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타이베이 ‘스린 야시장’에서 파는 다빙바오샤오빙(大餅包小餅). 사진 이윤정 기자
대만 타이베이 ‘스린 야시장’에서 파는 다빙바오샤오빙(大餅包小餅). 사진 이윤정 기자

생각보다 뜨겁지 않았다. ‘시원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는 아니었지만, 서울의 40도를 넘나드는 특별재난급 폭염에 시달리다 보니 ‘이 정도는 견딜 만하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에 젖은 이불을 두르고 다니는 것만 같았던 서울의 습기도 느낄 수 없었다. 출장차 뜨겁고 습하기로 유명한 대만을 찾았다. 북극을 가도 모자랄 판에, 갈 곳이 없어 대만을 가냐며 주변에서 안쓰럽게 여겼다.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며 히죽이던 동료도 있었다. 대만의 달콤한 홍차 음료와 함께 왠지 모를 승리의 기분을 삼켰다.

4박 5일간 대만의 타이베이·타이중·타이난·가오슝 4개 서부 도시를 도는 일정이었다. 타이베이에 이틀, 타이중과 타이난을 묶어 하루, 가오슝에서 하루를 묵었다. 대만 여행을 포털 사이트에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2박 3일 대만 여행’이 뜬다. 즉 한국인은 2박 3일이면 대만을 적당히 둘러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발은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에 주로 묶여 있다.

대만의 명물로 꼽히는 옥배추 역시 타이베이에 있는 ‘고궁박물관’에 살고 있다. 대만을 다녀온 지인들은 하나같이 옥배추 사진으로 여행 후기를 시작하곤 했다. 옥으로 만든 배추인데, 꽤 볼 만하다는 것이다. 사실 통통하고 탐스러운 배추를 상상했다. 그러나 실제로 본 옥배추는 전혀 달랐다. 작은 손바닥만 했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모나리자’를 봤을 때가 생각났다. 당연히 집채만 한 크기의 그림일 줄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 아주 작아 놀랐던 기억, 옥배추도 그랬다.

예술 쪽엔 관심이 없는지라, 고궁박물관이 보유하고 있는 수많은 예술품을 훅훅 지나치며 그저 눈도장 찍는 데 열중했다. 박물관을 휘휘 헤매며 돌아다니는데, 신기하게도 자꾸 옥배추가 있는 곳을 지나쳤다. 다시 한번 가까이 다가가 찬찬히 옥배추를 뜯어봤다. 그때야 옥배추의 ‘진가’가 눈에 들어왔다. 끄트머리가 섬세하게 뾰족이며 싱그러움을 자랑하는 이파리, 금방이라도 쭉쭉 찢어 쌈장에 찍어 먹을 수 있을 만큼 선명한 결이 보였다.

대만 하면 ‘스린 야시장’도 빼놓을 수 없다. 시장 입구에서 파는 통오징어 튀김을 먹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는 이들을 지나 안쪽으로 깊이 파고들수록 이국적인 야시장의 풍경이 펼쳐진다. 시커먼 간장 물에 팔팔 졸여지고 있는 어묵, 걸쭉한 국물의 곱창국수, 한국처럼 동그란 모양이 아닌 피망처럼 생긴 사과를 파는 과일가게 등 신기하고 재미있는 먹거리 천국이다. 다른 나라 야시장과 비교했을 때 특이한 점은, 길거리에서 음식을 파는 노상 가게 외에도 지하에 전문 식당가를 차려놨다는 점이다.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소보로빵같이 생긴 것이 가득 쌓여 있는데, 이곳의 대표 먹거리 중 하나인 ‘다빙바오샤오빙(大餅包小餅·땅콩, 검은깨 등을 넣어 튀긴 과자)’이다.


대만 가오슝 ‘하마센 철도 문화원구’. 사진 이윤정 기자
대만 가오슝 ‘하마센 철도 문화원구’. 사진 이윤정 기자

대만 옛 중심지 타이난, 예술 도시 가오슝

여기까지는 대만 여행객들이 주로 찾는 타이베이의 흔한 관광 코스이지만, 타이난으로 이동하면 여행객들의 입소문을 덜 탄 관광지가 등장한다. 지금 대만의 수도는 타이베이이지만, 19세기 말까지 대만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는 타이난이었다. 이곳은 전국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데다, 그 영향으로 시민의 소득 수준도 높은 편이다. 타이난에 대해 설명하던 가이드는 “타이난에서는 사람들 옷차림이 허름하다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 된다”며 “러닝셔츠만 입고 슬리퍼 끌고 다니는 배 나온 아저씨들도 알고 보면 굉장한 부자”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타이난에서는 ‘안핑수옥(安平樹屋)’을 빼놓을 수 없다. 벵골보리수의 굵직한 뿌리가 건물 전체를 뒤덮고 있어 ‘수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보리수는 침략성이 강해 주변으로 확장하기를 좋아하고, 성질이 강해 다른 식물이 함께 자라기 어렵다. 건물 전체를 보리수의 기근(氣根·공기 중에 나와 있는 뿌리)이 감싸고 있는데, 놀이공원 등에 있는 ‘귀신의 집’같이 으스스하면서도 보리수의 강력한 지배력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이곳은 청나라 통치 시절 대만에 진출한 영국계 ‘덕기 상사’의 창고로 쓰이던 곳이고, 대만 광복 이후에는 대만 소금 제조 주식회사의 사무실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러한 인연 때문인지 안핑수옥 내 카페에서는 소금맛 아이스크림을 판매한다.

타이난에서 차를 타고 약 1시간가량 달리면 만날 수 있는 가오슝 역시 둘러볼 만하다. 이 도시는 따뜻한 느낌으로 가득하다. 그 느낌의 출발지는 옛날 가오슝항구의 제2부두였던 ‘보얼 특구’다. 대형 창고들이 항구를 따라 줄지어 있는데, 2000년 이전까지만 해도 방치돼 있던 이곳이 예술과 문화 행사의 장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바닷바람에 까맣게 닳아버린 창고의 투박한 외관, 그리고 이를 장식하는 알록달록한 각종 예술품의 조화는 일상에 치어 한동안 끊었던 ‘인스타그램’을 다시 시작하고 싶게 만든다.

도시를 감싸는 그 특유의 따뜻한 느낌은 보얼 특구 근처 ‘하마센 철도 문화원구’에서 절정으로 치닫는다. 1900년대 초반까지 가오슝 기차역으로 쓰였던 이곳은 지금도 철로가 그대로 살아 있지만, 그 사이를 잔디로 푹신하게 채웠다. 넓은 기차역 부지가 탁 트여 도시를 상징하는 공원으로 거듭났다. 일요일 오후에 찾았던 이곳은 연 날리고, 자전거 배우는 아이들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출장 일정을 끝내고 가오슝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내린 결론이 있다. 단순히 2박 3일짜리 일정으로 끝내버리기엔 대만은 너무나도 아까운 곳이라는 것이다.

Plus Point

동양의 유태인이라 불리는‘客家人’

객가의 전통 가옥 ‘토루’. 사진 위키피디아
객가의 전통 가옥 ‘토루’. 사진 위키피디아

대만엔 ‘객가(客家)’라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 대륙에서 이주해온 한족은 초기 이주자인 본성인(本省人)과 1949년 전후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과 함께 건너온 외성인(外省人)으로 나뉜다. 본성인 중에서도 광둥성, 푸젠성 등 중국 대륙 경계 지역에서 이주해온 이들이 바로 ‘객가인’이다.

객가인은 남다른 교육열과 뛰어난 경제 감각, 진취적 성격을 갖고 있기로 유명하다. 이주민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토지 등을 소유하기 어려워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 때문에 ‘동양의 유태인’이라는 별명도 있다. 대만 인구의 15%를 차지하는 객가인이 차 산업이 활발한 중부 지역에 주로 거주하는 이유는 이들의 성향에서 비롯된다. 이 지역에 정착한 객가인은 척박한 산악 지역인 중부 지방에서 차를 재배해 이곳을 대만의 차 산업 중심지로 격상시켰다. 덩샤오핑(鄧小平) 전 중국 주석, 리덩후이(李登輝) 전 대만 총통, 리콴유(李光耀) 싱가포르 총리 등이 대표적인 객가 출신이다. 현 대만 총통이자 최초의 여성 총통인 차이잉원(蔡英文) 역시 객가 출신이다.

객가인은 자신들만 사용하는 언어인 ‘객가어’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조상 논을 팔 수는 있어도 조상의 말(言)은 팔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대만은 중국 표준어인 ‘보통화’를 공용어로 지정하고 있는데, 객가어는 보통화와는 완전히 다르다. 교통시설 등 공공장소 안내방송을 보통화와 객가어, 영어순으로 한다. 객가어 전문 케이블TV 채널도 있다. 뉴스부터 드라마, 오락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종합채널이다. 그만큼 객가 문화가 대만 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규모란 뜻이다.

객가인의 전통 가옥 ‘토루(土壘)’ 역시 이들의 자랑이다.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1000여 명 이상이 살 수 있는 대규모 건축물로, 건물 윗부분은 뻥 뚫려 있고 목재나 황토 등으로 만든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적이 침입했을 때 성벽 역할도 가능하다. 구조와 규모가 매우 독특해 중국의 국가문화재,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Plus Point

2018 타이완 미식전을 가다
‘루로우판<대만식 돼지고기 덮밥>’ 등 각양각색 요리가 한자리에

이윤정 기자

8월 10~13일 나흘간 타이베이 세계무역센터에서 열린 ‘타이완 미식전’. 사진 이윤정 기자
8월 10~13일 나흘간 타이베이 세계무역센터에서 열린 ‘타이완 미식전’. 사진 이윤정 기자

대만의 음식문화는 중국 각지에서 이주해온 중국인들의 음식문화가 종합적으로 반영돼 있다. 중국에서 대만으로 건너온 이들 대부분이 ‘엘리트’였던 만큼, 대만이 중국 전통 요리를 더 잘 보존하고 있다는 자부심 어린 시각도 있다. 중국 음식은 대만 음식문화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네덜란드·스페인·일본 등의 통치를 받던 시절, 그들의 식습관이 융합되면서 대만의 음식문화는 더욱 다채로워졌다. 대만이 아시아의 ‘미식천국’이라 불리는 이유다.

대만 전국 각지에서 내로라하는 식당의 음식을 한눈에 살펴보는 것은 물론, 대만 요식 업계의 최신 흐름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올해 27회째를 맞이한 ‘타이완 미식전’이다. 대만 교통부 산하 대만관광협회는 자국의 음식문화를 더욱 발전시키고 알리기 위해 매년 타이완 미식전을 개최하고 있다. 8월 10일 타이베이 세계무역센터에서 열린 타이완 미식전을 찾았다. 행사장에 들어서자마자 대만 음식 특유의 알싸한 향신료 냄새가 코끝을 잔잔하게 맴돌았다.

이번 미식전에서는 대만식 돼지고기 덮밥인 ‘루로우판(卤肉饭)’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루로우판은 간장에 삼겹살과 향신료 ‘오향(五香)’ 등을 넣어 6시간 이상 푹 졸인 뒤 흰쌀밥에 올려 먹는 음식으로, 이전부터 저렴한 먹거리로 대만인에게 널리 사랑받아 왔다. 다만 외국인 관광객에겐 다소 생소하다는 점을 고려, 대만 정부가 직접 ‘루로우판 알리기’에 나섰다. 린메이후이(林美慧) 타이완 미식전 진행요원은 “한국인 등 대만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은 대만의 대표 음식 하면 ‘우육면(牛肉麵)’을 떠올리는데, 사실 루로우판이 훨씬 대중적 음식”이라며 “지난해부터 ‘루로우판 축제’가 열리고 있다”고 전했다. 루로우판의 가격은 30~50대만달러로, 한국 돈으로는 약 1000~2000원에 불과하다.

올해 대만 미식전에서 방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또 다른 곳은 ‘이국 음식’ 코너에 있는 ‘무슬림’ 부스였다. 현재 중국과의 관계 악화로 중국인 관광객이 급감한 대만은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를 줄이는 ‘신남향정책’을 통해 다른 지역 관광객 유치에 힘쓰고 있다. 무슬림이 먹을 수 있는 ‘할랄 인증 식당’을 늘리려는 것도 이 같은 정책의 일환이다. 이날 대만 미식전을 찾은 대만 지룽시정부 교통관광국 직원 우이팅(歐怡廷)씨는 “여행 관련 업무를 맡고 있어 매년 대만 미식전에 참석하는데, 올해의 경우 지난해까지 보지 못했던 무슬림 부스가 설치됐다는 점이 가장 흥미로웠다”며 “대만 정부가 무슬림 관광객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인 듯하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올해 타이완 미식전에서는 대만 전국에서 생산되는 각종 과일, 토착 원주민들의 전통 요리, 음식을 담을 수 있는 식기 등도 한 번에 만나볼 수 있었다. 올해의 경우 620개 부스가 가득 찼고, 8월 10~13일 나흘간 약 13만 명의 방문객이 이곳을 찾았다.

대만의 5성급 호텔인 ‘그랜드 메이풀 호텔 타이베이’의 취엔용화(陳永華) 셰프는 “호텔이 오픈한 지 이제 갓 2년을 넘겨 홍보가 절실한데, 지난해 타이완 미식전에 참석했다가 홍보 효과를 톡톡히 봤다”며 “미식전에서 우리 호텔 음식을 직접 접했거나 입소문, 미디어 등을 통해 알게 된 방문객이 많이 찾아왔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도 여건이 된다면 계속 미식전에 참가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