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를 배우다 불현듯 사랑 얘기가 떠올랐다.
요가를 배우다 불현듯 사랑 얘기가 떠올랐다.

1.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이 너무 막혀서 방법을 찾다가 근처 요가 스튜디오 수업을 듣기로 했다. 정기적으로 가는 건 아직 못 하고 있지만, 서너 번 다니다 보니 두 번에 걸쳐 참석한 수업의 선생이 자세를 교정해 주다가 묻는다.

“네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 하니? Zoë라고 불러도 될까? 아니면 그대로 쎄오히(내 이름 서희, Seohee를 영어 스펠링 그대로 발음하면 이렇게 된다)라고 부르는 게 좋니?”

메스티소(중남미 원주민과 백인의 혼혈인) 느낌의 요가 선생은 눈에 띄는 미인이다. 검고 탄력 있는 피부와 매끈하고 탄탄한 몸의 곡선이 얇지만 탱글탱글하다. 가늘고 동그랗고 탄력 있고 유연한 몸이다. 얼핏 보면 작은 몸이지만 가까이 볼수록 근육과 힘이 얼마나 정교하게 자리 잡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내가 그녀의 수업을 선호하는 이유는 그녀가 매력적이어서다. 프랑스어 억양이 심한 영어로 속삭이듯 말하는 모습, 눈웃음을 살랑살랑 치면서 사람들 사이를 거닐며 말을 걸 때나 우아하게 동작을 시연해 보일 때면 이국의 해변을 따라 걷는 기분마저 난다. 그런 그녀가 부른 내 이름이 조이라니. 프랑스에서도 여기 미국에서도, 외국인들에게 내 이름을 편하게 부르게 할 때면 소피라는 이름을 썼다.

그런데 조이라니. 마음에 들었다. 소피의 현명하고 점잖은 느낌보다 훨씬 더. 생명력 넘치고 활기찬 느낌이 든다(Zoe의 어원은 삶, 생명을 뜻하는 ‘life’라고 한다). 내 이름이 조이라고 생각하자 가슴 한구석에 깜찍한 전구 하나가 반짝 켜진 기분이었다. 그래, 난 한동안 조이로 살 예정이다.

수업이 끝날 무렵 그녀가 말했다. 그야말로 뜬금없이. “사랑은 끝없는 용서와 멈추지 않는 보살핌이에요.”

시체 자세로 누워서 머릿속으로 반박했다. ‘사랑은 기브 앤드 테이크, 주고받는 보살핌.’

뭐, 어찌 보면 두 측면 모두가 공존하는 관계가 가장 건강할 게다.


서로 적당히 맞춰주고 살면 어떤가

2.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에 등장하는, 주인공 케이가 사랑하는 홀로그램 AI(인공지능)의 이름 역시 조이다. 영어로 하면 발음도 스펠링도 조금은 다르다. Joi. 기쁨(joy)이라는 뜻에서 왔을까? 여하튼, 기쁨 ‘조’인 건 맞다. 그녀는 오래전 데커드가 사랑했던 레이첼의 요새 버전 같아 보인다. 귀엽고 섹시하고 청순하면서 도발적인, 그럼에도 지독히 순종적인, 사랑밖에 난 몰라 타입의 여자. 너무 뻔해서 속이 메슥거리는 그러나 뻔한 욕망의 소유자에게 공급하기 딱 좋은 대량 제품 유형의 기쁨조 여성상. 레이첼 역시 아름답고 청순하고 신비롭지만 종국에는 희생의 아이콘으로서 남자의 판타지에 자리 잡고 소비된다. 그녀들이 그렇게 답습되는 동안, 남자 주인공은 인류를 구원하기도 하고 혁명과 사상의 흥망성쇠를 지나간다.

속이 뒤틀리는 기분으로 영화를 끝내면서 언젠가 보았던 일본 극영화 ‘기묘한 이야기’ 중 미녀 캔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미녀 캔이라는 통조림이 존재하는데, 그걸 열면 미녀가 등장해 유통기한 동안 여자 친구 역할을 해 준다는 내용이다.

귀여운 용모의 배우 츠마부키 사토시가 주인공 역을 맡았는데, 알고 보니 그 역시 미남 통조림 태생이라는 반전이 기다린다. 미녀의 판타지를 좇던 미남조차 알고 보니 통조림 출신(한 여자의 판타지)이었다는 결론이다.

불현듯 든 생각은 ‘서로서로 적당히 판타지를 맞춰 주고 살면 또 어떤가’였다. 고정된 역할로서가 아니라, 가벼운 역할극처럼, 때에 맞춰진 롤플레잉처럼. 어릴 적 아이들과 놀던 그 모습대로. 할머니가 됐다가, 배 나온 아저씨가 됐다가, 물고기가 됐다가, 사나운 짐승 한 마리로 등장하던.

의심하고 비판하고 부당함을 바라보고 대항할 수 있되 놀이의 즐거움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역시, 내게 가장 설득력 있는 말은, 기쁨의 총량이다. 나만의 작은 놀이를 만들어서 실천하고 때로 그것을 남과 함께 나눈다. 그리고 다음은 바로 나의 친구 조이(Zoe)의 이야기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에 등장하는 홀로그램 AI(인공지능)인 조이.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에 등장하는 홀로그램 AI(인공지능)인 조이.

서로에 대한 사랑이 안식처

3.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다 새벽녘에 이르러 눈을 붙였다. 불면과 잠 사이를 건널 무렵 까맣고 커다란 눈동자의 새끼 호랑이가 다가왔다. 얼굴을 핥고 몸을 기분 좋게 깨물었다. 멀리 있는 애인이 전화기 너머 구원 투수처럼 등장해 나를 달랜 직후였다. 새벽녘에 바라보는 암흑은 텅 빈 야구장처럼 광활했고 나는 그럴 때마다 그를 소리쳐 불렀다. 그는 어느덧 나를 달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나의 모진 말들이 진심이 아님을 알았다. 가라앉을 때까지 듣다가 한숨처럼 나를 끌어안았다. 몸이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는 말로도 나를 안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멀리서라도 나를, 멀리 있는 거리만큼 더 많이 사랑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그의 약속에 곤두선 신경을 겨우 내려놓았다. 나는 그를 안전하다고 느꼈다. 바닥으로 자꾸만 가라앉아 헤어나올 수 없는 나를 그는 자꾸만 끌어내서 보듬어줬다. 때때로 우리는 함께 가라앉았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가라앉으면 입을 맞췄다. 서로의 폐에 숨을 불어넣다 보면 숨통이 트였고 몸이 가벼워졌다. 어느새 우리는 지상의 침대 위에 한 몸으로 엉켜 있었다. 그는 나를 안으며 종종 되뇌곤 했다. 시선을 내게 향한 채로, “살 것 같아.”

나는 그 앞에서 자주 뻔뻔하고 당당했다. 엉망인 채로 그에게 도착해서는 난폭하게 요구했다. 더 사랑해 줘. 나를 더 사랑해 봐. 이것 말고 더 큰 사랑을 줘. 그는 나를 종종 사랑의 난봉꾼이라고 불렀다. 그 말이 싫지 않았다.

며칠 동안 나는 그에게 직장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와 달라고 졸라댔다. 이 이야기를 들은 언니는 나를 잠시 나무랐다. 멀쩡한 직장을 두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건 아니라고.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라고 말이다.

나는 대답했다. “왜 내가 그의 삶에서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 안 해? 내가 갈 수 없으니 그가 오면 되잖아. 이렇게 떨어져 지내기 싫어. 그와 함께 일상을 누리고 싶어. 여자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기 위해 장소를 옮기고 삶의 방향까지 거침없이 전환하는데, 왜 남자라고 그걸 못 한다고 믿어야 해? 왜 남자의 인생에선 직업이 더 중요한 건데? 왜 남자의 사랑에는 그만큼의 용기를 기대하면 안 되는 건데?”

나는 그에게 내게 당장 올 수 없는 대신 나를 더 잘 사랑해달라고 요구했다. 그에게 거침없이 요구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내가 그를 사랑하니까.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아득하게, 과거를 송두리째 날리고 할 수 있다면 미래까지 모조리 저당 잡히고서라도, 그를 사랑하니까.

그는 그럴 거라고, 나를 더 사랑하고 또 사랑할 거라고 깊고 온순한 고백을 했다. 그렇게 잠이 들 무렵 새끼 호랑이가 나타났다. 내 눈꺼풀을 핥고 뺨을 간질이고 어깨를 야금야금 깨물었다. 호랑이의 털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잠시 후 깊은 잠으로 걸어 들어가자 눈앞에 커다란 집이 나타났다. 집을 통과해 뒷문을 열고 나가니 아름다운 벌판과 가을빛으로 물든 세상과 그리고 색깔, 색깔들이 펼쳐졌다. 조금 걷자 바다가 시야 가득 넘실댔다. 푸른 바다에 파도가 가득했고 바람이 시원했다. 가슴을 열고 신선한 공기로 폐를 채우고서 중얼거렸다. “살 것 같아.”


▒ 이서희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영화학교 ESEC 졸업, 파리3대학 영화과 석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