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심포니가 지난해 무대에 올린 ‘아마데우스’ 필름 콘서트의 공연 장면. 사진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샌프란시스코 심포니가 지난해 무대에 올린 ‘아마데우스’ 필름 콘서트의 공연 장면. 사진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2008년 말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어려움을 겪은 서구 클래식 음악 시장은 실질적으로 돈을 벌고, 관객을 늘리는 방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비용을 들이는 신규 투자 대신, 한정된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고객을 확대하는 쪽으로 방향이 정해졌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메트 HD 라이브’를 필두로, 고급 공연예술을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라이브 시네마 이벤트’를 파생상품으로 도입한 것도 이 같은 노력의 일환이다.

공연 기획자들은 이어 급성장하는 아시아 시장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2008년 8월 도쿄 부도칸에서 열린 히사이시 조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스튜디오 지브리의 합작 25주년 기념 공연이었다. 스튜디오 지브리가 제작한 숱한 걸작 애니메이션의 음악을 작곡한 히사이시 조가 200인조 ‘뉴 재팬 필하모닉’을 지휘하거나 피아노 독주를 이어 가는 동안 무대 위에 설치된 스크린에 해당 애니메이션의 주요 장면을 상영하는 식이었다. 형식은 단순했지만 사흘 동안 평균 1만4000명의 관객이 공연장을 찾았다. 800명 규모의 코러스와 160명으로 이뤄진 마칭 밴드까지 더해진 무대는 서구 기획자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줬다. 관객들도 열광했다.

오래지 않아 디즈니와 워너브러더스를 비롯한 메이저 영화 배급사들도 자사의 영상 콘텐츠를 이용해 비슷한 파생상품 제작에 착수했다. 이들은 런던 심포니나 뉴욕 필하모닉 같은 메이저 오케스트라와 연계해 자사 보유의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콘서트홀에서 라이브로 연주하는 공연 상품을 출시했다. 홀에 영사막을 걸어 영화를 틀고, 동시에 악단이 음악을 맡는 형태를 영미에선 ‘라이브 오케스트라 스크리닝’이라고 부른다. 국내에선 ‘필름 콘서트’로 더 잘 알려진 기획이다.

사실 필름 콘서트는 이전에도 있었다. 그 원조는 1987년 지휘자 앙드레 프레빈과 LA 필하모닉이 영화 ‘알렉산더 네프스키’를 모티브로 한 공연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음악 관련 영화를 클래식 애호가들을 상대로 공연장에서 상영한 수준이었다. 1990년대에는 콜롬비아 아티스트 매니지먼트(CAMI)와 크래프트-엥겔(Kraft-Engel) 매니지먼트가 ‘카사블랑카’ ‘싱잉 인 더 레인’ 같은 고전영화의 필름 콘서트에 관심을 보였다. 이들의 라이벌 격인 IMG 아티스트와 고페인-슈워르츠(Gorfaine-Schwartz) 에이전시는 합작 법인을 통해 ‘나 홀로 집에’의 필름 콘서트로 미국 시장을 노크했다. CAMI와 IMG는 ‘스타 트렉’의 공연 판권을 놓고 경쟁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는 클래식 공연으로도 괜찮은 수익을 보던 때여서 필름 콘서트 시장이 성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디즈니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데뷔

하지만 리먼 사태 이후 시장 상황이 바뀌면서 필름 콘서트가 자연스레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필름 콘서트는 전형적인 ‘원소스 멀티유즈’ 방식이다. 디즈니가 2015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필름 콘서트로 새 시장을 열었고, 지금은 디즈니와 한 식구가 된 픽사도 ‘토이 스토리’ 등 히트작을 앞세워 새로운 시장에 뛰어들었다.

히사이시 조가 ‘센과 치이로의 행방불명’의 주제 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하고 있다. 사진 트위터 캡처
히사이시 조가 ‘센과 치이로의 행방불명’의 주제 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하고 있다. 사진 트위터 캡처

영국 런던 클래식 음악계의 중심인 로열 앨버트홀(입석 포함 6000석)은 2015년부터 여러 영화사와 제휴해 다양한 필름 콘서트를 선보이고 있다. HD 화질로 재탄생한 ‘대부’와 ‘인디애나 존스’도 BBC 심포니나 로열 필하모닉의 격조 높은 연주를 통해 필름 콘서트의 히트 상품으로 거듭났다. 2017~2018시즌에는 대니얼 크레이그 주연의 ‘카지노 로열(2006)’을 시작으로, 오는 23일 열릴 ‘글래디에이터’까지 로열 앨버트홀은 약 16회의 필름 콘서트가 진행 중이다. ‘필름스 인 콘서트’는 회당 평균 3000명 이상의 관객이 모였고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은 3회 전 공연이 매진됐다. 

2018~2019시즌에 무대에 오를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는 장당 676파운드(한화 약 98만원)짜리 좌석이 패키지로 나왔고 이 역시 매진이 예상된다. 픽사는 2016년부터 ‘픽사 인 콘서트’로 베이징·상하이·서울 시장을 노크 중이다. ‘쿵푸팬더’ 시리즈로 유명한 드림웍스도 뒤늦게 시장에 참여해 2018년 어린이날에 한국 공연을 마쳤다. 국내에서 가장 있기 있는 필름 콘서트 콘텐츠는 모차르트 생애를 다룬 ‘아마데우스’로 공연마다 매진 행렬을 이어 가고 있다.

필름 콘서트가 인기를 누리면서 라이선스와 공연의 질 관련 문제가 주목받았다. 이 때문에 히사이시 조 관련 필름 콘서트 판권을 보유한 일본 기획사 프로막스는 자사 동의 없이 진행되는 공연들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 중이다. 스튜디오 지브리도 자사의 승인 없이 2차 저작물로 가공되는 주변국의 공연 행태를 주시하고 있다.

국내에선 지난해를 정점으로 필름 콘서트의 인기가 한풀 꺾이는 추세다.

지난해 영화 ‘라라랜드’가 아카데미상 6개 부문을 차지하자, CAMI는 전 세계로 필름 콘서트 공연을 타진하는 제안서를 보냈고 미국 밖에선 한국이 가장 먼저 권리를 획득했다. 하지만 한국 공연이 종료된 직후 퍼포먼스의 저질 논란이 온라인 공간을 뜨겁게 달궜다. 프리랜서 음악인들로 조직된 임시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자주 불협화음을 빚었다는 불만에 더해 음향과 영상의 싱크가 제대로 맞지 않았다는 불평도 속출했다.

또 지난해 10월 서울시향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필름 콘서트를 개최했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 영화 자체가 무거웠고 더는 필름 콘서트에서 신선함을 느낄 수 없다는 관객 반응도 이어졌다. 밸런타인데이를 겨냥해 ‘러브 액추얼리’ 필름 콘서트의 제작이 추진됐지만 변화된 시장의 여건으로 인해 민간 기획사들이 제작을 주저했다.

올해 들어 필름 콘서트는 성공과 실패의 기로에 놓여 있다. 런던 심포니의 새 음악감독으로 부임한 지휘자 사이먼 래틀은 매년 5월 4일을 ‘스타워즈’ 콘서트 데이로 추진할 뜻을 밝힐 만큼 필름 콘서트의 친화력에 주목한다. 필름 콘서트 기획자들은 ‘왕과 나’ ‘사운드 오브 뮤직’처럼 함께 흥얼거릴 명곡들이 다수 수록된 음악영화의 시장성에 특히 주목한다. 하지만 정통 클래식 음악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투자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필름 콘서트는 한순간 즐기다 사라지는 신기루로 끝날지도 모른다.


▒ 한정호
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