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나양은 에너지 낭비를 극도로 싫어한다. 그는 “100장 만들어서 10장 뽑는 것보다 5장을 10장처럼 만드는 게 더 낫다”며 “내가 지치지 않도록, 할 수 없는 일은 안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진 성형주 기자
유나양은 에너지 낭비를 극도로 싫어한다. 그는 “100장 만들어서 10장 뽑는 것보다 5장을 10장처럼 만드는 게 더 낫다”며 “내가 지치지 않도록, 할 수 없는 일은 안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진 성형주 기자

뉴욕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유나양(Yuna Yang)이 한국에 왔다. 성수동 구두 장인을 돕기 위해서라고 했다. 유나양이 누군가. 냉정한 뉴욕 패션계에서 18번째 컬렉션을 치르며 성공적으로 안착한 한국계 디자이너다. 샤넬, 에르메스가 지겨운 뉴욕 상류층 고객, 이를테면 미국의 유명 모델 킴 카다시안의 가족과 캐리 언더우드(그래미상 수상 가수), 메이 머스크(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의 어머니)가 총애하는 하이엔드(명품) 디자이너다. 2010년 뉴욕 패션계에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 ‘유나양’을 론칭했다.

아시아계 독립 명품 디자이너가 드문 패션계에서 미국·유럽·중동을 비롯해 대만과 일본의 유명 백화점 명품관, JFK 면세점에서도 그의 고가 옷이 팔려나간다. 리스 위더스푼과 로버트 패틴슨이 출연한 영화 ‘워터 포 엘리펀트’의 영화 의상 작업 이후 할리우드 제작자들의 연이은 구애도 거절한 그가 왜 성수동 구두 장인을 만나러 급하게 귀국한 걸까.


유나양 2019 봄·여름(S/S) 컬렉션 백스테이지. 사진 유나양
유나양 2019 봄·여름(S/S) 컬렉션 백스테이지. 사진 유나양

한국을 방문한 이유는.
“작년 즈음인가, 성수동 구두 장인이 값싼 공임으로 고생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한 켤레에 6500원을 받는다고. 명품을 제조하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선 장인과 제조 업자가 동등한 파트너다. 밀라노나 뉴욕 등에서 내가 배운 선진국 시스템으로 그분들을 좀 도와주고 싶다.”

‘유나양’은 이제 뉴욕 최고급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돈 많은 상류층 고객이 당신을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 다소 엉뚱한 행보다.
“패션 업계는 흔히 한국을 제조업 국가로 생각한다. 이번 성수동 장인 프로젝트로 내 조국이 고품격 패션을 만들어내는 나라라는 걸 증명하고 싶다.”

디자이너가 사회 운동가도 아닌데.
“디자이너는 나의 재능으로 옷을 팔아 많은 사람을 벌어 먹이는 직업이다. 절대 화려하지 않다. 원단 업자, 제조 업자의 협업은 필수다. 그런데 한국은 장인과 제조 업자에 대한 처우가 좋지 않다. 그 결과 ‘메이드 인 코리아(한국산)’가 ‘명품은 안 된다’라는 인식을 남겼다. 내가 뉴욕에서 ‘유나양’을 고가 브랜드로 론칭할 때 다들 반대했다. ‘너는 한국 출신이니까 하이엔드는 안 돼’라고. 그런 편견을 깨고 싶었다.”

그게 고가의 하이엔드를 시작한 이유인가.
“여담이지만 알렉산더 맥퀸 쿠튀르(의상실) 디자인실에서 일했던 친구가 자기 약혼자에게 나를 이렇게 소개했다. ‘보통 사람은 스타일 스케치 10개를 해오라고 하면 100개를 해오는데, 유나는 달랑 5개만 해온다. 재밌는 건 화를 내려다가도 금세 5개의 완성도에 빠져들고 만다.’ 난 양으로 승부하지는 못한다. 일하는 스타일이 ‘실행하기(doing)’보다 ‘사고하기(thinking)’다.”

게으른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 있을 텐데.
“그게 내 성향에 맞다. 에너지 낭비를 극도로 싫어한다. 100장 만들어서 10장 뽑는 것보다, 5장을 10장처럼 만드는 게 더 낫다. 양보다는 질이 우선이다. 나는 파고들어가는 타입이라 대량생산은 안 맞는다. 내가 지치지 않도록, 할 수 없는 일은 안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할리우드에서 영화 의상 제안이 많았다. 하지만 6개월 이상 연락이 와도 거절했다.”

보통은 기회가 사라지면 어떡하나 하고 일단 잡고 본다.
“일이나 기회는 정말 신성한 거다. 준비가 안 된 채로 덥석 맡으면 다음이 없다. 진짜 기회가 사라지는 거다. 결정할 땐 항상 ‘10년 후에 내가 봐도 이 결정에 만족할까’를 생각한다. 그래야 과한 욕심을 안 부리니까.”

유나양이 디자이너가 된 건 우연이었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스튜디오에서 고뇌하는 화가가 되기엔 ‘에고(ego)’가 부족했다. 뚜렷한 목적 없이 이탈리아에 6개월 어학연수를 갔다가 명품 발렌티노에서 일하던 할머니를 카페에서 만난 게 계기가 됐다. 할머니의 권유로 패션 학교인 마랑고니(Marangoni)를 마치고 이탈리아에서 직장을 찾았다. 두 달간 이탈리아에 있는 패션 회사 리스트를 모조리 구해 팩스로 이력서를 보냈다. 300장 정도 보냈을 때 알비에로 마르티니(베이지색 지도 프린트 가방으로 유명한 브랜드)의 눈에 띄어 발탁됐다.

에너지가 많지 않다더니 이력서 300장을 보낼 에너지는 어디서 나왔나.
“하하. 꼭 필요할 땐 에너지를 과감하게 쓴다. 경력 없는 외국인이 취직하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한다.”


‘통통한 여성도 패셔너블한 드레스를 입을 수 있다’는 주제로 진행된 미국 인기 토크쇼에 유나양의 의상이 소개됐다. 사진 유나양
‘통통한 여성도 패셔너블한 드레스를 입을 수 있다’는 주제로 진행된 미국 인기 토크쇼에 유나양의 의상이 소개됐다. 사진 유나양

그 뒤로 탄탄대로를 걸었다. 2002년 밀라노 패션위크에 데뷔하고, 런던의 패션 명문 학교 세인트 마틴(Central Saint Martins)을 거쳐 2010년 브랜드 ‘유나양’을 론칭했다. 처음부터 고급 소재인 레이스와 실크를 과감하게 잘라 만들어 비싸게 팔았다. 맨해튼 패션 장인의 전통적인 기법이다. 명품 외에 틈새시장이 드물었던 뉴욕의 패션 피플은 유나양의 하이엔드에 열광했다. WWD, 뉴욕 매거진은 물론 3대륙의 패션 언론이 앞다퉈 유나양을 다뤘고, 바이어의 전화가 빗발쳤다. 무엇보다 이민자 출신이지만 도도한 뉴요커 앞에서도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그의 일관된 태도가 브랜드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한몫했다.

많이 싸우면서 브랜드의 자존심을 지켜냈다고.
“기질적으로 불공평한 건 못 참는다. 공평하지 않다 싶으면 당당하게 나갔다. 2013년에 타임스 스퀘어에서 록밴드랑 같이 패션쇼를 한 적이 있다. 워낙 유명한 대형 엔터테인먼트 회사라 그런지 우리 컨디션을 무시한 일방적인 요구가 잦았다. 그래서 ‘그렇게 클레임(이의 제기)할 거면 빠지라’고 했다. 정면승부하니까 그때부터 고분고분해지더라(웃음). 서로 존중하고 실력으로 대결하자는 거다.”

자기가 만든 옷에 대한 자신감인가.
“이번 컬렉션에서 옷이 한 벌도 안 팔려도 돼, 그런 마음으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복하게 되고 안주하게 된다. 실패해도 된다. 실제 실패도 많이 해봤고.”

기억나는 실패가 있나.
“최악의 상황이 있었다. 2010년에 데뷔해서 2011년까지 떠도 너무 떴다. 그래서 뉴욕 패션계를 얕잡아봤다. 구름 위를 걷다가 추락했다(웃음). 그다음 컬렉션에서 완전히 외면당했다. 차라리 욕먹는 게 낫지, 무관심의 설움을 그때 알았다.”

전화벨 소리 없는 정적의 사무실을 처음 찾아온 사람은 20세기 폭스 부사장 줄리아 페리였다. 점프슈트 한 벌을 사더니 리스 위더스푼 주연의 ‘워터 포 엘리펀트’ 영화 의상을 제안했다. 그때도 즉답은 피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가 중요했으니까. 다행히도 내가 1920년대 의상 콘셉트로 데뷔했는데, 그 영화 배경이 1920년대여서 수락했다.” 흥미로운 건 20세기 폭스 부사장을 소개한 사람이 그의 사무실에서 일한 어시스턴트였다는 것. 머라이어 캐리 전 남편 닉 캐넌과의 프로젝트를 연결한 사람도 유나양에서 일하다 이직한 어시스턴트다.

말단 직원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비결은.
“공평하게 대우한다. 한쪽에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면 이 일을 지속할 수가 없다. 장인이나 제조 업자를 지키려는 것과 똑같은 논리다. 나는 소신이 있다. 내 옷을 판매하는 지역의 생산자와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하려고 한다.”

매번 그 지역의 생산자와 일한다는 게 가능한가.
“가능하다. 가령 일본에 수출할 땐 일본 소재 회사와 계약해서 일한다. 뉴욕에선 내 컬렉션의 90%를 맨해튼의 ‘가먼트 디스트릭트’에서 생산한다. 뉴욕 디자이너들은 맨해튼 34번가에서 42번가까지의 지역을 굉장히 귀하게 생각한다. 장인, 하청공장, 원자재 공장, 에이전시 등이 밀집된 이곳을 지키기 위해 디자이너들이 나서서 임대료 인상을 막기도 한다.”

미국 상류층 고객이 왜 당신을 좋아하나.
“아시아 디자이너들은 보통 테일러링에 강한데, 나는 실크 같은 부드러운 소재를 물 흐르듯이 뽑는 걸 잘한다. 기술적으로 드레이핑(인체나 인체모형에 직접 천을 대고 디자인하는 것)이 좋다는 평가를 받는다. 백인 상류층 출신 디자이너가 만든 것 같다고들 한다(웃음).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 명품이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인 데 반해 유나양은 ‘메이드 인 뉴욕(made in Newyork)’이어서 희소가치가 있다. 내 고객은 ‘남들이 모르는 걸 나는 안다’라는 특별한 자부심으로 유나양을 입는 것 같다.”

고객은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가.
“감사한 존재다. 20대부터 70대까지 강하고 소신 있는 여성이 내 옷을 입는다. 청바지 한 벌에 40만원, 드레스는 300만~400만원 할 정도로 비싸다. 그분들이 옷 한 벌을 사면 20명에게 돈이 돌아간다. 그래서 나는 고객을 직접 대면하는 백화점 판매원을 존경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는다.”

자신의 어떤 점이 가장 자랑스러운가.
“2010년 데뷔 이래 뉴욕에서 거르지 않고 쇼를 했다. 독립 디자이너가 1년에 두 번 쇼를 계속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수준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도, 예산이 부족해서 원하는 모델을 못 쓸 때도 있었고, 보여주기 싫은 옷도 있었다. 그런데도 계속했고, 일정 수준 이상의 쇼를 꾸준히 보여줬다. 그게 쌓여서 신용이 되고 브랜드가 되고 로열티가 생겼다. 뉴욕 사람들이 내게 독하다고 한다. 들고나는 시장이라 3년이 고비다. 3년 버티면 5년이 되고, 5년 버티면 10년이 된다. 그 뒤론 죽 갈 수 있다.”

주변에서 세컨드 브랜드를 만들고 확장하라고 할 때도 그는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했다. 자신을 믿고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했다. 오랜 기간 똑같은 일을 처음의 신조를 지키면서. 그러면 그 추억을 함께한 사람들이 로열 고객이 되고 명품이 된다고 믿었다. 그런 단순한 공정이 하이엔드 브랜드고 디자이너가 할 일이라고. 불안에 쫓긴 ‘열심’이 아닌 자발적 ‘열중’으로 빚은 삶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것을 우리는 지속 가능한 성실, 즉 신용이라고 부른다.

김지수 조선비즈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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