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보라 보르다 뉴욕필하모닉 사장. 사진 번 에반스
데보라 보르다 뉴욕필하모닉 사장. 사진 번 에반스

현대 오케스트라는 지휘자가 음악감독(Music Director)을 맡고, 별도의 행정감독(Managing Director)을 두는 경우가 많다. 행정감독은 사무국을 주축으로 교향악단 업무를 총괄하고 후원자(기업) 관리와 공적 지원 등을 담당한다. 오케스트라 ‘경영’을 담당한다는 의미에서 미국에선 행정감독을 오래전부터 ‘최고경영자(CEO)’로 불렀고, 유럽 오케스트라들도 동참하는 추세다.

그런데 2010년대 후반 들어 전 세계 명문 오케스트라들이 여성 CEO를 경쟁적으로 기용하고 있다. 올가을 내한공연이 예정된 런던 심포니(캐서린 맥도웰)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헬렌 스프로트)의 CEO가 모두 여성이다. 지난해 한국 투어를 온 베를린 필하모닉의 CEO도 여성(안드레아 쥐츠만)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인 뉴욕 필하모닉(데보라 보르다) 역시 마찬가지다. 서울시향은 올해 초 기존 이사 출신 중 여성(강은경·1970년생)을 CEO로 맞았다.

클래식 음악 시장에서 여성 CEO가 환영받는 이유는 여성의 장점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분쟁의 조정에 능하고 수익 분배 등 관리자로서 세심함에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기존 여성 행정감독의 탁월한 업적도 한몫 거들었다. 영국은 캐서린 맥도웰, 독일은 안드레아 쥐츠만, 미국은 데보라 보르다가 롤모델이다.

북아일랜드 출신의 맥도웰은 교육학을 공부하고 1980년대부터 영국 오케스트라 조직에 몸담았다. 맥도웰이 주목한 분야는 커뮤니티 활성화와 교육이었다. 스코티시 체임버, 얼스터 오케스트라에서 시험했던 도시 재생 프로그램은 전영 오케스트라 연맹(Association British Orchestra)의 모범 사례로 꼽혔고, 1990년대부터 영국 예술 위원회(Arts Council of England) 음악감독에 발탁돼 중앙정부 차원의 변화를 주도했다.

맥도웰은 런던 금융의 중심 ‘시티’에서 주관하는 시티 오브 런던 페스티벌의 운영감독을 지내면서 관내 바비컨센터에 위치한 런던 심포니(LSO)의 눈에 들었다. 2005년 LSO 행정감독에 부임한 맥도웰은 먼저 예술감독을 교체했다. 10년 넘게 재임한 음악감독 콜린 데이비스에 대해 피로감을 호소하는 관객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했기 때문이다.

맥도웰은 ‘러시아의 차르’로 불리는 발레리 게르기예프를 영입하는 데 성공했고, 그의 오랜 후견인인 일본인 부호, 요코 체스키나를 LSO의 후원자로 등록했다. 게르기예프가 3년 단위로 재계약할 때마다 체스키나의 LSO 후원액도 증가했다.

2015년 게르기예프가 퇴임하고 체스키나가 세상을 떠나자, 맥도웰은 발 빠르게 부동산 그룹 레인우드 등 중국 기업 후원을 유치했다. 중국 정부 유력인사의 자녀들이 코벤트가든 로열 오페라, 런던 심포니, 런던 주재 매니지먼트에서 인턴 경력을 쌓는 것이 비슷한 시기에 유행이 되기도 했다. LSO가 공을 들이는 중국기업은 아직 런던 예술시장에 지갑을 열지 않은 중국은행(Bank of China)과 중국공상은행(ICBC)이다.

LSO의 런던 라이벌인 필하모니아가 29년 동안 행정감독을 역임한 데이비드 웰튼을 떠나보내고 지난해 헬렌 스프로트를 영입한 것도 맥도웰의 성공에 자극을 받아서다. 영문학을 공부한 스프로트는 영국 예술 위원회 음악감독을 지냈다. 스프로트가 2020년 종료되는 중국 주류업체 우량예와 총액 10억원대 재계약을 끌어낼 수 있을지 벌써부터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2010년대 후반 베를린 필하모닉은 키릴 페트렌코의 후임 CEO로 프랑크푸르트-북독일 방송교향악단 행정감독을 지낸 안드레아 쥐츠만을 영입해 새로운 시대를 준비한다. 쥐츠만은 1990년대 베를린 필 음악감독을 지낸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비서 출신으로 그가 이끈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 단장을 시작으로 프랑크푸르트와 함부르크에서 명성을 쌓았다.

음악 이론을 전공한 쥐츠만은 인자한 성품과 원만한 성격으로 악단원과 지휘자의 갈등을 적극적으로 중재하는 데 탁월한 역량을 보였다.

2010년 파보 예르비,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과 부산을 방문한 쥐츠만은 드보르자크 교향곡 연습 시간을 더 요구하는 음악감독과 이미 충분히 준비된 상황에서 추가 리허설은 어렵다는 단원 사이에서, 성공적인 한국 데뷔와 재초청을 위해 추가 리허설을 강행했다.


보르다, 몇 달 만에 500억원대 후원 유치

악단과 재계약이 무산된 음악감독의 영향력 공백을 행정감독이 채웠고, 단원들에겐 음악감독이 바뀌더라도 아시아 투어는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을 줬다. 결국 성공적인 공연으로 재초청을 이끌어냈다.

쥐트만은 지휘자의 드레스 셔츠를 직접 다림질하고, 연주를 마친 지휘자가 백스테이지에 들어오면 차가운 흑맥주를 권하며 등을 두드리는 등 감성적인 접근으로 함께한 예술가들의 신뢰와 호감을 이끌어냈다. 사교성이 부족해 대외 접촉을 꺼렸던 페트렌코와 대조를 이룬다.

미국 오케스트라 여성 CEO의 태두는 뉴욕 필하모닉 사장 데보라 보르다다. 디트로이트 심포니와 LA 필하모닉 등에서 요직을 거쳤다. LA 필 재임 시절, 베네수엘라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을 영입했고,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을 완공하면서 클래식을 외면했던 히스패닉 관객을 끌어들였다.

LA 필하모닉 CEO 시절, 다수의 미 서부 해안 부호들도 후원자로 참여시킨 노하우는 미 동부로 이어졌다. 뉴욕 필은 보르다 합류 이후, 숙원 사업인 링컨센터 데이비드 게펜홀 리노베이션에 부임 몇 달 만에 5000만달러의 후원금을 모금할 수 있었다. LA 필 재임 후반 연봉 170만달러(약 19억원)를 받은 보르다는 2017년 말 뉴욕 필로 자리를 옮기면서 비슷한 수준의 기본급에 더해 성과급도 받을 전망이다. 얍 판 즈베던을 음악감독에 임명한 배경을 설명하면서 뛰어난 언변으로 후원을 독려하기도 했다.

시카고 심포니 전 사장 데보라 루터,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전 사장 앨리슨 벌가모어의 공과는 리먼 사태 전후 시기에 따라 갈리지만 미국 내 여성 오케스트라 CEO의 리더십을 증명하기에 부족함 없는 실적을 남겼다.

미국 오케스트라는 여전히 여성 CEO에 목마르다. 파산을 겪은 미네소타 오케스트라는 시카고 심포니의 펀드레이저, 미셸 밀러 번즈를 영입했고 판 즈베덴이 떠난 댈러스 심포니는 보스턴 심포니 마케팅 감독 출신의 킴 놀테미를 영입했다.


▒ 한정호
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