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우산을 같이 쓰는 것 만큼 아늑한 것도 없다.
비오는 날 우산을 같이 쓰는 것 만큼 아늑한 것도 없다.

1.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소리가 있다면, 내게는 빗소리가 그렇다. 기억이 닿는 순간부터 빗소리는 나를 머리부터 바닥까지 샅샅이, 세포 구석구석까지 행복하게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우산을 들고 다니는 날보다 비를 맞고 다니는 날이 더 많았다. 수업이 끝날 무렵 교실 창밖으로 쏟아지는 비는 나를 대책 없이 설레게 했다. 비를 쫄딱 맞고 거리를 다니다가 집에 돌아와서, 미끈거리는 발로 마루를 지난 뒤 마른 수건으로 몸을 말리고 뜨끈한 아랫목에 안기는 기분은 기가 막혔다. 달콤하게 녹아내려가듯, 파도에 쓸려가듯 몰려오는 졸음에 빠지는 것도 좋았다. 그럴 때면 세상은 거대하지만, 아늑하고 넉넉하고 기분 좋은 것으로 가득한 느낌이었다. 잠은 빠져들어도 언젠가는 나를 돌려 보내준다는 점에서 안전했다. 푹 담갔다가 빠져나온 잠만큼 개운한 건 없었다. 비 또한 그랬다. 비에 온통 젖어도, 온몸에 소름이 돋고 지나가도, 때로 호된 몸살처럼 앓고 난 뒤에도, 가뿐함이 선물처럼 남았다. 때로는 허허로움이기도 했는데, 그마저도 마지막은 다정했다. 돌아갈 집이 있고 나를 맞이하는 아늑한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에 들어가 첫사랑을 할 때는, 내게 사랑에 빠졌다고 소리치며 달려가던 청년이 지나간 자리에 밤새 비가 내렸다. 빗소리를 들으며 그를 생각했고 오래 내린 시간만큼 더 깊이 사랑에 빠졌다. 인생 처음으로 남자를 유혹한 날도 비가 쏟아붓는 날이었다. 이후로도 마음이 속절없이 흘러가버릴 것 같은 날, 대기가 버석거리면 빗소리를 찾아서라도 들어야 했다. 답답하던 마음도 비의 촉촉함을 입으면 부드럽게 흘러갔다.

30대를 맞아 시작한 미국 생활에서는 예전만큼 자주 비를 맞이하지 못했다. 대신 빗소리를 찾아 듣는 날이 많아졌다. 빗소리를 틀어놓고 바싹 마른 도시를 달리곤 했다. 차에 함께 오른 두 딸도 즐겨 들었다. “엄마, 빗소리가 좋아요. 기분이 편안해지면서 가슴이 기분 좋게 뛰어요.” “그래, 정말 그렇단다. 빗소리는 경쾌하게 톡톡, 툭툭, 세상을, 우리를 두들기고 뛰어오르게 하지. 나도, 세상도, 온통 튀고 또 튀어 오르다 전부 다 깡충대며 춤을 추는 것 같지.” 그러고 보니, 내가 사랑에 빠진 사람도, 장소도 모두, 내게 온통 젖은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구나. 너희들 역시 온통 젖은 채로 내 곁에 도착했단다. 엄마의 물속을 떠돌다 엄마의 물과 함께 도착한 아이들아.


2. 지난여름, 세상을 부술 기세로 내리는 비를 뚫고 그를 만났다. 근처에 약속이 있던 나를 그는 지하철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퇴근길 인파를 헤치며 내게로 걸어오는 남자의 얼굴을 봤다. 언제 봐도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얼굴. 내가 좋아하는 얼굴. 지하철에 올라서는 일부러 그의 뒤에 섰다. 그의 등에 가만히 코를 묻고 익숙한 냄새에 푹 젖어 들었다. 비에 젖은 등에선 온기와 함께 그의 체취가 더 환히 피어올랐다.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말을 걸기도 했다. 빗방울처럼 잔잔히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비 오는 날의 지하철역은 어둡게 미끈거렸다. 서늘함도 무게를 입었다. 밖으로 걸어 나와 함께 우산을 쓰고 걸었다. 자꾸 내 쪽으로 우산을 기울이는 남자의 등이 또 젖었다. 그를 볼 때면 나는 그의 소년을 본다. 어른을 본다. 듬직하다가도 서글퍼서 온통 알 수 없어지는데, 그게 두렵지 않다. 안전하다. 나는 수많은 그 속에서 안전감을 느낀다. 그 모든 그들이 나를 사랑함을 느낀다. 이렇게 폭우가 쏟아지는 날, 너를 만나고 싶었어. 네게 안기고 싶었어. 언젠가 네가 말했지. 비 오는 날 둘이 얇은 이불 하나 덮고 마주 보며 누워있고 싶다고. 비 오는 날의 세상은 그런데, 이미 얇은 이불 하나를 덮은 것만 같아. 대기가 미끌미끌 이불 같은 막을 두른 것 같아. 그 속에 있으면 우리는 비로소 단둘이 된 것 같아. 세상에 우리 둘, 너와 나, 당신과 나, 우리, 바로 우리. 그런데 우리는 알고 보니 단둘이 아니야. 소년인 너, 소녀인 나, 어제의 너, 어제의 나, 내일의 너, 내일의 나까지, 숱한 너와 내가 바글바글 빗방울처럼 모였다 풀어졌다 뭉쳐지고 흩어져서 어우러져. 우산 밑에서 그중 하나일 네 몸에 기대고 손을 잡고 깍지를 끼고 팔짱을 조였다 풀었다 하면서 어둡지만 시간을 헤아릴 수 없는 비 내리는 하늘 밑을 걸어. 쏟아지는 비는 시간을 지워. 세상을 지웠다가 알록달록 다시 깨워. 연인에게는 완벽한 고립을 선사해. 어디에 있든, 복잡한 인파 속에서도 둘만 있다고 느끼게 해. 우산 밑은 아늑해. 커다란 네가 있는데 좁아지지 않는 우산 밑은 참 신기해.


3. 그의 수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은 처음부터 일관됐던,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 덕분이었다. 지난여름 나는 상담 치료를 시작했다. 상담이 끝난 후면 너무 울어서 온몸에 힘이 없었다. 바로 집에 가지 못하고 건물 1층에 앉아 있다가 돌아가곤 했다. 마지막 두 세션은 상담을 받는 동안 그가 나를 기다렸다. 두 날 모두 폭우가 쏟아졌다. 그가 나를 기다려 주면 혼자 울지 않고 돌아갈 수 있어 좋았다. 적어도 그를 만나면 기분이 좋아졌으니까. 그래도 결국은 이야기 나누다 울곤 했는데, 그는 별말 없이 열심히 내 이야기를 들어줬다. 많은 말을 하지 않는 게 답답하기도 했지만, 그의 눈빛을 보면 얼마나 온 마음을 다해 귀기울이는지 헤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나를 집으로 고이 돌려보냈다.

평소엔 만날 때마다 잠자리를 함께하는 사람이라 조금 당황하기도 했고 조금 홀가분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남자는, 내가 어쩌다 우울해하면, 위로의 말을 남기고 따사로이 안아주다가 잠자리를 시도하고는 했다. 나의 슬픔이 그들의 성적 흥분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즐겁지 않았다. 그는 달랐다. 둘 다 술에 흠뻑 취했을 때조차도, 자신의 욕구만으로 관계를 시작한 적이 없었다. 나의 감정과 나의 욕구가 온전히 존중받는다는 기분이야말로 내게는 커다란 안전감의 원천이 됐다. 잠자리하면서도, 약간의 과시라든가 우쭐댐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나의 감각, 느낌, 불편함, 기쁨을 사소한 곳에서부터 배려하고 챙기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불안에 떨거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사랑하면 하게 될수록 사랑의 행위에도 그 깊이와 마음이 더더욱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4. 요새 부쩍 생각하는 감각은 안전함의 감각이다. 안전함이란 난공불락의 요새를 얻는다고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 성숙한 인간은 안다. 존재는 항시 불안하다. 안전감은 불안하기에 소중하다. 안전감은 당연히 찾아오지 않는다. 화롯가의 따뜻한 온기처럼, 적절한 거리와 땔감과 공기와 꾸준한 불쏘시개질이 있어야 한다. 안전감은 일상의 다정함에서 온다. 존재의 다정함, 배려를 품은 다정함, 헤아리는 다정함, 상대의 품위도 나의 품위도 살리는 다정함, 내 곁을 기꺼이 내어주고자 하는 다정함 말이다. 비 오는 날 우산 속을 사이좋게 나누는 아늑함처럼 말이다. 슬픔을 슬픔으로, 기쁨을 기쁨으로 품어주는 넉넉함도 함께.


▒ 이서희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영화학교 ESEC 졸업, 파리3대학 영화과 석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