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나우강을 끼고 자리 잡은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
도나우강을 끼고 자리 잡은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

도시의 깊은 역사를 말해주듯 닳고 닳은 구시가지의 돌바닥, 매시 정각 도시 전체에 울려 퍼지는 은은한 성당의 종소리, 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건물.

오스트리아 수도 빈(비엔나)에서 도나우강을 따라 약 한 시간을 내려가다 보면 낮은 구릉에 동화같이 자리 잡은 도시가 눈앞에 펼쳐진다. 슬로바키아 최대 도시이자 수도인 브라티슬라바에서는 20세기 초반까지 합스부르크 제국의 주요 도시로서 누렸던 영화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눈을 조금만 옆으로 돌려보면 20세기 중반 무렵 공산 정권 아래 세워진 다소 음침한 건축물과 구시가지 한복판을 일직선으로 가로지르는 폭넓은 차도 등이 이전의 부흥과는 이질적이어서 조금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도시이기도 하다.

18~19세기에는 빈과 지척인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루트비히 판 베토벤, 프란츠 리스트 등 당대 유명 음악인이 자주 찾던 곳이기도 했다. 특히 리스트는 브라티슬라바의 아름다움에 반해 무려 15번 넘게 방문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도시의 음악적 명성은 안타깝게도 이웃 빈에 비해 다소 뒤처졌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이 도시 출신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음악가 이름을 딴 요한 네포무크 후멜(Johann Nepomuk Hummel) 페스티벌이 열려 오랫동안 잠자던 도시의 예술적 열정이 피어나고 있다.

1778년 브라티슬라바에서 태어난 후멜은 탁월한 음악적 재능으로 183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동시대 동료였던 베토벤을 능가하는 유럽 최고의 음악가로서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불렸고, 이내 모차르트의 눈에 들어 그의 집에서 2년 동안 머물며 무료로 레슨을 받았다고 알려졌다. 당시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음악가인 안토니오 살리에리와 하이든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는가 하면, 그들의 음악을 헌정받았다고도 전해진다. 또 고전에서 낭만주의 시대로 옮겨갈 때 모차르트, 하이든 등 선배 음악가들의 유산을 후배 음악가들에게 전하며 새 음악적 시대를 여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 카를 체르니, 프란츠 슈베르트, 펠릭스 멘델스존, 프레데리크 쇼팽, 프란츠 리스트, 로베르트 슈만 등 후배 작곡가들의 음악에서 후멜의 영향력을 살펴볼 수 있을 정도다. 특히 슈베르트는 그의 최고 명작이라 할 수 있는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3곡을 후멜에게 헌정하고 싶어 했고,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에서 후멜의 기악 협주곡 스타일이 얼마나 지대하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시대사조가 급변하면서 후멜 음악은 그의 사후 빠르게 잊혔지만, 최근 그의 음악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특히 그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브라티슬라바에서 올해 첫 후멜 페스티벌이 열려 그의 음악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요한 네포무크 후멜 초상화. 사진 위키피디아
요한 네포무크 후멜 초상화. 사진 위키피디아

심장을 멎게 하는 고난도 기술

필자는 영광스럽게도 후멜 페스티벌 개막 연주에 초대받아 지난 8월 협연 무대를 가졌다. 음악인으로서 잊혔던 그의 음악을 재발굴한다는 사명감을 가질 수 있었고, 또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장의 아름다운 선율을 만끽할 수 있어 준비하는 내내 즐거웠다. 그러나 쉬운 도전만은 아니었다. 올봄 연주 제안을 받았을 때만 해도 그의 곡이 상당히 난도가 높아 고심했다. 그의 음악 스타일은 모차르트로 대표되는 1800년대쯤의 빈 고전주의와 쇼팽을 예견하는 듯한 낭만주의 초기의 작풍이 섞여 있어 한 단어로 정의하기 매우 까다로웠다. 서정적인 맬로디에 이어 곧바로 등장하는 고난도의 기술은 연주 중간중간 필자의 심장을 멎게 할 정도로 어려웠다. 이 어려움을 유려함으로 표현해 내라는 작곡가의 의도를 살리는 것은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개막 연주는 후멜 생전에 건축된 브라티슬라바 대주교 궁전에서 진행됐다. 그의 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기품 있는 웃음을 머금은 듯 우아해서 합스부르크 스타일의 대주교 궁전과도 매우 잘 어울리는 듯했다. 또 궁전 바로 옆 후멜 생가에서 울려 퍼진 그의 가곡 음원, 도시 중앙광장에 설치된 야외무대에서 오케스트라로 연주된 그의 교향곡,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된 그의 오페라 작품 등은 200년 전 세상을 떠난 후멜이 다시 한번 우리 곁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마저 들게 했다. 이번에 브라티슬라바를 찾으면서 한 도시의 토양은 그곳에서 태어난 인간에게 음악적 재능을 선사하고, 그 재능을 꽃피운 인간은 수백 년이 지난 후에도 자신의 고향에 음악적 축복을 내린다는, 영원히 지속되는 아름다운 인연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 안종도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연주학 박사, 함부르크 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Plus Point

브라티슬라바가 키운 후멜의 아름다운 선율

요한 네포무크 후멜 피아노 협주곡
연주|스티븐 허프

후멜의 피아노 협주곡은 쇼팽 협주곡의 탄생을 예견할 정도로 낭만적인 느낌이 다분하면서도 선배 작곡가인 모차르트의 유산 또한 잘 담아내고 있다.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자신의 역량 또한 최대한으로 담아, 연주자에게 상당한 난도를 요구한다. 피아노 연주뿐 아니라 최근 자신의 소설집 발간으로도 주목받은 영국 출신의 피아니스트 스티븐 허프가 연주한 후멜의 협주곡을 소개한다.


요한 네포무크 후멜 피아노 소나타
연주|코스탄티노 마스트로프리미아노

후멜은 생애 전반에 걸쳐 다수의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했다. 이 음반에 수록된 6곡의 소나타 작품을 통해 그의 음악적 세계의 발전뿐만 아니라 고전에서 낭만시대로 옮겨가는 시대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