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집 ‘마(Mar)’에는 주인공의 얼굴 사진이 없다. 사진 김진영
사진집 ‘마(Mar)’에는 주인공의 얼굴 사진이 없다. 사진 김진영

한 인물에 관한 전기(傳記)가 있듯이, 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사진집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전기가 대체로 사회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을 다룬다면, 사진집은 꼭 그렇지는 않다. 일본 사진가 가와시마 코토리가 친구의 어린 딸 츠바키를 다룬 사진집 ‘미라이짱’으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기도 했듯이 말이다.

출판사 포워드 북스(Fw: Books)에서 2018년 출간한 네덜란드 사진가 마린 바스(Marijn Bax)의 ‘마(Mar)’역시 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사진집이다. 주인공은 1915년에 태어나 2017년 10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마(Mar) 할머니다. 다른 집의 가사도우미로 일하면서 결혼하지 않고 평생을 살다간 마 할머니는 78년간 한집에서 살았다. ‘마’에는 마 할머니가 이 집에서 보낸 마지막 10년의 시간이 담겨 있다.

이 책은 그래픽 디자이너의 역할이 사진집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사진집이라는 일종의 건축물을 지으면서 디자이너는 주어진 재료들로 외관을 설계한다. ‘마’의 디자인은 네덜란드 그래픽 디자인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아르망 메비스와 린다 판 되르센(메비스&판 되르센 디자인그룹·Mevis & Van Deursen)이 맡았다. 이들의 디자인은 실험적이고 새로운 형식이면서 동시에 내용을 돋보이게 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 사진집은 여러 면에서 독특하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인물의 얼굴이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리 자세히 보더라도 우리는 마 할머니의 얼굴을 볼 수 없다. 마 할머니가 계단을 짚고 올라가는 뒷모습, 정원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옆모습 등 그녀의 움직임은 볼 수 있지만, 얼굴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한 인물에 관한 사진집, 심지어 제목도 그 인물의 이름을 딴 책에 주인공의 얼굴이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다니, 이는 굉장히 드문 경우다. 마 할머니가 얼굴이 찍히는 것을 거부했던 걸까?

그런데 책에는 담기지 않은 할머니의 얼굴 사진을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사진집은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을 통해 제작됐다. 크라우드 펀딩은 프로젝트를 웹상에 올려 익명의 대중으로부터 투자받는 방법이다. 2018년 초에 목표 금액 달성에 성공한 이 프로젝트 웹 페이지에는 자글자글한 주름과 백발을 한 마 할머니가 담배를 입에 문 얼굴 클로즈업 사진이 있었다. 그러니까 마 할머니가 얼굴이 찍히는 걸 거부한 것도 아니고 마린 바스가 일부러 얼굴을 찍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찍었지만 책에 싣지 않았을 뿐이다.

하나의 사진집을 만들기 위해 사진가가 찍은 수많은 사진 가운데 사진을 선별하는 일은 사진가, 편집자, 디자이너의 협업을 거친다.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사진집을 만들면서 사진가는 주인공을 부각시키려는 욕망이 앞서기 마련이다.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 클로즈업 사진이 담겨 있었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인물을 전면에 내세우는 사진을 편집 과정에서 모두 배제했다. 대신 뒷모습, 금이 가 있는 벽, 담뱃불에 구멍이 뚫린 스웨터, 정원의 꽃 등 할머니의 주변부를 통해 그녀에 관해 이야기하는 우회로를 택한다.

두 번째 독특한 점은 책이 제본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제본 과정이 생략돼 있다 보니 모든 페이지가 각각 분리돼 흩어진다. 페이지 수가 극히 적은 경우나 신문과 유사한 경우를 제외하면 제본하지 않고 책을 내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 이 책을 떨어뜨리기라도 한다면, 본래 출판사에서 출고한 그대로 처음의 순서를 찾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이 책을 처음 마주했을 때 보는 이는 혹시라도 떨어뜨려 책의 순서를 잃어버릴까 봐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애써 맞추려는 처음의 순서라는 게 적어도 이 사진집에서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독자들은 곧 깨닫게 된다. 이 책은 제본이 돼 있지 않을 뿐 아니라, 페이지 숫자 표기도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을 보기 위해서는 페이지별로 꺼내서 보고 다시 넣는 것을 반복해야 하는데 이렇게 책을 보다 보면 출판사가 책을 출고했을 때의 순서는 뒤죽박죽이 될 수밖에 없다. 새 책을 참고하지 않는 한 원래 상태를 기억해 돌아갈 수가 없다.

이는 이미지가 이처럼 뒤죽박죽 섞이는 것을 디자이너가 의도했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어떤 방식으로 흩어져도, 또 어떤 순서로 다시 모여도 괜찮다는 것이다.


사진집 ‘Mar’. 이 사진집은 페이지 표기도 제본도 되지 않은 상태로 출간됐다. 사진 김진영
사진집 ‘Mar’. 이 사진집은 페이지 표기도 제본도 되지 않은 상태로 출간됐다. 사진 김진영

이미지 통해 촉각과 후각 자극

시각 이미지가 촉각과 후각을 자극하는 것도 이 사진집의 특징이다. 이 책은 마 할머니의 옷을 확대한 사진을 곳곳에 담아 놨다. 그런데 사진이 실제 옷의 크기와 거의 유사할 정도로 커서 의도적으로 사진을 실물 크기로 확대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결과 단추 하나부터 옷의 결, 구멍 나 기운 흔적까지, 모든 디테일이 세밀히 보인다. 이 확대된 옷 사진들은 옷 표면의 질감과 세월의 흐름이 묻은 냄새에 대한 기억 등 촉감과 후각을 자극한다. 시각 이미지이지만 다른 감각을 통해 느끼는 것 같은 환상을 주는 것 역시 사진가와 디자이너의 긴밀한 협업으로 가능해진 결과다.

인물에 관한 사진집이지만 인물의 얼굴은 등장하지 않는 사진집, 책이지만 기승전결이나 순서 없이 전개되는 페이지 그리고 이미지로부터 질감을 느끼고 냄새를 맡는 것같이 상상하게 만드는 이 책은 다채로운 즐거움을 선사한다. 만약 이 사진집이 평범한 구성이었다면 어땠을까? 이를테면 마 할머니의 집 전경이 나오고 전신 풀샷이 나온 후 클로즈업을 통해 얼굴을 보여준 후 물건을 보여주는 등 평범한 길을 따랐다면 말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이 사진집의 독특한 매력은 찾아볼 수 없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누군가가 마 할머니의 집에 머물렀다가 이곳을 떠난 후 이 집을 다시 떠올려야 한다면, 그 기억은 이 책의 구성을 닮은 것일지 모른다. 잠시 머물렀던 어떤 공간을 떠올릴 때, 그 기억은 마 할머니의 군데군데 기운 옷처럼, 그리고 이 사진집의 얼기설기한 구성처럼, 조각난 장면들의 패치워크(여러 색상·무늬·소재·크기·모양의 작은 천 조각을 서로 꿰매 붙이는 것)처럼 회상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파편이 된 장면, 두서없이 스쳐 가는 주마등 같은 이미지, 어렴풋한 촉감과 냄새에 대한 기억 같은 것 말이다. 이 책의 사진가 마린 바스가 할머니의 모습을 기억해야 한다면, 그 기억의 형태는 딱 이 책과 같은 모습 아니었을까.


▒ 김진영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 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