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마음이 사랑이다.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마음이 사랑이다.

풍경은 때로 후각이 돼 떠오른다. 이곳 미국 LA도 밤이면 제법 서늘해졌다. 등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름에 한밤중에 눈을 뜨기도 했다. 온종일 열어놓은 창을 한밤에 일어나서 닫는 일이 한동안 반복됐다. 조만간 나는 창을 닫고 잠을 청하게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닫힌 창틈으로 오래전 풍경이 바람처럼 코끝에 어렸다. 분명히 조금 전에 창을 닫았음에도, 냄새처럼 피어오르는 지난날의 기억이었다. 갑자기 왜, 스물의 그 날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마음이 풍경처럼 어두운 밤 한가운데 펼쳐졌다. 마흔을 넘어선 여자의 가을 침실에서.

대학 입학 후 얼마 되지 않아 연애를 시작했다. 연애라고 규정짓기 모호했지만 느낌으론 명확했다. 처음부터 알았다. 그가 나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동물처럼 맞고 자랐던 나는 본능처럼 금세 깨닫곤 했다. 누가 나를 좋아하는지, 누가 나를 싫어하는지. 내게 이끌리는 이들 중 내 마음을 건드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내 가까이 좀 더 빠르게 이끌고 싶었다. 여유롭게 다가갔으면 좋았으련만, 당시의 나는 많이 서툴렀다. 쉽게 화를 냈고 발을 굴렀고 섣불리 종말을 예고했다. 엉망진창의 연애였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거침없이 굴러갔다. 둘 모두가 상처투성이가 되는 연애였지만, 삶을 뒤흔들고 존재를 뒤바꾸는 일이기도 했다. 강렬함에 중독되면 돌아갈 길이 없다는 걸 그때 알았다.


철 없었던 스무살의 연애

물론, 나이가 들어 삶 자체를 지탱하는 에너지가 터무니없이 줄어들면 우리는 다른 방식의 사랑을 찾아낸다. 중독은 남았으되 포기가 빨라지기도 한다. 보다 현실적인 기준으로 연애의 대상을 찾고 소소한 즐거움에 집중하기도 한다. 그러나 스무 살에는 스무 살의 연애가 있었다. 철없는 아이처럼, 자신이 누군가의 기쁨이 될 수 있음에 너무 쉽게 기뻐하는 그런 연애가 있었다.

나의 첫 애인은 매우 바빴다. 학생 운동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살아가는 사람이었고 우리의 만남은 한동안 비밀이었다. 그는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괴로워했다. 1학년 초부터 그가 동기를 비롯해 선배들에게 특정 후배를 편애하지 말라고 쏘아붙인 이후였다. 그럼에도 내게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그는 내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숨겨지는 게 아니니까. 마음은 그렇게 냄새를 풍기니까. 나는 후각이 발달한 짐승 같은 아이니까.

나는 그의 갈등을 보았고 그의 서성거림을 보았다. 그럴수록 무심하고 꾸준하게 그의 곁을 맴돌았다. 그는 사람들 몰래 내게 집에 데려다주겠다는 제안을 하기 시작했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중간에 내려 서점에 간다거나 간단한 식사를 하면서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을 늘려갔다. 나를 집에 데려다 주고 가면 마땅한 교통편이 없어서 그는 버스를 세 번 갈아타거나 한두 시간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가까운 거리를 핑계로 우리가 함께 가는 일이 대수롭지 않은 듯 굴었다.

어느 봄날의 밤이었다. 저녁노을이 내려앉고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 그날도 우리는 몰래 함께 집으로 돌아가기로 약속한 터였다. 하지만 그에게 급한 일이 생겼다. 갑자기 잡힌 회의 때문에 학교에 좀 더 남아있어야 한다고 했다. 중앙도서관 앞에서 나를 달래는 그에게 나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약속했잖아. 맘대로 어기는 게 어딨어? 같이 집에 가기로 했으니까 집에 같이 가.”

그는 자꾸만, “다음에, 다음에”라는 말로 나를 구슬리려고 했다. 나에겐 하지만, 다음이란 건 없었다. 언제나 지금이 모조리 마지막 같았다.

그는 나를 두고 떠났다. 어둡고 커다란 도서관 건물 앞에 우두커니 서서 씩씩대는 나를 보는 시선이 하나 있었다. 그제야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K가 서 있었다.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뭘 봐? 이게 재밌어?”

그는 정말로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비실비실 웃고 있었다. 나는 더 화가 났다. 그래서 그에게 말했다.

“영화 보여줘.”
“그래.”

우리는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내가 보고 싶었던 영화는 이미 매진된 뒤였다. 난 너무 화가 나서 금세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았는데, 그가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봐.”

그는 잠시 후 표 두 장을 흔들며, 다시 비실비실 웃으면서 내게로 다가왔다. 암표상에게서 두 배 값을 치르고 표를 구했다고 했다. 돈을 함부로 날린 그에게 또 화를 냈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이 거품이 뿜어나듯 몽글몽글해졌다.

영화를 보는 도중 기분이 이상해서 옆을 쳐다보니, K는 영화를 보는 대신 나를 보고 있었다. 다시 투덜댔다. “뭘 봐?”

그는 조용히 웃기만 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는 길에 그가 말했다. 그는 시골집을 떠나 학교 근처 친척 집에서 기거하는 중이었다.

“집에 들어가서 이모를 보면 말이야.”
“응.”
“네 생각이 나.”
“왜? 나랑 닮았어?”
“잘 모르겠어. 근데 네가 떠올라.”
“무슨 그런 바보 같은 말이 다 있어?”
“근데 이상하게도, 너를 보면 이모 생각이 나진 않아.”
“뭐야, 그게? 실없긴.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왜 해?”

여름이 오기 전, 아직은 대기에 서늘함이 남아있던 봄밤이었다. 공기는 조금 축축했고 바람에서 꽃향기가 났다. 나는 끝까지 K의 마음을 모른 척했다. 넓은 교정을 몇 시간 뒤져서 나를 찾아내던 친구, 내가 난처한 상황에 놓여있을 때마다 신기하게 옆에 서 있던 친구, 공부한다고 도서관에 남아있으면 어느새 내 옆에 앉아 있던 친구, 술에 취해 쿨쿨 잠든 나를 아이처럼 안고 긴긴밤의 버스를 함께 달려가던 친구, 청춘을 다 마무리 못 하고 저 멀리 달아난 사람.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사랑

나는 명확하지 않은 말들을 견디지 못했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어떠한 행동도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없다 여겼다. 첫사랑이 첫사랑이 된 건, 그가 명확히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랑이 사랑이 되지 못한 건 모호한 말들로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몸과 마음으론 뚜렷이 전해진다고 해도 선언되지 못하면 사랑은 형체를 이루지 못한 채 스러졌다. 사랑을 담지 못하고 언저리를 맴도는 모호한 말들은 봄밤의 향기처럼 흩어지듯 사라졌다. 마음으로 알아도 말로 담지 못하면 마음도 흩어졌다. 하지만 이제는 궁금하다. 말하지 못한 사랑도 조금은 사랑이었을까. 말이 되지 못한 사랑의 평행 우주가 있다면 그곳은 눈물이 아니라 봄밤의 쨍한 향기로 팽창해 있겠지. 터질 듯 터질 듯 부풀어 올라 있겠지.


▒ 이서희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영화학교 ESEC 졸업, 파리3대학 영화과 석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