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은 삶이 성숙해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실연은 삶이 성숙해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삶의 끝은 무엇일까. 죽음이다. 연애의 끝은 무엇일까. 실연이다. 인생에 생로병사가 있듯 연애도 마찬가지다. 삶의 끝이 죽음이라고 해서 죽음을 삶의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듯, 연애나 결혼의 끝이 실연과 이혼이라고 해서 그 연애와 결혼을 실패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 삶을 누리는 법은 끝이 있음을 알고도 혹은 알기에 더 현재에 충실하고 즐기는 것이다. 연애 또한 그렇다. 이별이 두려워 방어로 점철된 관계를 맺는다면, 연애의 즐거움은커녕 이별을 앞당기고 이후의 후회나 미련을 늘려갈 뿐이다. 연애의 끝이 모조리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다.

나의 경우는 실연 후 애도기를 거친 뒤 오히려 삶의 능률이 바짝 오르고 연애 도중 하지 못했던 밀린 일을 실컷 하면서 위안을 얻기도 했다. 실연 후 찾아오는 삶의 고요와 정적, 평화를 감사하기도 했다. 함께하던 일을 나 혼자도 잘해낼 때마다 나를 더 칭찬하고 보듬으면서 나와의 관계가 더 좋아졌고 그동안 소홀했던 다른 관계를 더 잘 돌볼 수 있어, 보람됐다. 활용하기에 따라 실연은 성장의 디딤판이 될 수 있다.

다음에 열거하는 방법은 내게 유용했던 실연 극복법이자 실연 활용법이다. 모두에게 통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각자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갈 때 조금이라도 참고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적어본다. 내게 다시 하는 다짐이기도 하다.

1. 감상에 휩쓸릴 만한 생각을 자제한다. 사랑받지 못했다는 증거를 샅샅이 찾아내 스스로 더 비참하게 만들지 않는다. 한 번의 실연으로 삶 전체 혹은 나의 연애사를 모조리 일반화하지 않는다. 가슴 아픈 단정, 자학에 가까운 푸념으로 파고들지 않는다. 화를 재촉하는 상대의 지난 과오나 따지고 싶은 점을 켜켜이 점검하지 않는다. 감정의 과장과 함께 꺼내보지 않는다. ‘이것 봐,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어’와 같은 말을 되풀이할 추적은 멈추는 게 좋다. 뒤늦은 탐정질은 헤어짐의 과정을 더 고통스럽게 할 뿐 아니라 감정의 찌꺼기를 더 많이 양산해서 실연 과정을 불필요하게 길게 만든다.

2. 극단적인 말은 피한다. ‘평생 후회할 거야,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아’처럼 삶 전체를 걸거나 미래를 규정하는 말은 실연의 여파를 지나치게 확장시키는 자기 암시가 된다. 더불어 상대의 반응을 자극할 만한 크고 센 말을 조심하도록 한다. 반응을 야기하는 격렬한 말을 이어 갈수록 헤어짐을 완수하기 어려워진다. 관계 정리의 무게중심을 상대의 반응에 넘기게 돼 더 괴로운 기다림의 시간을 맞이하게 된다. 격한 말을 내뱉은 뒤 무력감과 자괴감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때라면, 바로 당장 울림 없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닫힌 문 밖으로 나가도록 한다. 쉽지 않더라도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하나씩 집중해서 해 나가도록 한다. 기분 전환할 만남이나 일을 벌려도 좋다. 단, 너무 힘들거나 쉽게 지치게 할 일은 우울감이나 스트레스를 가중시킬 수 있으므로 피하도록 한다.

3. 제일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다시 쓰는 것이다. 연애를 이어 왔다는 건 두 사람의 만남부터 지금까지 관계를 구축해온 서사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써 나갔다는 걸 의미한다. 운명처럼 느꼈던 순간부터 애틋하기 그지없었던 장면을 일관되게 이어 가서 하나의 스토리로 만들어 왔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다른 관점에서 다시 써 본다. 다른 시각을 대입해 보면서 이리저리 방향을 틀어 본다. 단, 비참한 스토리는 지양한다. 

중요한 것은 의도(intention)다. 요가 수행을 시작할 때 그날 수행의 방향과 집중할 바를 정해 놓고 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다시 쓸 때도 의도를 명백히 한다. 그 의도는 크게 말하면 헤어짐의 건강한 완성이다. 격렬한 감정을 가라앉히고 연애 상대와의 관계에서 불편했던 점, 거슬렸던 점을 정리하고 그에 강점을 둬서 이야기를 다시 쓰면 좋다. 왜 이 연애가 마무리되면 좋은지, 자신이 설득될 수 있도록. 연애를 이어 갈 때는 숱한 거슬림을 사랑의 의도로 무시하거나 적당히 넘어갔지만, 실연을 의도할 때는 묵살했던 많은 지점으로 돌아가 그것이 왜 자신에게나 관계 전체에 나쁜지를 이야기로 스스로에게 설명해 본다.

4. 과거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썼으면 이제 다가올 미래의 이야기를 그려보도록 한다. 많은 경우 우리가 연애를 지속할 때 하는 말은, 이보다 더 맞는 혹은 편한 혹은 적당한 등등의 관계를 다시는 맞지 못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앞세우는 것들이다. 이 말들을 바꿔 보자. 그의 단점을 가지지 않은, 혹은 그와는 아주 다른 장점이나 매력을 가진 인물을 상상해 보고 그 사람과의 설레는 만남이나 맞이할 관계의 즐거움을 조목조목 떠올려 본다. 반드시 그런 상대를 만나야 할 필요는 없다. 그저, 연애의 즐거움이란 한 사람(지난 연인)과 누렸던 기쁨으로 한정되지 않음을, 그 외에 무한한 즐거움이 가능하다는 걸 스스로에게 인지시키는 것이다.

5. 실연은 삶을 재편하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지난 악습을 내몰고 대청소하듯 새로운 기운을 삶 전반에 불러들이도록 한다. 취미 생활을 시작해도 좋고 가슴 뛰는 목표를 세워 집중해도 좋다. 자신이 나아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재미로 옛 관계가 사라져 허전한 빈자리를 채운다.

6. 개인마다 짜릿한 자신만의 복수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이건 딱히 권하는 방법은 아니지만, 그만큼 들인 노력도 많고 뭔가 한 방이라도 먹이고 헤어지지 않으면 영 찜찜할 것 같을 때, 한 가지 정도 스스로에게 허락해도 좋다. 

물론 법에 저촉되거나 스스로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행위는 제외한다. 나의 경우는 실종이다. 그의 시야에서 한동안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를 두고 나를 안타깝게 찾는 옛 연인과 그를 외면하는 나의 서사로 해석해선 안 된다. 숱한 경고와 대화 시도, 끊임없는 신호에도 불구하고 끝내 몰라 본 상대에 대한 철통 외면으로 최후의 즐거움을 허락하는 것이다. 물론 명확한 관계 정리의 말과 이유 및 상황 설명은 이전에 건네야 한다. 알 수 없어 헤매게 해서는 안 되므로. 그의 앞날에 축복의 마음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인연이 여기까지였을 뿐, 원망의 마음을 갖는 것은 훗날 풀어야 할 악연을 만드는 일이다. 그러므로 안녕. 이별의 안녕은 말 그대로 상대의 평안과 탈 없음을 빌어 주는 일이다. 나 없이도 이어질 그의 행복 또한 더불어.


실연은 새로운 관계 만드는 계기

실연은 성숙과 성찰 그리고 훗날 이어질 관계의 새로운 지향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실연으로 더 멋져질 나를 믿고 그를 믿으라. 누구도 내 인생에 나만큼 중요하지 않고, 누구도 그의 인생에 그만큼 중요하지 않다. 내가 타인의 인생에 끼칠 영향에도, 또 타인이 내 인생에 끼칠 영향에도 지나친 무게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것이 실연을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자세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 이서희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영화학교 ESEC 졸업, 파리3대학 영화과 석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