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가 여섯 살 때였다. 아이 친구의 생일 파티에 가기 전 케이크를 사기 위해 잠시 차를 주차하고 근처 상점가로 걸어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차에서 내리려는데, 아이는 능청스럽게 잠을 자는 척했다. 손을 잡고 내리는 와중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눈을 꼭 감은 채, 내 손에 매달려서 다른 손은 앞으로 휘휘 내저으며 걸어가는 아이를 보자 불현듯 내 어린 날의 특별한 놀이가 떠올랐다.
나는 눈을 감고 길을 걷기를 좋아했다. 눈을 감는 순간 세상은 새로운 감각으로 살아 올랐다. 대기를 가르는 손을 따라 그려지는 세상 속으로 발걸음을 아슬아슬하게 밀어넣곤 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가끔씩, 한적한 길이나 적막한 공간에 서면 눈을 감고 걸음을 옮겨보곤 한다. 사랑하는 이가 생기면 의식처럼 눈을 감고 그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연인의 얼굴은 낯설게 변했다가 이전의 친숙함과 만나서 손끝에서 되살아나곤 했다. 경사가 가파른 코를 가진 이들을 줄곧 사랑했던 것은 어쩌면 그들이 가져다주는 촉감 놀이의 아찔함에 더 깊이 빠져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코에 대한 집착 역시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아버지의 옆모습을 훔쳐보는 아이였다. 그의 시선처럼 언제나 내게서는 비켜나가 있던 그의 코는 내 눈과 맞춰주지 않는 그의 눈과 달리 나를 소외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바라보지 않는 순간, 가장 아름다워 보였고 가장 당당해 보였다.
눈을 떳을 때 밀려드는 서글픔
이성을 사랑하게 되며 깨달은 가장 즐거운 유희는 코를 맞대는 일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나의 코로 그의 코를 느끼곤 했다. 때로는 입맞춤보다 코를 비비는 일이 더 은밀한 몸짓이 되기도 했다. 코와 코를 마주하고 두 호흡이 섞이고 얼굴은 춤을 추듯 가깝다 멀어지며 물결을 타곤 했다. 마침내 그리운 이를 만나면 구석구석 빠짐없이 눈으로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감촉으로만 더듬고 맡고 핥으며 느껴보기도 했다. 한 가지 감각을 극대화하기 위해 나머지 감각을 닫아버리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무너지듯 단 하나에 집중하고 존재를 걸어버리는 일은 도박처럼 위험하고도 짜릿한 사랑의 모험이었다.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이야기했다. “이제 눈을 감을 거야. 당신에게 내 운명을 걸었어. 손을 잡고 나와 걸어주겠어?” 나는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않고 그의 손을 잡고 긴 길을 걸었다. 나머지 한 손을 대기를 향해 휘휘 저어보지도 않은 채. 사랑이 낭만의 절벽을 타고 미끄러져 나가는 순간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아슬아슬함을, 내가 딛고 있는 땅의 단단함조차 끝없는 부드러움으로 꺼져나가는 듯한 찰나를 아낌없이 즐겼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반칙처럼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세상은 새로운 것으로 가득 찬 듯 내 앞에 쏟아졌다. 낯익음이 신비로움으로 탈바꿈하고 사물의 빛이 고유의 것으로 떠오르는 때, 순간의 착각일지라도 나를 들뜨게 했고 충만하게 했다. 이윽고 깨달은 것은 절벽에 한 걸음 못 미쳐서 눈을 떴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결코 눈을 감고 추락할 수 있는 인간은 될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서글픔과 살아남았다는 안도의 한숨으로 무너지듯 다리가 풀려갈 때,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영화 ‘쥘과 짐(Jules et Jim·1962)’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한 카트린의 야릇한 미소, 짐의 대답과 같은 응시 그리고 차를 몰고 바닥으로 추락하는 두 사람. 그들을 삼킨 깊은 강이 유유히 흐르고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쥘의 눈길이 관객의 시선과 함께 남아 있었다.
누벨 바그(1950년대 말~1960년대 초의 프랑스 영화 운동으로 소규모 영화 제작이 특징)의 기수였던 프랑소아 트뤼포의 세 번째 영화 ‘쥘과 짐’은 단순한 통속물로 떨어질 수 있는 사랑의 삼각관계를 절대성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린다. 옆으로 팽창해버린 와이드 스크린(기존의 표준 영화 화면의 가로세로 비율은 1.33 : 1이지만 이 영화는 2.35 : 1이다)에서 쥘과 짐 그리고 그들이 함께 사랑하는 여인 카트린은 걷고 달린다. 자전거를 타고 숲속 길을 배회하고 기차에 오른다. 기차는 선상을 달리고, 자동차는 경적을 울리며 사랑하는 이의 창밖을 돌다 두 연인을 싣고 추락한다.
가장 단순한 명제, 영화는 운동임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이 영화는 끊임없이 멈추고 이물질을 끌어들이고(중간중간 등장하는 뉴스 릴이라든가 정지된 이미지의 삽입 등이 그 예이다), 화면은 끊어지다 뛰어오르고(점프 컷이 자주 등장한다), 사랑과 삶의 절대성을 추구하는 한 여인의 얼굴은 클로즈 업된다. 영화 밖에서 끊임없이 개입하는 내레이터의 목소리는 영화 안의 내레이션과 만나 충돌하고 세 명의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방 창문을 열어 소통을 시도하고 만났다가 어긋나며, 사랑의 편지는 언제나 뒤늦게 도착한다.
무심하게 돌고 도는 삶
사랑과 소통의 절대성을, 순간의 충만함을 숭배하는 여인 카트린의 마지막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사랑하는 한 남자, 쥘을 관찰자 삼아 그의 시선 앞에서 또 다른 사랑인 짐을 자신이 탄 자동차에 실은 채 추락하는 것. 삶은 거대한 실종이며 그리고 그것은 남은 자의 기억, 혹은 기록이 없다면 완전한 소멸일 것이다.
아름다운 시대는 그렇게 지나갔다. 한 사람의 오스트리아 인(쥘)과 한 사람의 프랑스인(짐)이 만나서 서로의 언어를 가르쳐주며 평화로이 우정을 나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두 사람의 언어를 모두 아는 여인 카트린이 등장한다. 그녀는 고대 그리스 석상의 신비로운 미소를 닮은 절대성으로서의 연인이다. 여자는 두 남자를 사랑하고 또 두 남자는 한 여인을 사랑한다.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그들은 단절되지만, 그리움은 단절만큼 팽창한다. 사랑과 소통은 잡힐 수 없는 신기루처럼 그들 앞을 떠다닌다.
창문이 열리고 닫히고 기차가 선상을 달리고 세 사람이 만났다 헤어지는 모든 과정을 포괄하는 것은 ‘삶의 회오리(Le tourbillon de la vie·극 중 카트린이 부르는 노래의 제목)’다. 이 노래는 반복되는 음률로 삶과 만남의 돌고 도는 운동을 이야기한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길을 뛰어가고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위해 아득히 뻗어 나간 선상을 달리는 기차에 오른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추락한다 해도, 삶은 더 큰 몸짓으로 조금은 무심하게 돌고 돌 것이다. 아름다운 시절은 태풍의 눈이었을까. 기억이 남아서 떠돌고 있다면 그것은 떠난 자에게도 남은 자에게도 축복일까, 아닐까. 사랑의 기억은 돌고 돌아 모두에게 말을 건다. 아련한 노랫말처럼. 사랑의 기억은 그들만의 기억이 아닌 모두의 기억이 된다.
▒ 이서희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영화학교 ESEC 졸업, 파리3대학 영화과 석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