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내한할 예정이었다가 오지 못한 유리 테미르카노프와(왼쪽부터)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를 대신해 내한공연 지휘를 대체할 주빈 메타.
11월 내한할 예정이었다가 오지 못한 유리 테미르카노프와(왼쪽부터)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를 대신해 내한공연 지휘를 대체할 주빈 메타.

11월 내한이 예정된 두 명의 거장 지휘자들이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지 못했다. 지난 3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공연의 지휘자는 감독 유리 테미르카노프에서 샤를 뒤투아로 바뀌었다. 29~30일 예술의전당 공연이 예정된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은 감독 마리스 얀손스 대신 주빈 메타를 기용한다.

테미르카노프는 가족상(喪), 얀손스는 본인의 건강 악화가 서울행을 포기한 사유로 외부에 알려졌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필의 나머지 아시아 투어는 뒤투아와 니콜라이 세예프가 대신하기로 결정됐다. 메타는 2009년 빈 필 내한을 이끌기로 했지만 본인의 건강을 이유로 투간 소히예프가 대체했고 이번엔 얀손스의 유고를 자신이 대신한다.

테미르카노프가 한국과 돈독한 관계가 된 것도 대체 지휘를 통해서다. 2001년 런던 필 지휘자 쿠르트 마주어가 첫날 공연을 마치고 심장 질환으로 나머지 공연을 포기한 상태에서 예술의전당은 자정쯤 일본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필 투어 중인 테미르카노프에게 연락해 대체 허락을 받았다. 그는 이튿날 아침 한국행 비행기로 건너와 저녁에 사라 장과 협연을 마쳤다.

유럽에 적을 둔 고령 지휘자가 아시아 투어를 나가면 오케스트라와 투어 매니지먼트는 마에스트로의 건강 상태를 쉼 없이 체크한다. 2013년 런던 심포니와 한국에 온 베르나르트 하이팅크는 아예 리허설 가이드 겸 만일을 대비할 조수 지휘자 다비트 아프캄(현 스페인 국립교향악단 예술감독)을 대동했다. 심장 마비를 겪기도 한 얀손스의 일본 투어 때는 홀 밖에 앰뷸런스가 대기하기도 하고, 한국에선 예술의전당에서 최단시간 이동할 종합병원의 위치가 가톨릭 성모병원임을 미리 확인한다. 투어에 동반하는 팀닥터가 지휘자의 건강을 챙기기도 하지만 대개 시차 적응이 쉽지 않고, 대기질이 좋지 않은 곳을 다녀오면 후유증이 상당하다.

다중 이용시설인 대부분의 국내 공연장에는 자동 제세동기가 설치돼 정기적인 운용 훈련을 한다. 대구시향 음악감독 율리안 코바체프와 전 예술의전당 사장인 피아니스트 김용배는 심장 질환으로 무대에서 쓰러졌지만 다행히 관객 중에 소방관과 의료 인력이 있었고, 자동 제세동기의 적절한 사용으로 생명을 구했다. 반면 저명한 지휘자 주세페 시노폴리는 베를린에서 리허설 중에 심장 마비를 겪었지만 제때 치료 받지 못해 사망했다.

투어를 유치한 로컬 프로모터 측에선 지휘자나 연주자가 아프거나 신상 문제로 투어에 참가하지 못할 경우, 미리 계약된 금액 안에서 섭외가 가능한 거장급을 대체 연주자로 세우는 게 절실하다. 뒤투아는 자신이 거친 오케스트라에서 최근 성추행 관련 이슈가 집중적으로 제기됐지만 대체 지휘자로 한국에 왔다. 국내 프로모터 입장에선 테미르카노프를 대신할 음악적 명성을 쉽게 포기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오케스트라 투어 중 대체 연주자를 섭외할 의무는 기본적으로 투어 매니지먼트 회사가 책임진다. 대체 연주가 가능한 후보를 올리고, 연주자의 개별 스케줄을 각각의 에이전시를 통해 확인한다. 그러나 각 후보가 프로모터의 입맛에 맞는지는 일일이 확인해주지 않는다. 성사 작업까지 사공이 많아지는 것을 줄이려는 의도다.

엄밀한 역할 배분에서 2001년 런던 필하모닉 내한 공연의 지휘자 마주어의 대타도 한국 공연의 프리젠터인 예술의전당이 아니라, 투어 매니지먼트가 주도적으로 알아봐야 했다. 런던 필은 자정에 대체를 구한 예술의전당 실력을 공개적으로 칭송했지만, 정작 본인들이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걸 은폐하는 액션이기도 했다. 공기관이 아닌 민간 기획사가 대타를 찾았더라도 새벽에 오사카 총영사관에 전화를 걸어 급행 공연 비자의 협조를 이뤄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체 연주자가 스타덤에 오르기도

대체 연주자를 금전으로 대우하는 기준은 천차만별이다. 공연 성사가 촌각을 다투는 상황을 이용해 아티스트의 매니지먼트가 1.5배가량의 급행료를 부르고 성사되는 경우도 있고, 부상 연주자와의 인연으로 같은 가격에 해결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다수 신인 연주자의 경우, 연주료와 관계없이 명문 악단과 지휘자를 만나는 기회로 대체 공연을 활용하고자 한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런던 필과 제대로 만난 것도 이츠하크 펄먼의 취소 덕분이었고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베를린 필과 협연한 것도 랑랑이 부상으로 낙마한 연주회였다.

컨디션에 따라 퍼포먼스가 완전히 달라지는 성악 세계에서 대체 연주자가 스타덤에 오른 사례는 부지기수다. 파바로티는 주세페 디 스테파노를 대신해 로열 오페라 공연에 올랐고, 프랑코 코렐리의 뉴욕 메트 공연 취소가 도밍고에겐 천재일우였다. 지금도 수많은 청년 성악도들이 오페라극장에서 주역의 낙마를 대비하고 있다.

반면에 대체 연주로 오른 연주자가 형편없으면 악단이나 지휘자, 현지 관객과 다시 만나기란 매우 어렵다. 영국은 낮은 개런티에도 불구하고 대체 연주 인력이 풍부한 곳인데, 굳이 한 번 실패한 연주자를 정기 연주회에 다시 들이는 모험을 시도할 필요는 없다.

역으로 도저히 대체 연주자를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음악가는 한 단계 높은 대우를 받는다. 런던 심포니 더블베이스 주자였던 마이클 프랜시스는 오직 발레리 게르기예프만이 가능할 법한 공연이 무산되자, 이벤트 자체가 취소될 위기에 포디움에 올라 런던 심포니의 스타가 됐고 플로리다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에 임명됐다.

보다 극적인 상황은 올여름 런던의 로열 오페라에서 벌어졌다. 7월 오페라 ‘라보엠’ 공연 중에 로돌포 역을 맡은 테너 아탈라 아이언의 목소리가 심각하게 갈라졌다. 중간 휴식 시간에도 대체자가 없어서 공연이 중간 취소될 위기였지만, 객석에 대타가 있었다.

공연을 보러온 테너 찰스 카스트로노보는 한 해 전 헝가리 국립오페라에서 로돌포를 연기했던 적이 있었다. 그는 로열 오페라의 긴급 상황을 듣고, 무대에 올랐다. 아이언은 연기하고 카스트로노보가 무대 옆에서 로돌포의 분량을 불러 공연을 살렸다. 로열 오페라는 2019년 1월 라 트라비아타 제르몽 역으로 카스트로노보를 캐스팅했다.


▒ 한정호
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