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최대 규모 백화점 갤러리 라파예트의 2016년 쇼윈도. 한국 작가 양혜규의 작품이다. 사진 이미혜
프랑스 최대 규모 백화점 갤러리 라파예트의 2016년 쇼윈도. 한국 작가 양혜규의 작품이다. 사진 이미혜

용산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은 재개발과 철거로 어수선하던 용산의 풍경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세계적인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설계한 반짝이는 건축물만큼이나 화제가 된 건 이곳 안팎에서 만날 수 있는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이다. 1층의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근사한 설치 작품의 관람권은 거리를 지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도시의 중심가를 채운 쇼윈도는 예술을 향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거리의 미술관이다. 특히 패션 매장의 쇼윈도는 유독 빛난다. 예쁜 구두가 솜사탕 구름 위를 날아다니고, 새로 나온 빨간 드레스는 꽃처럼 핀다. 우리의 산책을 즐겁게 하는 패션 쇼윈도의 세계로 떠나보자.

“쇼윈도 디스플레이는 만인을 위한 그림이다. 디스플레이 매니저에게 공간은 캔버스다. 상품은 물감이 되고 그는 빛과 그림자를 붓 삼아 그림을 그린다.” 생활 환경의 예술화를 꿈꾸는 ‘상호현실주의(Correalism)’를 창안한 건축가이자 조각가, 디자이너 프레데릭 존 키슬러의 말이다. 그는 20세기 초 현대미술의 후원자 페기 구겐하임의 의뢰를 받아 파격적인 곡선 형태의 ‘금세기 미술관(The Art of This Century Gallery)’을 완성하며 유명세를 탔다.


대중예술 공간으로 진화한 쇼윈도

쇼윈도에서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발견한 건 그보다 한참 전이다. 1927년 그는 뉴욕 5번가의 삭스 피프스 에비뉴 윈도 디스플레이를 맡았다. 평평한 유리창을 가진 백화점은 그야말로 열린 무대였다. 그는 거리와 마주한 쇼윈도를 공공의 갤러리로 보았고, 프레데릭의 쇼윈도는 그 자체로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현대미술 작품이 됐다. 그는 이러한 형태의 응용미술이야말로 일상과 미술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현재, 21세기 쇼윈도는 가장 실험적인 대중예술 갤러리로 진화했다.

미국 맨해튼의 백화점 바니스 뉴욕이 대표적인 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재치 넘치는 윈도 디스플레이로 주목받은 바니스 뉴욕은 2011년 패션 매거진 피처 에디터 출신의 데니스 프리드먼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하면서 더욱 기발해졌다. 프리드먼은 기네스가의 상속녀이자 패션 아이콘인 다프네 기네스를 백화점 쇼윈도 안에 통째로 집어넣었다. 디스플레이 벽면에 옷처럼 걸려있던 다프네 기네스는 반투명 드레스룸에서 세상을 떠난 자신의 친구 알렉산더 맥퀸의 드레스로 옷을 갈아입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백화점 앞을 지나던 사람들은 전 과정을 지켜보며 사진을 찍었다. ‘레이디 가가 워크숍’은 또 어떤가. 바니스 뉴욕은 레이디 가가를 뮤즈 삼아 쇼윈도는 물론 백화점 내부 디스플레이, 쇼핑백까지 가가 스타일로 꾸몄다.

이곳 쇼윈도에서는 ‘데스테 패션 컬렉션(Deste Fashion Collection)’이 열리기도 한다. 데스테 패션 컬렉션은 제프 쿤스(신세계 백화점 본점 옥상 정원에서도 제프 쿤스의 반짝이는 보라색 하트 모형 작품을 만날 수 있다)가 디자인한 요트를 소유한 그리스의 억만장자 다키스 조아누가 이끄는 데스테 재단의 문화·예술 프로젝트다. 미술가뿐만 아니라 사진가 유르겐 텔러, 영화감독 아디너 레이첼 창가리, 디자이너 헬무트 랭, 시인 파트리지아 카발리 등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해 쇼윈도를 장식했다. 바니스 뉴욕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프리드먼은 “770달러짜리 구두를 판매하는 수십억원대의 매장 윈도에서는 작은 디테일까지 신경써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이 쇼윈도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바니스 뉴욕의 상징이다.

당대의 영향력 있는 현대미술 작가들을 소개해온 프랑스 최대 규모의 백화점 갤러리 라파예트는 2016년 여름, 한국 작가 양혜규를 초대했다. 패션의 중심지 파리 8구 오스망대로에 위치한 본점의 모든 쇼윈도에는 짚단과 색동, 각시탈 등 양혜규 작업의 모티브가 된 오브제들이 전시됐다. ‘의사(擬似)-이교적 모던(Quasi-Pagan Modern)’이라는 모토 아래, 한국의 토속 신화와 연관된 이 이미지들은 작가의 예술적 팔레트를 거쳐 최첨단 서양 의복과 한자리에서 마주했다. 43m 높이의 유리 돔 천장에는 양혜규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버티칼 블라인드가 공중 높이 설치됐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신단수에 매단 붉은 깃발 같기도 했다. 이 작업은 프랑스 전역의 갤러리 라파예트 51개 지점 약 400여개의 쇼윈도에서도 소개됐다. 또 15만개의 한정판 쇼핑백도 제작했다. 갤러리 라파예트가 현대미술 작가의 실제 작품이 반영된 쇼핑백을 제작한 건 처음이었다.


예술가가 직접 꾸미는 에르메스 쇼윈도

예술 애호가로 소문난 패션 디자이너들과 패션 브랜드 오너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매장 안으로 예술 작품을 끌어들인다. 에르메스는 전 세계 매장에서 쇼윈도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해오고 있다. ‘아틀리에 에르메스’라는 갤러리를 자체적으로 운영하며 에르메스 미술상을 통해 현대 예술가들을 후원해오고 있는 에르메스의 쇼윈도는 나라마다 모두 다르게 꾸며진다. 각 매장의 쇼윈도는 그해의 테마에 따라 나라별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으로 진행되고, 그후 VMD(비주얼 머천다이저·매장 전체를 꾸미는 직업)가 해당 디자인에 맞춰 에르메스 제품을 디스플레이하는 방식이다. 해당 테마에 대한 표현 방식은 전적으로 작가의 자유로운 상상력에 맡긴다.

한국 작가의 작품이 호주 에르메스 매장을 장식한 적도 있다. 권오상은 에르메스 시드니 매장 쇼윈도에 모델 박성진의 사진 조각상을 세웠다. 1990년대 후반부터 실물을 직접 카메라로 촬영해 입체 조각으로 재구성하는 ‘데오도란트 타입’ 연작을 선보여온 권오상은 에르메스 시드니의 의뢰를 받아 ‘아트 오브 이미지-새로운 조각상’을 완성했다. 한쪽 창은 표범, 원숭이, 부엉이 등의 야생동물 조각과 함께 권오상의 감성을 더한 에르메스 가방이 전시됐고, 다른 창에선 검은색 에르메스 재킷과 바지를 입은 모델 박성진이 백호를 어깨에 짊어진 채 우뚝 섰다.

루이뷔통 시절, 마크 제이콥스의 유별났던 예술 사랑은 또 어떤가. 리처드 프린스의 간호사부터 스테판 스프라우스의 형광색 그래피티, 무라카미 다카시의 멀티컬러 모노그램, 야요이 쿠사마의 현란한 물방울이 매 시즌 쇼윈도를 가득 채웠다. 루이뷔통은 마크 제이콥스가 떠난 후에도 쇼윈도 디스플레이에 각별한 애정을 두고 있다. 2015년엔 ‘루이뷔통 윈도’를 출간하기도 했다. 문학과 여행, 예술을 사랑했던 가스통 루이뷔통은 매주 상점의 진열장을 직접 꾸미며 1920~30년대 거리의 풍경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가스통은 “윈도 디스플레이는 예리한 건축 감각과 무대 연출 기술의 조화를 바탕으로 한다”며 열정을 보였다.

가스통 루이뷔통은 “매일 새롭게 공을 들인다면 바쁜 행인들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고 한가로운 산책을 하고싶은 마음이 들게 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아이디어가 넘치는 유쾌한 쇼윈도야말로 도심 속 오아시스다. 예술가의 역할이 동시대를 사는 이들과의 소통이라면 쇼윈도는 이를 위한 열린 창이다.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거리의 쇼윈도는 오늘도 불을 밝힌다. 마음은 물론 지갑도 활짝 열린다. 이 거리의 마술쇼는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다.


▒ 이미혜
패션·미술 칼럼니스트, 문화기획자, 보그코리아 컨트리뷰팅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