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연건동 28-2번지 경모궁지. 서울대병원 안에 있다. 사진 문화재청
서울 종로구 연건동 28-2번지 경모궁지. 서울대병원 안에 있다. 사진 문화재청

앞선 연재에서 설명했다시피, 한양 동부(혜화동 일대)의 장소성과 역사성은 시기가 지남에 따라 급변했다. 조선 초·중기 성균관 주변 성균관 역을 수행하던 노비들의 집단 주거지 ‘반촌(泮村)’ 정도가 사람들이 모여 살던 지역이었다. 조선 중기 이후, 반인(泮人)의 경제 활동이 왕성해지면서, 반촌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조대에 이르러서는 현재의 서울대학교병원 자리에 경모궁이 조성되면서 또 다른 전기가 마련됐다.

경모궁(景慕宮)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사당으로, 본래 한양 북부 순화방(順化坊) 소재 사도묘(思悼廟)를 1764년(영조 40) 동부 숭교방(崇敎坊)으로 이전한 것이다. 수은묘(垂恩廟)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776년 정조 즉위 후 경모궁으로 승격됐다.

정조는 승격 과정에 주변 지역을 정비함으로써 경모궁의 위상을 높이려고 했다. 지리적·지형적·정치적 요인으로 인해 반촌을 제외하곤 빈집이 많았기에, 정조는 황량한 경모궁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경모궁 개건(改建)에 맞춰 민가를 조성하고자 해당 지역에 모민(募民)정책을 폈다.

“경모궁 문밖은 지세(地勢)가 널찍하게 비어 있는데 민가가 하나도 없어 보기에 매우 황량하기 때문에 (중략) 만일 인가를 많이 모집하여 좌우로 취락을 이룰 수 있다면, 평상시에도 보기 좋을 뿐만 아니라 동가(動駕)하거나 친향(親餉)할 때 제관(祭官)과 진배관(進排官)이 머무르며 묵을 수 있는 장소가 될 만하니, 또한 어찌 편하고 좋지 않겠는가.” (일성록 정조 5년, 1781년 12월 11일)

정조는 민가가 형성되지 않은 황량한 지역에 사람들이 모여 살게 하기 위해서는 거주 인센티브가 제공돼야 한다고 여겼다. 경모궁 모민층은 경모궁 관련 부역(負役) 의무를 수행해야 했기에, 인센티브가 없다면 사람들이 굳이 모이지 않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이에 정조는 모민층에게 상당한 특혜를 제공했다. 여객주인권(旅客主人權)이라는 특혜인데, 여객주인은 여점(旅店)이라는 일종의 (도매)상점을 개설할 수 있었고, 여객주인권이라는 권리를 통해 상품 매매 중개와 거래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는 시장 개설 등에 대해 국가의 간섭이 심했기 때문에 상품 거래와 관련한 권한을 부여한 것은 상당한 경제적 이권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특히 시전(市廛)이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상품을 판매하는 데 반해, 여점은 상인들에게 상품을 판매하는 도매상이었다. 일반적으로 도매상은 취급하는 상품의 규모(물량)가 소매상에 비해 크고 중간 마진이 발생하기 때문에 도매상 개설 및 운영 권한(여객주인권) 부여는 엄청난 경제적 혜택이었다.

경모궁 모민정책을 실시한 1780년대는 한양이 상업도시로 번성해가는 시기로, 사상(私商)의 난전(亂廛) 활동이 활발하던 때였다. 여객주인은 특정 지역에서 들어오는 상품의 독점권을 갖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이들은 상품 가격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었다. 자신들이 중개권한을 행사하면서 가격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엄청난 유통 마진을 챙길 수 있었다.

이러한 강력한 권한으로 인한 경제적 이익 규모는 여객주인권 거래 가격 추이로 엿볼 수 있다(한양 동부지역의 여객주인권 매매 가격은 직접적으로 알 수 없다).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중엽까지 경기도 김포지역 여객주인권 거래 가격은 100배가 상승했다고 한다.

여객주인권을 획득한 모민층은 동부지역 곳곳 특히, 명륜4가와 연건동 일대에 여점을 설치했다. 해당 지역에 도매상권이 형성되자, 상업행위에 능했던 반인촌의 일부 반인들이 모민층 거주지역으로 이주하면서 현방(懸房·반인이 운영하던 쇠고기 판매점포)을 개설하기도 했다.


경모궁(景慕宮)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이다. 정조는 즉위 이후 주변 지역을 정비함으로써 경모궁의 위상을 높이려고 했다. 현재 경모궁 자리에는 함춘문(사진·含春門)과 석단(石壇)이 남아 있다.
경모궁(景慕宮)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이다. 정조는 즉위 이후 주변 지역을 정비함으로써 경모궁의 위상을 높이려고 했다. 현재 경모궁 자리에는 함춘문(사진·含春門)과 석단(石壇)이 남아 있다.

현재의 광장시장으로 이어져

20세기 이전 혜화동 일대의 특징을 요약하면 상업도시화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조선 초기부터 반인층이 쇠고기 판매 독점 권한을 갖고 있는 상인계층으로 성장했다. 중기 이후에는 자체 노비를 거느리기도 한 자본계층으로 커졌다. 경모궁 모민층 역시 여객주인권이라는 엄청난 특혜를 바탕으로 유통 중간단계를 장악하며 가격을 결정하는 강력한 (도매)상인계층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경모궁 주변에 도매상(여점)과 소매상(현방)을 설치했고, 이는 한양 동부지역 상업도시화의 한 단면이었다. 상품이 오가는 동대문 및 혜화문과의 근접성과 상업계층 공간이라는 특징은 육의전 및 칠패시장과 더불어 조선 3대 시장이라 불리는 이현시장의 출현과 성장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더 나아가 동대문 시장의 모태라 할 광장시장으로 연결된다.


▒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저서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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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인(泮人)·반촌(泮村) 성균관의 잡다한 일을 하기 위한 노비들이 필요했는데, 이들을 반인(泮人)이라고 불렀다. 반인들은 성균관 주변에 집단으로 거주했고, 이들이 거주하는 마을을 반촌(泮村)이라고 했다. 성균관 유생은 성균관에서 허가하지 않은 여가생활을 반촌에서 즐길 수 있었고, 성균관에서 기숙하지 않는 경우 반촌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또 반촌은 지방에서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 상경한 이들을 위한 임시 거처로도 활용됐다. 반인은 노비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성균관에서 일한다는 중요성을 인정받아 조정(朝廷)으로부터 상당한 특권을 부여받았다.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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