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출신 수퍼 기억력 소유자 에란 카츠가 서울에서 열린 제9회 문화소통포럼(CCF)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이 한국인만큼 인정 욕구가 강하다고 했다. 사진 남강호 기자
이스라엘 출신 수퍼 기억력 소유자 에란 카츠가 서울에서 열린 제9회 문화소통포럼(CCF)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이 한국인만큼 인정 욕구가 강하다고 했다. 사진 남강호 기자

스마트폰이 손안의 백과사전이 됐고 수퍼컴퓨터가 조 단위의 연산을 처리하는 지금, 대관절 기억력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암기력은 ‘영재 퀴즈쇼’에도 이미 철 지난 구식 두뇌 서커스가 아닌가. 의구심을 읽어낸 듯 세계적인 기억력 천재 에란 카츠가 웃으며 말했다. “기술이 발달하면 기억할 필요가 없어질 거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많은 것을 기억에 의존합니다. 창의성도 기억을 바탕으로 더 발전하죠.”

1965년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에란 카츠는 500자리 숫자를 한 번 듣고 그대로 읊어, 기억력 부문 세계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렸다. 모토롤라, IBM, 마이크로소프트, GE, 코카콜라 등 세계적인 기업이 앞다퉈 두뇌 능력 계발 강사로 그를 초빙하고 있다. 그의 책 ‘슈퍼 기억력의 비밀’ ‘천재가 된 제롬’은 한국어를 비롯해 12개 언어로 번역돼 50만 부 이상 판매됐다. 서울에서 열린 제9회 문화소통포럼(CCF)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뇌 기억술’의 대가, 에란 카츠를 만나 유대인 교육법과 기억력의 비밀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그는 유대인 공부법의 가장 큰 특징으로 상상력을 꼽았다. 유대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신’이라는 개념이 있고, 그것이 유대인 상상력의 기본이 됐다는 것. 다른 민족이 우상을 섬기던 3000년 전에 유대인은 이미 만질 수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초월적인 존재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수많은 역경과 불가능 속에서도 그들은 최선의 상상력을 동원했고 그 결과 지금의 ‘탁월한’ 이스라엘 민족이 됐다.


최근 방한했을 때 한국과 이스라엘이 닮은 점이 많다고 했는데.
“한국과 이스라엘은 태어나자마자 헤어진 형제 같다(웃음). 한국은 북한과 대치 중이고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에 둘러싸여 있다. 두 나라는 자원도 풍부하지 않다. 한국은 6·25전쟁을, 유대인은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겪었다. 바로 그런 불리한 조건 때문에 한국과 이스라엘 국민은 더 빨리 더 많은 것을 성취했다. 평범한 삶을 유지하고 싶다는 욕망과 인정 그리고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이 동시에 상승 작용을 한 셈이다.”

이스라엘 국민도 한국인만큼 인정 욕구가 강한가.
“덜하지 않다(웃음). 인정 욕구가 악조건을 떨치게 했다. 더 많은 노력, 더 강한 혁신… 성실과 개혁이 결합해 두 나라 다 다양한 분야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 않나. 미국 학교에서 공부하는 외국인 학생들, 특히 유대인과 한국인은 자기 부가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미국인보다 더 많은 것을 이뤄내곤 한다.”

한국은 과열된 사교육과 과도기적 시스템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스라엘은 어떤가.
“유대인은 랍비 문화가 있어 교사를 지혜의 롤모델로 삼는다. 교사가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다. 또 이스라엘과 유대 사회는 똑똑한 사람을 매우 높이 평가한다. 만약 TV 스타가 롤모델이라면 그들처럼 되길 원하겠지만(웃음). 사회가 변하고 있어도 아직 유대인에게 교사는 특별하다. 다른 점이 또 있다. 한국인은 유교의 영향 때문인지 교육 환경이 수동적이지만, 이스라엘은 굉장히 능동적이다. 사소한 정의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질문하고 답을 찾는다. 학생들은 자신의 진로에 대한 선택권을 갖는다. 사립학교에 갈 건지, 공립학교에 갈 건지. 내 딸은 시험이 없는 학교에 갔다. 부담도 없고 경쟁도 없다. 타인과의 경쟁 구도가 잡히지 않으니,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웃음).”


에란 카츠의 저서 ‘슈퍼 기억력의 비밀’과 ‘천재가 된 제롬’
에란 카츠의 저서 ‘슈퍼 기억력의 비밀’과 ‘천재가 된 제롬’

노벨상 수상자 중 45% 이상이 유대인이라는 건 여전히 놀랍다.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는 유대인의 공부법이 또 있나.
“1000년 전에 쓰인 유대 민족의 책에 ‘몸을 움직이면 정신이 기억을 더 잘한다’라고 적혀 있다. 실제로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공부하면 암기가 더 잘된다. 움직이면 두뇌에 산소 공급이 원활해져서 뇌가 활성화된다. 이스라엘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지루해지면 일어나서 외우거나 다른 학생과 논쟁하는 광경이 자주 펼쳐진다.”

본격적으로 ‘기억력’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당신은 기네스북의 수퍼 기억력의 소유자다. 그 기록은 어떻게 세웠나.
“일종의 스턴트 같은 거였다(웃음). 기억력 개선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500자리 숫자를 한 번 듣고 끝까지 읊었다. 기억력 대회에 나가기 하루 전, 8시간 정도 메모리 테크닉을 훈련했다. 운동선수처럼 말이다. 누구나 할 수 있고 지금 그걸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천재적인 기억력은 타고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천재적 기억력의 소유자가 있다는 건 신화다. 기억력이 남보다 좋은 사람은 있지만, 그들은 다른 특정 부분의 뇌 능력이 떨어질 거다. 나도 타고난 수퍼 기억력의 소유자가 아니다. 오로지 노력으로 이런 종류의 기술을 습득한 정도다.”

망각 연구의 권위자인 헤르만 에빙하우스에 의하면 입력되는 정보가 너무 많으면 뇌는 모두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한다. 50분마다 10분씩 쉬는 이유가 뇌에 새로운 정보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핵심은 잘 기억하려면 불필요한 걸 잊어야 한다. 에란 카츠는 특히 트라우마나 좌절에 대한 망각은 인생의 축복이라고 강조했다.

잊고 싶어도 나쁜 기억은 더 자주, 오래 뇌에 머문다.
“잊으려면 나쁜 기억과 관련된 부정적인 감정을 최소화해야 한다. 용서가 최선이다. 의식적이고 반복적으로 나를 용서하고 타인을 용서해야 한다. 또 하나의 방법은 나쁜 감정에서도 긍정적인 요소를 찾는 거다. 레몬은 시지만 레모네이드를 만들면 달다. 누가 돈을 훔쳐 갔다면, 그가 남을 도왔다거나 꼭 필요한 부분에 썼다고 상상하라(웃음).”


에란 카츠는 “천재적인 기억력의 소유자가 있다는 건 신화”라며 “기억력이 남보다 좋은 사람은 있지만 그들은 다른 특정 부분의 뇌 능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에란 카츠는 “천재적인 기억력의 소유자가 있다는 건 신화”라며 “기억력이 남보다 좋은 사람은 있지만 그들은 다른 특정 부분의 뇌 능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쉽지 않은 일이다. 뇌가 그렇게 우리 말을 잘 듣나.
“놀랍게도 뇌는 우리 명령을 잘 따른다. 가령 쉽게 답이 안 나오는 괴로운 일이 있다면 잠들기 전에 뇌에 명령하라. ‘내일 아침 10시엔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오늘 밤엔 삭제하라’. 신기하게도 다음 날 아침 10시에 그런 기적이 일어날 거다.”

반대로 잘 기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연결해서 상상하라. 가령 방에 있다면 외워야 할 것의 핵심 단어를 방 안의 책상, 액자, 시계에 결부시켜 상상해보라. 다음 날 방의 구조를 떠올리면 전체 내용이 기억날 거다(웃음).”

나이 들어 기억력이 나빠지는 건 어떻게 막을 수 있나.
“가령 알츠하이머라면 그건 생리학적 질병이라 막을 수 없다. 다만 퍼즐이나 독서 등으로 기억력 감퇴를 늦출 수는 있다. 행복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떠올려서 상대에게 말하는 ‘향수법’도 좋은 방법이다. 되새길수록 뇌에 좋다. 나이가 든다고 기억력이 자동으로 떨어지진 않는다. 배우고 가르치고 여행 다니는 등 정신적인 활동과 육체적인 활동을 같이하면 90세가 돼도 지금보다 60~70% 기억력이 좋아질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암기력은 창의력만큼 대접을 못 받는 분위기다. 암기력은 컴퓨터에 맡기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뇌의 신경망은 연결돼 있다. 수퍼 기억력도 창의적인 연결 능력에서 나오는 거다. 다방면에 지식이 있어야 창의력이 생긴다. 창의성은 기억을 바탕으로 더 발전한다. 사람은 기술이 발달하면 기억할 필요가 없어질 거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많은 것을 기억에 의존한다. 의사가 스마트폰을 검색하며 수술할 수는 없다. 언어 학습도 기계로 주입할 수 없다. 스스로 외워야 한다. 새로운 걸 시도하려면 옛것에 대한 기억이 필수다.”

하지만 일상에서 우리는 이미 많은 기억을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의존하고 있는데.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지혜의 교사로 삼으면 안 된다.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으면 기억력과 창의력이 모두 떨어진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걸어가면서 생각한 거다. 컴퓨터 앞을 벗어나 움직이면서 생각하라. 스마트폰이 아닌 나에게 의지해야 한다.”

당신의 두 딸은 어떻게 공부했고, 당신은 어떤 역할을 했나.
“(웃으며) 자립심을 갖도록 가르쳤다. 도움이 필요할 때만 도와줬다. 내가 두뇌 계발 연구를 하면서 깨달은 진실은 학생이 준비될 때 교사가 나타난다는 거다. 강압적으로 하면 언젠가는 부작용이 나타난다. 똑똑하다는 건 자신의 능력과 스피드(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거다. 얼마 전에 딸이 혼자서 스페인 하이킹 여행을 다녀왔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아이를 믿었다. 여행 후 더 성숙해지고 책임감이 생겼다.”

한국엔 자식 주변을 맴도는 ‘헬리콥터 맘’이 많다.
“물리치기 힘든 본능이다. 하지만 멈춰야 한다. 아이들은 우리를 통해 세상에 나왔지만, 우리를 위해서 나온 건 아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인생과 스승이 있다.”

수퍼 기억력을 갖게 된 것이 당신의 행복에 도움이 됐나.
“물론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처음 기억 향상법에 관심을 두게 됐다. 성공은 하고 싶은데 최고 학생이 될 자신은 없었다(웃음). 스트레스와 부담은 가능한 한 덜 느끼면서 적당히 우수한 학생이 되고 싶었다. 다른 지름길은 없었다. 그러다 기억 향상법을 알게 됐고 내 인생이 달라졌다(웃음). 물론 대단한 끈기가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좋은 기억력은 내 인생에서 중요한 행복 자산이 됐다.”

에란 카츠는 자신의 IQ를 모른다고 했다. 자신이 얼마나 똑똑한가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가라고 했다.

행복한 뇌를 위해 우리는 당장 내일부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침에 차나 커피를 마실 때 단번에 들이켜지 말고 천천히 음미해라. 빨리 마시면 스트레스가 가중될 뿐이다. 내가 나를 제어할 수 있다는 여유가 하루의 두뇌 활력을 결정한다. 장을 볼 땐 목록을 기억하고, 운전할 땐 내비게이션보다 내 기억과 직감을 믿어라. 아이들의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제한하는 것도 잊지 말고(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