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키에 비해 발이 작다. 거리를 걷다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 어딘가 어색한 인상을 받을 때가 있다. 이 느낌이 싫어서 한때는 신발을 크게 신었다. 지금도 여전히 운동화는 한두 치수 크게 신는다. 그리고 나는 나의 작은 발과 조금 큰 구두를 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장면이다.


어느 화창한 봄날의 데이트

대학을 졸업한 바로 그해 가을 프랑스로 떠난 나는 20대 중후반을 그곳에서 보냈다. 정해진 틀에서 사고하고 삶을 그리는 방식에 조금 다른 기운을 불어넣고 싶었다. 그럼에도 사는 모습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학교와 기숙사, 서점과 영화관을 정해진 노선처럼 찍고 다니는 건 파리에서도 여전했다. 그러다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나를 자꾸만 다른 곳으로 데려갔고 다른 방향을 바라보게 했다. 낯설고 두려워서 뒷걸음치곤 했지만 그의 이끎이 싫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누군가를 삶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낯선 세계를 맞이하고 또 내 안에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히는 일이다. 용기와 공포, 머뭇거림, 짜릿함과 혼돈, 즐거움이 공존하는 경험이다.

그를 통해 알게 된 것은 사람의 삶이 쌓아온 텍스트의 힘이다. 그가 어릴 적부터 보고 만나고 경험하고 읽고 습득한 것은 그라는 사람을 나와 다르게, 혹은 내가 이전에 만난 사람들과 다른 결로 빚어냈다. 그가 가진 텍스트의 풍부함이 그의 삶을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삶을 상상하는 모습도 달랐다. 당연히 연애의 풍경도 그러했다. 사람을 만나 사랑하는 연애라는 모험이 두렵지만 즐거운, 내 세계를 온통 피어 오르게 하는 계기라는 것을 깨닫게도 했다.

그와의 데이트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화창한 날이었다. 그는 내게 파리의 어느 공원을 보여주고 싶다며, 점심시간에 나를 그의 사무실 가까이 불렀다. 점심을 먹고 근처를 산책했다. 나는 조금 수줍었고 그의 손은 내 어깨에 조심스레 얹혀 있었다. 막 시작하는 봄, 여기저기서 연둣빛이 솟아올라 봄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다. 오랜 겨울의 눅눅한 막을 걷어낸 찬란한 봄빛에 세상이 온통 술렁이는 듯했다. 나는 옷장 속에 처박혀 있던 굽 높은 구두를 찾아 신고 그를 만나러 갔다. 내 치수보다 상당히 컸지만, 그만한 가격이라면 약간의 불편쯤은 감수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그러나 몇 차례 신고서는 옷장 구석에 슬며시 밀어 넣어 두었던 것이었다. 맞지 않는 구두 탓인지 온몸의 긴장을 쉽게 풀지 못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그가 내민 손에 감싸인 어깨 쪽으로 불필요한 무게가 실리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며.

봄빛을 받아 그의 밝은 피부색이 더욱 투명해 보였다. 잡티 하나 보이지 않는 그의 살갗에는 대신 희미한 주름살들이 성기게 들어서 있었다. 살짝 처진 눈꼬리 주변으로 웃을 때마다 조금 더 깊이 파이는 주름 몇 가닥 그리고 아치형으로 나 있는 두 눈썹 사이로 무언가 골몰해 있을 때면 드러나는 사색의 흔적들, 놀란 표정을 지을 때마다 눈썹에 밀려 그려지는 M자형 이마의 굴곡들. 그는 나보다 고작 세 살 많았지만, 어른 같았다. 말끔하게 다려진 와이셔츠에 짙은 감색 양복을 입은 탓이기도 했다.

한창 볕이 좋은 오후, 어른인 그를 나는 다시 어른의 직장으로 돌려보내야만 했다. 나에게는 특별히 계획이 잡히지 않은 오후 전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지만, 그에게는 끝내야 할 일과가 있었다. 돌아가는 길, 특별히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랐지만 어디론가 떠나야만 하는 길, 나는 아슬아슬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내려가 밝은 햇살을 등지고 지하도 안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유난히 길게만 느껴지던 지하도 안을 걸어 나가며 지나치는 사람들의 형광빛 얼굴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이제 막 시작된 봄날, 햇볕이 닿지 않는 곳은 여전히 그늘지고 서늘했다. 어디선가 축축한 기운이 몰려오는 느낌 그리고 나는 급작스러운 피로감에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두어 시간 걸었던 긴장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발가락에 빳빳이 힘을 주고 있어도 걸음을 옮길 때마다 뒤꿈치가 구두 밖으로 비죽거리며 드러났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위태롭게만 느껴졌다.

그와 함께 보냈던 나의 오후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입구만큼 비현실적인 냄새가 났다. 그를 만나고 난 뒤면 언제나 속이 울렁거렸다. 독한 커피를 마신 뒤처럼 주체할 수 없는 울렁증에 초조해졌다. 지하도가 끝나는 저편에 또 다른 입구가 있었다. 그러나 미처 거기에 다다르기 전, 지하도 한복판에서 멈춰 서버렸다.

등 뒤로부터 누군가의 긴 팔이 내 어깨를 감아왔다. 날렵하고 부드러운 오후의 습격에, 흠칫 놀라 자리에 붙박은 듯 섰다. 뒤에서 나의 어깨를 안은 그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구두가 좀 크다. 다음에 만나면 같이 구두 사러 가자.”

뒤를 돌아보니 남자가 뒷걸음치며 걸어가고 있었다. 손을 흔들면서. 눈 가장자리에 주름이 지고 입술 주변이 둥글게 파였다. 그는 웃고 있었다. 문득 생각했다. 울고 있는 모습 같다고. 그가 멀어질수록 그의 얼굴에 주름을 그리는 것이 웃음인지 울음인지 분간할 수 없어졌다.

그는 우리가 헤어진 이후 줄곧 내 뒤를 쫓고 있었다. 큰 구두를 신고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내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지금,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는 나는 어정쩡한 손짓으로 인사를 보내고 있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인사라고 불리기에는 조금 부족한 모습으로. 그가 마침내 뒤를 돌아 걷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려다 몸을 돌려 다시 맞은편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는 자신이 들어왔던 입구를 지나 눈부신 봄빛이 떠도는 파리의 거리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잠시 후 길고 어두운 통로 속을 지나가는 지하철의 덜컹거리는 움직임에 몸을 맡기며 유리창에 우두커니 떠 있는 내 얼굴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큰 구두를 특별하게 기억나게 한 그

이제 나는 억지로 발에 큰 구두를 신지 않는다. 그럼에도 큰 구두의 감각과 오후의 그늘을 뚫고 찾아온 따스한 온기의 습격과 귓가를 간질이던 속삭임은 맞지 않는 구두마저 각별한 느낌으로 바라보게 한다. 저 구두를 신으면 나는 어디로 가게 될까. 누군가 만나게 될까. 그와 나는 어떤 세상에 들어서게 될까. 그리고 이제는 그가 신은 구두 또한 유심히 바라보게 될 것이다. 돌아서 걸어가는 그의 걸음걸이도. 나 또한 헤어진 뒤 한동안을, 그의 뒷모습을 음미하며 산책을 연장할지 모른다. 함께 걷다 보는 길도 아름답지만, 그를 보며 혼자 걷는 세상 또한 은밀한 즐거움을 선사할 테니.


▒ 이서희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영화학교 ESEC 졸업, 파리3대학 영화과 석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