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류준열. 사진 NEW
배우 류준열. 사진 NEW

3년 전 배우 류준열이 tvN의 복고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에서 매사 심드렁한 얼굴로 수선 떨지 않고 ‘쌍문동 골목 친구들’을 살뜰히 챙기는 모습을 보면서, 이 중심이 분명한 청년이 머지않아 대배우들과 일하게 될 거라고 짐작했다. 찢어진 눈, 도톰한 입술, 웃기고 복고적이며 자기 확신에 찬 매력적인 애티튜드는 ‘잘생김’을 연기한다고 표현되는 류승범과 유사하다. 하지만 류준열은 2000년대 초의 류승범보다 좀 더 따뜻하고 정돈된 모습을 보여준다.

류준열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제 불황과 청년 실업으로 침체된 사회에서 큰 희망도 절망도 없는 우리 시대의 보통 청년의 모습을 과장 없이 그려낸다. 기존의 성공 신화를 좇아 비명을 지르며 남의 인생을 사는 대신 스스로 자기 인생을 정중하게 대접하는 방식으로.

본격적으로 데뷔한 지 3년 만에 그가 참여한 영화들을 보라. ‘택시 운전사’에서는 송강호·유해진과 걸쭉한 사투리로 몸을 비볐고, ‘침묵’에서는 망상적인 스토커가 돼 최민식을 위협했으며, ‘더 킹’에서는 전 재산으로 슈트(정장)를 한 벌 사서 입고 조인성과 정우성의 비주얼과 맞먹는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신기한 건 송강호 때문에, 최민식 때문에, 조인성과 정우성 때문에 본 영화를 류준열이라는 수더분한 ‘친구’의 시점으로 복기하게 되더라는 것.

확실히 류준열의 행동거지는 넘치는 데가 없고 눈빛은 침착했다. ‘응팔’에서 빗속에 선 혜리(본명 이혜리)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일찍 다녀” 한마디하고 뒤돌아설 때,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시골집으로 온 김태리에게 강아지 한 마리를 건네며 “밤에 안고 자”하며 돌아설 때, 그 무뚝뚝함에 담긴 속 깊은 친절은 그의 ‘어남류(‘어차피 남편은 류준열’이라는 은어)’ 신화에 신빙성을 부여했다.

그렇게 넘치는 데 없이 침착한 눈빛으로 ‘만인의 친구’를 연기했던 류준열이 마약 조직을 다룬 스타일리시한 범죄영화 ‘독전’에서 고독한 청년 ‘락’으로 돌아왔다. 홍콩 누아르의 거장 두기봉 감독의 ‘마약 전쟁(2013년작)’을 리메이크한 ‘독전’은 희대의 마약 조직과 이를 잡기 위해 사생결단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다. 개봉 2주 만에 45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돌풍을 이어 가고 있는 ‘독전’의 주인공 류준열을 만났다. 줄무늬 티셔츠에 검은 팬츠, 흰 운동화를 신은 건강한 젊은이가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영화 ‘독전’에서 중국 마약조직 보스를 맡은 고(故) 김주혁이 당신을 설명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넘치는 데가 없는 사람’이라고.
“내 캐릭터를 관통하는 대사가 군데군데 깔려 있었다. 이 영화에서 나는 거의 말이 없지만, 없는 대사도 만들어 하던 평소와 달리 애드리브도 하지 않았다. 조사나 어미 하나 바꾸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작가(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를 썼던 정서경 작가)의 글솜씨에 감탄했다. 모자람 없이 꽉 찬 대본이었다.”

‘독전’이 무슨 뜻인가.
“마약을 두고 벌이는 독한 사람들의 전쟁. 하지만 홀로 싸우고 있다는 느낌도 난다. 내가 연기한 ‘락’은 외로운 인물이다.”

‘독전’의 영어 제목은 ‘Believer(믿는 사람)’다. 
“마약 조직을 쫓는 형사 ‘원호(조진웅 분)’와 그를 돕는 조직원 ‘락’…. 그들은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어떤 것을 믿어야 하는지, 그 믿음이 그들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혼란을 겪는다. 이 영화는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를 말하고 있다.”

‘독전’은 캐릭터와 스타일이 곧 개연성인 영화다. 사각팬티에 비단 가운을 입고 폭주하는 김주혁은 외계에서 떨어진 생명체처럼 파악하기 힘들며, 소금밭의 농아 남매는 트랜스 음악에 취해 마약을 만들면서 이상한 활력을 자아낸다. 류준열이 맡은 ‘락’은 조직에서 버림받은 하수인이지만 왠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인물은 어떻게 창조했나.
“내가 맡은 ‘락’은 스스로도 누군지 모르는 인물이다. 어느 날 컨테이너에 실려 온 고아…. 국적조차 모른다. 나 또한 배우로 살고 있지만 혼자 있을 때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종종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심정이 들 때가 있다. 내 안의 외롭고 어둡고 우울한 면을 모두 끄집어냈고, 실제로 씁쓸하고 공허한 시간을 보냈다.”

이제까지 당신이 여러 영화에서 보여준 모습은 ‘내가 누구인지 명확히 안다’는 인상이었다. 자기 의심이 없고 표현이 직설적이어서 초창기의 류승범이 떠오르기도 했다.
“(반색하며) 고맙다. ‘멋’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는데, 류승범씨야말로 ‘멋짐’의 대명사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를 모른다’는 설정과 달리 영화 내내 눈빛이 침착하더라. 불안과 혼돈이 없다.
“현장에선 몹시 불안해했다. 이해영 감독은 내가 뭔가 인위적으로 하려고 들면 자제시켰다. 내가 안절부절못하면 모니터를 보며 한마디했다. ‘눈빛을 봐. 이미 나왔잖니’라고.”

영화 ‘독전’ 속 류준열. 사진 NEW
영화 ‘독전’ 속 류준열. 사진 NEW

유아인이 출연한 ‘버닝’과 류준열의 ‘독전’을 거의 비슷한 시기에 봤다. ‘버닝’이 미스터리와 메타포로 흥건한 영화 작가의 몽상록이라면, ‘독전’은 빼어난 비주얼과 장르적 사건, 흥미로운 배우들이 포진한 야심만만한 오락영화다. 그리고 어차피 비현실적이고 미스터리한 이야기라면, ‘유통회사 알바생’을 연기한 33세 유아인보다 ‘마약유통회사 막내’를 연기한 33세 류준열이 영화적으로 더 흥미로웠다. 특별히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 하거나 매달리지 않는 이 ‘부모 없는’ 젊은이에게선 비상한 기운이 감지됐다. 무엇보다 류준열의 눈빛엔 선망과 원망의 기운이 없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저당 잡히지 않은 ‘탐욕 없는 청년’의 눈빛이었다.

지난 3년간의 이력을 보면 당신은 큰 희망도 절망도 없는 우리 시대의 보통 청년을 연기해왔다. 그게 눈 밝은 감독들의 절묘한 캐스팅이었는지, 당신의 안목이었는지 궁금하다.
“그걸 알아봐 준 것만으로 기쁘다. 진심으로 그게 보였다니…. 오락영화에도 시대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그 안에서 내 고민도 함께 묻어나길 바랐다. 지금 33세인 나와 동갑내기 친구들은 갈피를 잡기 힘들어한다. 그건 ‘내가 대체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심정이다. 내 나이의 친구들은 취업했다가도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내가 뭘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거다. 그건 20대의 고민과는 또 다르다. 굳게 믿고 갔던 길을 다시 돌아왔을 땐 허탈한 마음이 그만큼 클 수밖에 없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서울에서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농부가 됐을 때 카타르시스를 느꼈나.
“(‘리틀 포레스트’에서 맡은 배역 ‘재하’는) 캐릭터지만 뭔가를 아는 친구였다. 나는 2015년에 데뷔해 3년 동안 열심히 달렸다. ‘응팔’ 이후 열심히 배우면서 나를 찾아가는 시간을 누리고 있다. ‘독전’도 그런 맥락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조진웅 선배는 쫓는 자로 직진하지만, 나는 협력하고 쫓기면서도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저 사람은 누구인가?’ 하고 애착을 갖는다. 적을 통해서라도 나를 찾고 싶을 만큼 그 욕망은 굉장히 먹먹하고 진한 거다.”

류준열은 경기도 수원에서 1남 1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교사가 되기 위해 사범대 진학을 준비하다 문득 ‘이건 내 길이 아니다’라는 걸 깨닫고 수원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그는 단편영화와 독립영화에서 이력을 쌓으며 성실하게 오디션장을 찾아다녔다. 간간이 막노동, 피자 배달, 고깃집 서빙, 돌잔치 사회 등을 봤으며 초등학교 방과 후 수업에서 연기를 가르치기도 했다.

마침내 서른 살이 되던 2015년. ‘소셜포비아’ 오디션장에 교정기를 낀 채 나타나 현직 아프리카 BJ를 능가하는 현란한 라이브를 선보이며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2015년 5월 18일,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3차에 걸친 오디션에 합격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저런 청년을 대체 어디서 찾았나?’였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류준열(왼쪽)과 혜리. 사진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류준열(왼쪽)과 혜리. 사진 tvN

무덤덤한 표정과 멋쩍은 미소를 지닌 쌍문동 둘째 아들은 어느 시대 어느 골목에 갖다 놓아도 어울릴 것이다. 장발에 나팔바지를 입은 순박한 광주 청년일 때도, 슈트를 빼 입은 들개파 2인자일 때도, 밀짚모자를 쓰고 사과를 따는 과수원 총각일 때도, 어둠에서나 빛에서나 류준열은 자신의 자연광으로 담백하게 빛났다. 모두가 주인공이고 싶어 하는 ‘관종(관심에 목매는 사람)’의 시대에 나설 때와 숨죽일 때를 아는 청년의 조바심 없는 태도는 그를 더 나은 미래로 이끌었다.

유년 시절의 류준열은 어떤 아이였나.
“까불이였지만 멍석 깔아 주면 도망갔다. 직업인이 되고 나서야 용기를 냈다. 누구나 그렇지만, 칭찬받으면 신이 나서 빠져들었다.”

재능 있다는 확신은 어떻게 얻었나.
“진심으로, 재능이 없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했다. 대학에 가서 공부도 하고 몰래 남들 흉내 내면서. 그래서 ‘잘생김을 연기하는 배우’ ‘멋짐을 연기하는 배우’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자기만의 걸작을 소유한 다른 배우들을 봐라. 최민식, 송강호, 유지태… 자기 포스를 지닌 위대한 분들은 사실 동네 형처럼 소탈하다. 그분들이 나를 동등한 배우로, 오롯한 역할로 서 있을 수 있도록 해주신 거다.”

과거의 배우들이 무언가를 과하게 하려 들었다면 당신은 ‘하지 않는 걸’ 잘하더라. 가만히 있는 것….
“무표정이 좋은 배우, 가만히 서 있어도 좋은 배우가 진짜 배우라고 학교에서 배웠다. 말을 안 하면 관객들이 답답하거나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결국 중요한 건 감정이더라.”

기 센 상대 배우들이 버겁진 않던가.
“전혀. 나는 선배님들의 배려에 둘러싸여 있었다. ‘어디 한번 해봐라!’는 식이 아니라, 동료로서 편하게 대해줬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더 킹’의 정우성·조인성 선배도, ‘택시운전사’의 송강호 선배도, ‘침묵’의 최민식 선배도 모두 인격적으로 훌륭하신 분들이고, 나는 그 혜택을 본 것뿐이다. 조진웅 선배의 열정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당신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있나.
“(고민하다) 바르고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하는 게 목표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신념이 있다. 그 과정에 더 쉬운 길도 보이고 꼼수를 쓰고 싶은 유혹도 생기지만, 그렇게 하면 결국 나중에 삐걱거리고 문제가 생긴다.”

지금까지 누가 특별히 당신의 우상이었나.
“진심으로 현장에서 오래 일하고 있는 모든 분들이다. 배우는 찾아줘야 일할 수 있다. 여러 이슈가 있겠지만 연기만 잘해서 되는 건 아닌 듯하다. 오래 지속적으로 일하는 배우들을 현장에서 보면 인격적으로 완성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