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자동차 업계 신사협정의 촉발시킨 닛산 스카이라인 GTR(오른쪽). 사진 황욱익
일본 자동차 업계 신사협정의 촉발시킨 닛산 스카이라인 GTR(오른쪽). 사진 황욱익

신사협정(gentleman’s agreement)이라는 단어는 산업계에서 널리 쓰이는 용어다. 원래는 정당 간에 이뤄지는 비공식 협정으로 법적 구속력을 갖지는 않는다. 신사협정을 체결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과도한 경쟁이나 독과점을 막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산업계에서 신사협정은 다양한 방식으로 소개됐다. 자동차 업계에서도 신사협정이 있었던 시기가 있다. 자동차 업계 신사협정 중 가장 유명한 사례는 독일과 일본의 자동차 메이커가 나름의 기준을 둔 비공식적 협정을 21세기 초까지 유지한 것이다.

독일과 일본의 자동차 메이커가 나름의 비공식 협정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지금이야 자동차 산업이 경쟁보다 플랫폼 공유와 기술 공유를 통해 시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과거 자동차 시장은 철저하게 성능 위주로 성장해 왔다. 과도한 기술 경쟁과 모터스포츠를 통한 경쟁을 빼놓으면 20세기의 자동차 산업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조차 무의미할 정도다. 이런 경쟁은 자동차가 발명됐을 때부터 시작됐고, 모터스포츠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낸 1950년대를 거쳐 1980년대 ‘광기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개발자와 소비자 모두가 성능에 중독된 상태였다. 이러한 경쟁 구도는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됐다. 인명 사고와 안전성 문제가 슬슬 표면으로 올라오기 시작할 때 독일의 자동차 메이커가 나름의 룰을 정하기 시작했는데 자동차 업계에서 만들어진 신사협정으로 가장 유명한 사례다.


메르세데스-벤츠와 BMW의 격차는 라이벌이라고 할 수 없는 수준이다. 사진 다임러그룹
메르세데스-벤츠와 BMW의 격차는 라이벌이라고 할 수 없는 수준이다. 사진 다임러그룹

독일 자동차, 시속 250㎞로 제한

표면적으로 독일 자동차 메이커의 신사협정은 속도제한에 기준을 뒀다. 독일 자동차 메이커의 신사협정은 1980년대를 기점으로 자동차의 성능이 급격하게 높아지면서 시작됐다. 어느 쪽이 먼저 시작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메르세데스-벤츠와 BMW의 밀약이 독일 자동차 메이커 신사협정의 시발점이다. 독일의 신사협정 내용은 매우 간단하다. 세단과 왜건 같은 일반적인 차의 최고속력을 시속 250㎞로 제한한다는 것 외에 다른 세부 사항은 없었다. 독일 자동차 경주대회인 DTM(독일 투어링카 마스터스)에서 이미 속력과 출력 경쟁에따른 홍역을 치른 두 메이커의 신사협정은 표면적으로 안전한 자동차 만들기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성능 향상을 위한 비용 절감에 있었다. 모터스포츠나 속도 경쟁에 들어가는 비용을 생각했을 때 기업으로서는 비용 회수에 대한 부분이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다. 자동차 성능을 공식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모터스포츠 업계에는 우스갯소리로 1초 빨라지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200억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독일의 신사협정은 여러모로 허점이 많았다. 우선 세단과 왜건이라는 단서가 붙었기 때문에 쿠페형 스포츠 모델은 해당되지 않았고 포르쉐는 아예 이 신사협정과는 무관한 스포츠카 전문 메이커였다. 여기에 좀 더 유연한 규정을 가진 독일의 자동차 관련 법규까지(그 덕에 튜너들의 입지가 단단해졌다) 생각하면 그야말로 메르세데스-벤츠와 BMW 같은 대규모 메이커의 ‘있어 보이는 협약’ 정도였다.

그렇다고 독일 자동차 메이커가 신사협정 자체를 무시하거나 쉽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초반에는 최고속력 시속 250㎞를 만들 수 있는 회사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21세기에도 독일 자동차 메이커의 신사협정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초기 두 개의 메이커에 불과했던 협정 대상 메이커는 보다 확대됐고,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세단과 왜건 분야에서는 지금까지도 유지 중이다. 물론 앞에서 설명했다시피 법적인 구속력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가진 나름의 자존심 같은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2005년에 끝난 일본 차 업계의 신사협정

독일보다 좀 더 구체적이었던 일본 자동차 메이커의 신사협정은 2005년에 끝났다. 일본의 자동차 시장은 거품 경제가 절정이던 1980년대에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거품 경제가 몰락하기 전까지 일본에서 생산된 스포츠카는 무려 40여 종에 달했으며 경차부터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럭셔리 차량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종류의 스포츠카를 소유하기도 했다. 스포츠카뿐이 아니었다. 이른바 터보 엔진을 장착한 고출력 세단이 대거 등장하면서 스포츠카와 세단의 구분이 모호해지기도 했다.

일본 자동차 메이커의 신사협정은 복잡한 일본 내 자동차 관련 법규, 사회적인 문제와 연관이 있었다. 자동차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과 그에 따른 자동차 폭주족 문제가 대두되면서 일본의 자동차 메이커는 최고출력 280마력, 최고속도 시속 180㎞라는 신사협정을 채결한다. 그래서 2000년대 초반까지 생산된 일본의 자동차(스포츠카 포함)의 계기판 최고속력이 180㎞/h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의 신사협정은 일본을 대표한 4대 스포츠카(도요타 수프라, 혼다 NSX, 닛산 스카이라인 GTR, 마쓰다 RX7)도 피해갈 수 없었다. 이들은 공교롭게 환경 규제와 채산성 문제로 2002년 사이좋게 단종되는데 이후에 아주 재미있는 데이터가 일본의 한 자동차 전문지에 실리면서 신사협정에 관한 이면이 공개된다. 실험을 진행했던 자동차 전문지는 메이커 발표 최고출력 280마력 자동차를 다이너모 미터(출력 계측 장비)에 올려 실제 출력을 측정하고 그 내용을 공개했다. 연식이나 주행거리에 관한 변수는 있었지만 측정 결과치는 모두 신뢰할 수 있는 오차 범위 내에 있었다. 결과는 신사협정은 표면적이었을 뿐 일본의 4대 스포츠카가 출력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대부분은 실제 출력이 메이커 발표치보다 아래였고 스카이라인 GTR(R34)만 신사협정 규제치를 훨씬 넘는 320마력을 냈다는 것이다. 사실 신사협정에 가장 불리했던 메이커가 닛산이었는데 스카이라인 GTR에 탑재되는 트윈터보 RB 엔진은 개발 당시 최고출력 기준이 무려 500마력 이상이었다.

일본의 신사협정은 튜닝 시장의 성장에도 큰 밑거름이 됐다. 소비자들은 280마력 최고속도 시속 180㎞에 공공연한 불만이 있었고 덕분에 스포츠카와 일반 승용차까지 튜닝 시장에 몰렸기 때문이다. 물론 신사협정 자체가 법적인 구속력을 갖지는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튜너는 다양한 튜닝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이 안에는 스포츠카를 비롯해 미니밴, 경차, 일반 세단 등 대부분의 자동차가 포함되며 현재까지 일본의 튜닝 시장을 탄탄하게 떠받치고 있다.

이익을 위해서는 협력이 미덕이 된 시대에 과거의 신사협정은 왠지 모를 낭만이 느껴진다. 자동차 기술이 상향 평준화하고 IT 기기화하면서 메이커 사이의 출력이나 최고속력 등 과거 자동차의 성능을 나타냈던 지표의 의미가 퇴색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자동차 개발자들은 각자 고유한 성능을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혹자는 자동차 메이커의 신사협정에 대해 케케묵은 과거의 한 에피소드 정도로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동차의 편리함은 기술 경쟁을 통해 발전해 왔으며 그 안에는 많은 사람의 수고와 자동차 메이커의 노력이 있었고 신사협정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