소득층 주거개선 방안에 관한 연구’, 1983 서울대 건축학과 석사학위논문
벌집 1층 단면 구조. 김영기, ‘구로공단 인근의 노동자 및 저소득층 주거개선 방안에 관한 연구’, 1983 서울대 건축학과 석사학위논문

주택 중앙에 복도를 내고 양쪽에 작은 방을 배치한 19세기 맨체스터 노동자 주택 그리고 20세기 후반 서울 가리봉동 노동자 주택은 시간과 공간이 다르지만 수익 극대화를 위해 세운 공간 계획은 유사하다. 

19세기 영국 맨체스터의 노동자 주택 단면. 프리드리히 엥겔스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
19세기 영국 맨체스터의 노동자 주택 단면. 프리드리히 엥겔스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

아직도 가리봉동의 주거 환경은 1970년대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21세기의 주거 수준을 고려할 때 심각하게 열악하다. 따라서 주거환경 개선이 매우 필요하고, 그렇기에 도시재생지역으로 지정돼 있다.

모든 벌집을 보존하자는 주장은 아니지만, 일부 벌집은 도시 산업화 과정을 통해 나타난 주거공간이기 때문에 도시 역사를 기억하는 차원에서 보존돼야 한다. 그래야 글로벌 산업도시의 주거공간을 비교할 수 있다. 특히 과거 한국의 수출을 이끌었던 여공들의 작은 숙소라는 그 의의를 기념하기 위해서라도 일부 벌집을 보존할 필요가 있다.


▒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저서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