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함에는 미덕이 있다. 인생이 거친 격랑 속에 시달릴 때 우리는 변하지 않을 듯 버티고 있는 세상의 풍경 앞에서 혹은 더디게 흘러가는 일상의 리듬 앞에서 위안을 얻곤 한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자신이 잃어버린 것은 바로 그 사소한 일상의 풍경이며 그 속을 지나갔던 감정의 미묘한 지점이라는 걸 깨닫기도 한다. 더디게 다가오던 20대가 어느새 성큼 지나가버렸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은 서른을 훌쩍 넘긴 어느 날이다. 햇살 아래 깜박 졸았더니 어느새 대청마루 너머로 뉘엿뉘엿 저무는 하늘, 혹은 끝이 보이지 않던 무더위가 갑자기 자취를 감춘 초가을의 저녁과 같이.

영화의 미덕은 이러한 생의 시간에 내재하는 불규칙한 리듬을 제법 설득력 있게 되살려 놓을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문자화된 일상은 사소해지기 전에 지루해지거나 특별한 의미를 띠기 쉽다. 반면 재생의 시간 속에서 살아나는 소리와 영상의 흐름은 블랙홀 속으로 문드러져가는 특정한 시공을 그 사소함마저 통째로 되살려내고 있다는 환상을 체험하게 한다.


시간이 지나가면 결국 잊혀

일본의 대표적 성장소설로 자리잡은 츠츠이 야스타카의 1965년 작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동명의 애니메이션(시간을 달리는 소녀·2006년 작)에 불러들인다. 단지 매체를 바꾼 것뿐 아니라 주인공도 21세기를 살아가는 당차고 명랑한 소녀가 되고 이야기는 오히려 원작의 속편 격에 가깝다. 원작의 주인공이었던 오시야마 카즈코는 극의 주인공 콘노 마코토의 이모로, 조카가 우연히 얻게 되는 타임리프(time leap)의 능력에 대해 “네 또래 여자아이들에게는 가끔 있는 일이야”라고 설명하는 독신 미혼 여성이 돼 있다(타임리프는 시공을 뛰어넘어 자신이 살아왔던 과거의 특정한 지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조카 마코토의 철없는 타임리프 장난에 대해 가끔은 그녀가 본 이익만큼 손해 본 사람이 있음을 따갑게 일깨워주기도 하고 자신의 치명적 실수로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조카에게 “넌 나 같은 성격이 아니잖니? 누가 늦으면 먼저 만나러 달려가는 게 너잖니?”라고 말해주기도 한다. 사랑하는 조카가 자신과 같은 회한을 살아가지 않도록, 다시 한번 시간 너머로 달릴 수 있도록 말이다.

여름 방학을 앞둔 여고생 마코토는 아침이면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하고 방과 후면 단짝 친구인 고스케, 치아키와 야구 놀이를 즐기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타임리프의 능력이 생기고 천방지축의 사춘기 소녀가 얻게 되는 것은 할리우드 영화 속 영웅이나 악당들이 야기하는 야심 찬 결과와는 거리가 멀다. 동생이 가로챈, 냉장고 깊숙이 보관해 두었던 푸딩을 먹기 위해 며칠 전으로 돌아가고 노래방에서 좀 더 오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수없이 타임리프를 반복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이 철없고 사랑스러운 소녀가 행하는 타임리프 능력의 남용은 어디서부터인가 꼬이기 시작한다. 시간을 마음대로 되돌리는 일이 가벼운 해프닝으로만 끝날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그녀는 자신도 감당하지 못할 결과 앞에서 절규할 수밖에 없다.

마코토의 일상은 두 명의 단짝 친구와의 방과 후 공놀이로 함축된다. 대기를 가르며 그려내는 포물선의 움직임을 아득히 주시하며 그들은 무료한 고교 시절의 한때를 보내고 있다. 공은 사라지지 않을 듯 세 사람 사이를 오가고 있지만 그들이 인정해야 할 사실은, ‘놀이는 언젠가 멈추리’라는 것이다.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대기의 서늘함이 남아있는 공의 감촉도, 아이에서 막 어른이 되려고 하는 세 남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야구장갑도 잊힐 것이다.


이미 지나온 과거라도 돌아가고 싶어

가파른 내리막길을 숨이 막힐 것처럼 달려왔다 하더라도 건널목 앞에서는 멈춰서 숨을 골라야 하는 법. 잠깐의 정지 뒤 건널목 저 너머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무슨 일이 생길까. 극 중에서 초반부와 마지막의 반전을 이끄는 것이 바로 이 건널목과 비탈길의 움직임이다. 자전거의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안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자전거를 멈추지 못한 열일곱 살의 아이가 그곳을 건너지 못하고 허공으로 튕겨 오른다. 생이 소멸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때 소녀는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이전으로 되돌아간다. 그렇게 끊임없이 되돌아갈 수 있다면 우리의 평온한 유년은 지속될 수 있을까.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생의 에너지는 삶을 그대로 남아있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소녀는 유년의 건널목을 건너야만 한다. 아득한 풍경을 담은 프레임 속으로 해가 지기 시작하고 강물은 저물어가는 하늘빛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고정돼 있는 듯 보이는 프레임 안에서 소년이 떠나고(혹은 소녀가 소년을 밀어내고) 남은 소녀가 울음을 터뜨리고 다시 소년이 돌아와 약속의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수평으로 이동하는 그들을 감싸는 것은 광활한 시간의 풍경이다. 그것은 아득한 소실점, 결코 손에 닿을 수 없는 심도의 환영과도 같다.

하지만 그러한 풍경에 이르기까지 소녀가 소년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달렸던 시간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닿을 수 없을 듯 빠르게 수평으로(우에서 좌로) 움직이는 카메라의 프레임 안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내내 그녀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지 않아도 그녀는 달리고 있다. 어느덧 그녀가 움직이는 화면의 속도를 따라잡아 프레임 안으로 진입하는 데에 성공하고 그녀의 속도가 프레임의 수평으로 지나가는 속도를 넘어버리는 순간, 그녀는 화면을 가로질러 나가버린다(오른쪽에서 들어온 그녀가 왼쪽 출구로 빠져나간다). 그녀는 더 이상 시간을 뛰어넘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있고자 하는 시간을 향해 더 빨리 달려가고야 만다.

아이들은 달리다 멈추고 두 갈래로 나뉘는 골목길 앞에서 서성거리기도 한다. 만약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간다면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풋사랑의 고백을 받을 것이다. 자신이 차마 해결할 수 없는 혼돈의 감정은 차라리 공포에 가까웠을까. 만약 왼쪽 골목길로 들어가 버린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우리는 이 두 가지 길을 다 걸어볼 수는 없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가 미처 모르고 있는 것은 그 어느 골목길도 금세 끝나버린다는 사실이다. 문득 차마 말이 돼 피어오르지 못한 사랑의 고백들을 떠올린다. 젊은 날을 흔들었던 그 에너지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걸까. 평온하고 지루한 일상 속 허전한 가슴 밑바닥을 짧게 스치고 지나가는 소름은 그것과 맞닿아 있을까.

기억은 스타카토처럼 짧게 등장해 소름처럼 존재를 훑고 지나간다. 어느 누구도 지속적인 시간을 기억해내지 못한다. 희미하고 문드러진, 왜곡된 그림으로 머리를 섬광처럼 비추다 사라진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우리에게 달려오고 그녀와 함께 관객은 시간을 뛰어넘어 지난 시간을 다시 살아내듯 소녀의 좌충우돌 성장기를 목격한다. 타임리프, 혹은 다시 반복되어진 삶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이다. 각자의 풋사랑이 되돌아오는 기적이 찾아온다. 비록 이미 지나온 저 너머의 이야기임을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