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뉴스’가 논란이 되는 시대, ‘제0호’는 가짜 뉴스를 만드는 과정을 그리며 풍자하고 있다.
‘가짜 뉴스’가 논란이 되는 시대, ‘제0호’는 가짜 뉴스를 만드는 과정을 그리며 풍자하고 있다.

제0호
움베르토 에코 지음|이세욱 옮김|열린책들
1만3800원|336쪽

움베르토 에코(1932~2016)가 타계하기 1년 전에 낸 마지막 소설 ‘제0호’ 한국어판이 최근 출간됐다. 에코는 기호학을 기반으로 인문학 전반에 걸쳐 사상의 향연을 벌인 학자였지만, 그의 글쓰기는 소설을 통해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가 1980년에 낸 첫 소설 ‘장미의 이름’은 지성과 예능이 결합된 문학의 지평을 열었다. 중세 수도원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다룬 ‘장미의 이름’은 중세의 역사와 철학, 종교, 미학을 넘나드는 지식의 세계를 펼치면서 추리 소설 형식으로 이성의 추론을 형상화한 이야기의 재미를 전 세계 독자들에게 안겨줬다.

소설 ‘제0호’ 역시 에코의 지식과 입심 덕분에 순식간에 읽힌다. 이상야릇한 소설 제목은 신문을 가리킨다. 창간호 이전에 제작되는 견본(見本) 신문이다. 정치적 야심을 지닌 재력가가 신문을 창간키로 하고 기존 언론에서 밀려난 삼류 기자들을 고용해 신문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다룬다. 하지만 그 신문은 인쇄되지도, 배포되지도 않기에 영원히 ‘제0호’로 남는다.

에코는 ‘가짜 뉴스’가 논란이 될 시대를 예견한 듯이 ‘뉴스가 신문을 만드는 게 아니라, 신문이 뉴스를 만든다’는 냉소를 담아 저널리즘의 폐해를 풍자적으로 비판했다. 에코가 쓴 소설들은 저마다 다른 문체와 형식을 지녔지만, 기본적으론 인류사에 영향을 미친 음모론의 구조를 탐구했다. 역사에서 되풀이되는 음모론이 실제로 현실에 작용하는 구조를 비판한 것이다. 거짓말이 버젓이 유포되고 진실을 압도해 역사적으로 비극을 만드는 과정과 거기에 놀아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려고 했다.

소설 ‘제0호’는 음모론을 생산하는 신문을 상상한다. 신문을 창간해 정치적 야심을 충족하려는 재력가는 이탈리아 총리를 지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를 절로 떠올리게 한다. 이 소설은 창간 준비호를 제작하는 기자들이 모여 편집회의에서 주고받는 이야기를 통해 언론과 권력의 관계를 조명한다. 이탈리아 현대사를 온갖 음모론으로 해석하고 그럴듯한 가설을 덧붙여 이야기를 부풀려간다.

이 소설은 대필 작가로 활동하던 한 지식인이 비밀리에 준비되는 신문 제작에 참여한 과정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 신문은 실제로 발행되지 않은 채 창간 준비만 하는 상황에서 사주(社主)가 정계와 재계의 특정 인물을 협박하기 위해 특정 기사를 쓴다는 소문을 유포함으로써 현실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특종을 찾아내는 게 아니라 창조하려는 기자들을 등장시켜 가짜 뉴스가 진지하게 생산되는 체계를 다루면서 저널리즘의 맹점을 짚어낸다. 소설의 주인공은 스스로를 ‘발랄한 냉소주의자’로 묘사하면서 유쾌한 풍자를 전개한다.


내일을 알려면 어제를 보라

이 소설에서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신문 주필 역할을 하는 인물의 궤변을 통해 드러난다. 그는 주인공에게 신문 창간 과정을 기록해 책 한 권을 내라고 한다. “우리 신문은 창간하기로 해놓고 끝내 창간되지 않을 신문이지만, 그 신문을 내기 위해 1년 동안 준비하면서 겪은 일을 이야기하는 책이죠. 그 신문의 제호는 ‘도마니(Domani)’, 즉 내일이 될 것입니다. 아무튼 내가 내려는 책의 제목은 ‘내일을 알려면 어제를 보라’가 될 것입니다. 멋있지 않아요?”

조지 오웰이 ‘1984’에서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한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고 일갈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 ‘제0호’에서 주필은 “우리는 뉴스를 만들어야 하고, 행간에서 뉴스가 튀어나오게 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라며 가짜 뉴스 매뉴얼을 제시한다. 가짜에 관한 가짜 이야기가 웃기지만, 그로 인해 휘둘리는 현실에 관한 뉴스를 떠올리게 돼 씁쓸한 여운을 남기는 소설이다.

박해현 조선일보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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