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
영업 시간 일·월요일 10:00~22:00, 화~토요일 10:00~23:00
대표 메뉴 목욕탕 바가지에 담겨 나오는 각종 음료들

황금콩밭
영업 시간 평일 11:30~21:30, 주말 11:30~21:00, 공휴일 휴무
대표 메뉴 매일매일 직접 만드는 부드러운 생두부

은성순대국
영업 시간 11:00~21:00, 월·화요일 휴무
대표 메뉴 돼지국밥에 가까운 구수한 순댓국

테라스
영업 시간 월~토요일 15:00~04:00, 일요일 13:00~04:00
대표 메뉴 마요네즈 듬뿍 넣은 옛날식 사라다와 돈가스


목욕 후 바나나우유 한 잔 ‘행화탕’

언젠가부터 대중목욕탕에 가지 않았다. 사춘기를 앓으면서, 자질구레한 목욕용품을 속이 훤히 보이는 플라스틱 바구니에 들고 나다니는 게 어찌나 부끄럽던지. 어디 그것뿐인가. 목욕탕을 오가면서 동네 사람들과 점점 안면은 쌓이고, 그들과 온‧냉수를 공유하며 때를 불리고, 기괴한 자세로 열렬히 때를 민다는 것이 내게 점점 불편한 일이 돼버렸다. 하지만 그립다. 때를 실컷 밀어 뽀얘진 살갗에 우유와 베이비오일로 마사지하고 물기를 털고 나와 탈의실 냉장고에서 빼 먹는 그것, 바나나우유 때문이다.

애오개역에서 2분 거리, 1958년 태생의 대중목욕탕 ‘행화탕’이 있다. 2000년대 찜질방이 유행하면서 자연스레 손님이 줄고, 아현동 일대 재개발로 인한 철거가 시작되면서 원주민이 떠나게 돼 2008년 즈음 폐업했다. 이후 고물상이나 창고로 쓰였지만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2년 전, 용도를 잃은 행화탕은 카페와 전시 공간으로 개조해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본래 용도는 변했지만 의미는 여전하다. 문화예술 콘텐츠로 몸을 씻어내고, 커피나 음료를 마시며 대화를 나눈다. 그때나 지금이나 주변 사람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빨간 벽돌을 쌓아 올린 골격, 남탕과 여탕의 서로 다른 타일, 보일러실 등의 옛 흔적이 훼손 없이 남아있어 마치 유적지에 온 것만 같다. 팔고 있는 음료 이름도 하나같이 목욕탕스럽다. 생크림 인형이 커피에 몸을 담근 ‘반신욕라떼’의 잔망스러움에 웃음이 터진다. 그 맛을 그대로 재현한 ‘바나나탕 우유’는 부끄러움이 많던 그때로 회귀시킨다. 노란 달콤함에 얼굴이 발그레 달아 오른다.


매일 직접 만드는 ‘황금콩밭’의 두부. 사진 김하늘
매일 직접 만드는 ‘황금콩밭’의 두부. 사진 김하늘

흠 잡을 데 없는 두부 ‘황금콩밭’

복잡다단해진 마음을 게우지 않고 꿀꺽 삼키고 싶을 때, 어슷어슷 흐트러진 마음을 조용히 정리하고 싶을 때, 난 두부를 먹는다. 두부를 닮고 싶기 때문이다. 티 없이 깨끗한, 순수함과 네모 반듯한 단정함, 담백한 맛이 나는 그 정직함이 좋다. 두부가 혹시나, 아주 혹시나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말한다면 난 별 의심 없이 믿을 것이다.

아현동 ‘황금콩밭’에 갔다. 이곳은 매일 새벽 두부를 만든다. 그러니 이 집에 가면 반드시 생두부를 먹어야 한다. 물론 생두부를 기름에 부친 두부전도 좋다. 생두부를 건너 뛰고 두부전을 먼저 맛보면 들기름에 부쳤나 싶을 정도로 그 견실한 고소함에 놀란다. 기름 따위가 침범해도 덮이지 않는 두부의 청렴결백함에 놀란다. “생두부는 자르지 말고 주셔요.” 절단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듯 주문한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통 두부가 상에 오른다. 숟가락으로 자르면 그 곧은 선이 망가지니 젓가락을 곧고 깊게 넣어 단정하게 떼어 먹는다. 두부는 묵 따위처럼 허둥지둥 젓가락 사이를 빠져나가지 않는다. 그 점잖은 자태로 보나 정묘(淨妙)한 맛으로 보나 도통 흠 잡을 데가 없다. 굳이 간장이나 김치를 더할 필요도 없다. 노란 황금콩밭이 펼쳐지는 듯한 호사스러운 고소함이면 다른 것이 없어도 충분하다.


‘은성순대국’의 부드러운 머리 고기와 간. 사진 김하늘
‘은성순대국’의 부드러운 머리 고기와 간. 사진 김하늘

부드러운 간을 위해 ‘은성순대국’

아현시장. 두꺼운 녹두전이 철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며 고소한 기름내를, 가을에 물든 탐스러운 과일들이 단내를 풍긴다. 허기를 부추기는 온갖 냄새를 다 뒤로 하고 걷다 보면 시장 중간쯤, 허름한 순댓국집이 두 곳 보인다. 각각 빨간 간판과 파란 간판을 내걸었는데 빨간 집은 배달만 한다. 파란 집은 만석이다 못해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있다. 기다리던 손님이 가버릴까, 사장이 나와 ‘조금만 더 기다리면 앉을 수 있다’고 희망고문을 한다.

‘은성순대국’. 이 집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9시까지 영업하고, 일요일과 월요일은 휴무다. 여행을 가느라 40일가량 문을 닫기도 하는, 유별난 곳이다. 쉼 모르고 장사만 해온 사장님과 여행전문가가 만나 부부가 되면서부터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운영을 하게 됐다. 주인의 허허실실 농담에 가게 안은 손님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들을 웃음 짓게 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돼지국밥에 가까운 구수한 순댓국은 물론, 야들하고 부드러운 찐 간이다. 지우개처럼 질기고 퍽퍽한 간이 아니다. 손님의 마음을 유쾌하게 주무르는 주인의 농담처럼, 신선하고 촉촉하고 포근하다. 남의 간을 예찬하다 소주 한 병 추가한다. 어쨌든 위하여!


샐러드 아닌 사라다 ‘테라스’

“테라스로 와라.” 거나하게 취한 그가 문자를 보내왔다. 어디에서 와인이라도 마시고 있나 싶었지만, 지도를 따라 찾아간 그곳은 영락없는 ‘호프집’이다. 높고 좁은 계단을 올라 들어간 어두컴컴한 가게 안은 그야말로 문화유산이다. 칸막이와 단으로 나뉜 구획, 레자로 감싼 소파와 원형 테이블, 유리박스 속 모형 타이타닉호, 좁다란 흡연실. 그리고 그것들을 감싼 옛것의 무늬들이 추억이 밴 기억 세포를 건드린다.

테이블 위에는 맨 김과 양념간장, 당근꽃 장식과 소스가 질펀하게 올라간 돈가스, 그리고 소주 두 병이 놓여있다. 스카치블루 로고가 새겨진 유리잔에 물을 따라 마시고 메뉴판을 펼치니 역사의 소용돌이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다. 커피부터 우유, 인삼차, 체리차 등의 드링크 메뉴와 돈가스, 함박스테이크, 비프스테이크, 폭찹, 생률, 게 찌개, 소시지 야채볶음 등 다방에서나 볼 수 있는 음료와 1980~1990년대 경양식 호프집 음식들이 즐비하다. 그가 말한다. “내가 이미 시켜놨더.”

승마바지라도 맞춰 입어야 할 것 같은 서양식 조끼를 입은 매니저가 음식을 내온다. 양배추, 햄, 사과, 당근, 오이채가 마요네즈에 듬뿍 버무려진 샐러드 위에 땅콩과 건포도·방울토마토가 있고, 가는 채로 달걀 노른자를 문대 만든 ‘노른자눈’이 화룡점정을 이뤘다. 그 맛을 말해 뭐 할까. 마요네즈로 범벅된 샐러드 한 입이 목구멍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순간, 시간과 시간 사이 구석구석 박혀 있던 그때의 ‘에버그린한’ 노스텔지어들을 소환해낸다.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이순신 장군처럼 그는 이 한마디를 남기고 장렬히 전사했다. “이건 샐러드가 아니야. 사라다야.”


▒ 김하늘
외식 컨설팅 회사 ‘브랜드테일러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