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바하’는 불교 세계관을 중심으로 한국의 종교 문화를 정면으로 다룬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영화 ‘사바하’는 불교 세계관을 중심으로 한국의 종교 문화를 정면으로 다룬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사이비(似而非)를 경계해야 한다고 처음 경고한 건 맹자다. ‘맹자’ ‘진심장구하(盡心章句下)’ 편에는 “공자 왈 오사이비자(孔子 曰 惡似而非者)”라는 경구가 나온다. 이 말은 공자가 겉보기에는 비슷하지만 근본은 다른 것을 싫어한다는 뜻이다. 이때부터 겉보기에 비슷하지만 사실은 완전히 다른 것을 사이비로 부르기 시작했다.

수천 년 전에 쓰인 유교 경전이 경계했을 만큼 사이비의 역사는 오래되고 깊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을 참고해도 좋다. 러셀은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라는 짧은 에세이를 통해 사람을 현혹하는 사이비의 역사를 명쾌하게 정리한 바 있다. 러셀에 따르면 사이비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가운데 처음 나타났고 중세 시대에는 종교로 세력을 확장했다. 사이비를 통해 군중을 통제하려 한 정치 지도자들도 사이비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러셀은 자신의 평생을 사이비들을 고발하는 데 썼지만 “여전히 지적 쓰레기가 지긋지긋하게 많다”며 한탄했다.


첨단기술 시대에도 사이비 활개

안타까운 건 맹자나 러셀 같은 당대의 지식인들이 두 팔 걷고 나섬에도 사이비와 관련한 문제는 도무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학·기술이 수천 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고, 마음만 먹으면 백과사전에 담긴 내용을 1분이면 찾아볼 수 있는 시대지만, 사이비는 오히려 활개 치고 있다. 도대체 사이비에 영생의 힘을 주는 원천은 무엇일까.

이 난해한 물음에 실마리를 제공할 만한 영화가 최근에 개봉했다. ‘검은 사제들’로 한국형 오컬트(심령) 영화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장재현 감독의 신작 ‘사바하’다. 전작인 ‘검은 사제들’이 구마(驅魔)의식을 다뤘다면 ‘사바하’는 불교 세계관을 중심으로 한국의 종교 문화를 정면으로 다룬다. 사이비 종교 단체의 뒤를 쫓는 박 목사(이정재)와 그의 조수인 요셉(이다윗)이 한 축을 맡고, 사이비 종교 단체인 ‘사슴동산’과 그곳의 일원인 나한(박정민)이 다른 한 축을 맡고 있다. 그 중간에 강원도 영월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쌍둥이 자매의 이야기가 놓여 있다.

영화적인 재미만 놓고 보면 ‘사바하’는 전작인 ‘검은 사제들’에 비해 밋밋한 편이다. 일단 오컬트 영화답지 않게 잔혹하고 공포스러운 장면이 드물다. ‘검은 사제들’의 영신(박소담)을 생각하고 ‘사바하’의 금화(쌍둥이 자매 중 둘째·이재인)를 본다면 여러 가지로 실망하기 쉽다. 분량이나 임팩트 모두 금화는 영신에 못 미친다. 영화 속에는 손에 땀을 쥐고 보게 되는 장면이 거의 없다. 이야기의 전개나 등장인물도 다소 허망한 구석이 있다. 설정과 인물의 낭비가 적지 않다.

그런데도 이 영화를 나쁘지 않게 평가하는 까닭은 지금 이 시점에 돌아볼 만한 구석이 많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현혹하고 파멸로 이끄는 수많은 사이비, 그들의 작동 원리와 생존 전략 그리고 파멸에 이르는 과정까지, 이 영화는 생생하게 보여준다.

‘사바하’ 속 사이비 종교 단체인 사슴동산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이들의 목표는 단순하다. 교주 김제석의 영생이 이들의 유일한 존재 이유다. 이들은 교주의 영생을 방해할 수 있는 소녀의 탄생을 막기 위해 수십여 명의 어린 소녀들을 거리낌 없이 살해한다. 아무리 사이비 종교에 빠져들었다 해도 제정신으로 어떻게 수십여 명의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정의를 자처하는 자, 사이비가 되다

사슴동산의 행동대장 격인 나한의 말과 행동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는 스스로를 정의라고 믿고 있다. 사슴동산의 교인들은 나한을 장군으로 부르면서 떠받든다. ‘악귀를 물리치는 악신’이라는 거창한 수식어까지 붙는다. 끝없는 세뇌와 반복 학습 속에서 나한과 그를 따르는 무리는 자신들을 정의의 사도로 믿기 시작한다. 스스로 정의가 되는 순간 다른 정의는 존재할 수 없다. 법과 원칙,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이 공유하는 가치관은 부정된다. 이들에게는 자신들만이 유일한 정의다.

많은 이들이 사이비에 빠져드는 사람들을 나약하거나 현실 감각이 부족하거나 특별히 악한 이들로 취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이비에 빠지는 대부분의 사람은 지극히 평범한 경우가 많다. 지하철 사린 테러 사건에 가담한 일본의 옴진리교 교인들은 사회에 부적응한 악마 같은 이들이 아니었다. 의사나 변호사 같은 엘리트 집단의 일원이었다. 다만 그들은 ‘아사하라 쇼코’라는 다른 정의에 빠졌을 뿐이다.

‘사바하’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간다. 그리고 한 걸음을 더 내디딘 자리에 사슴동산의 교주인 김제석이 있다. 옴진리교의 아사하라 쇼코가 사이비인 ‘가짜’ 종교 지도자였다면, 김제석은 ‘진짜’로 묘사된다. 티베트의 고승조차도 머리를 숙였을 정도니 말 다 했다. 영화 속 김제석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미륵이다. 적어도 어느 순간까지는 말이다. ‘사바하’가 던지는 진짜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미륵으로 불릴 정도로 세상의 도를 깨우친 김제석이 어째서 그 많은 무고한 생명을 죽이라는 지시를 내린 걸까.

이 질문에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라고 하면 오답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라고 해야 정답이다.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는 집단은 결국 타락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런 사례를 역사 속에서 무궁무진하게 봐왔다. 정의를 외치며 혁명을 일으킨 세력은 결국 그들이 타도한 전 정권을 닮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사이비라고 해서 모두가 태생부터 사이비였던 것은 아니다. 진짜가 사이비가 되기도 한다. 아니, 스스로 내려올 때를 모르는 진짜는 언젠가 반드시 사이비가 되고 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세상의 이치다.

‘사바하’는 종교를 이야기하지만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종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스스로를 정의의 사도로 정의하는 이들이 끝내 자신들만의 세계에 갇혀 다른 이들을 억압하고 불의의 세력으로 타락하는 건 종교계만의 일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 사회에서 이런 현상은 정치계나 경제계에서 더욱 자주 목격된다. 정의를 외치는 자들은 늘 더 강한 힘을 원하기 마련이다.

정치인들이 ‘사바하’를 단체 관람하는 건 어떨까 싶다. 정치인들은 이따금 정치적인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는 영화를 함께 모여 보곤 한다. 아직까지 ‘사바하’를 정치인들이 단체 관람했다는 뉴스가 없는 걸 보면 이 영화는 그들의 관심사에서 비켜나 있는 듯하다. 그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인데도 말이다.

그 어떤 정의도 100년 동안 싱싱하게 팔딱일 수는 없다. 아무리 화려하고 산뜻하게 치장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썩기 마련이다. 한때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던 김제석이 겉만 멀쩡할 뿐 노추(老醜)한 사이비가 된 것처럼 말이다. 불에 타 문드러지는 김제석의 여섯 손가락을 보며 스스로의 정의를 되돌아봐야 할 이들이 지금 한국 사회에는 한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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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진리교 사린 테러 사건 일본 종교단체 옴진리교 교인들이 1995년 3월 20일 오전 8시쯤 도쿄 지하철에 맹독가스인 사린을 살포한 사건이다. 출근 시간에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진 테러에 5500여 명이 중독 현상으로 쓰러졌고 12명은 끝내 목숨을 잃었다. 옴진리교의 아사하라 쇼코 교주는 1995년 11월에 인류가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고 설교해 왔다. 이 사건으로 옴진리교 교인 29명이 기소됐고, 아사하라 쇼코는 작년 8월 사형당했다.

이 영화엔 이 술

오니고로시(鬼ころし)

‘사바하’같이 음산한 영화를 보고 나면 어쩐지 잠자리가 뒤숭숭할 것만 같다. 혼자 집에 있노라면 평소와 다를 게 없는데도 자꾸만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게 된다. 이럴 땐 귀신 쫓는 술을 한잔하고 푹 자는 게 상책이다. 귀신 쫓는 술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는 말이 나올 것도 같지만 실제로 그런 술이 있다. 바로 일본의 사케인 ‘오니고로시’다.

오니고로시라는 이름 자체가 ‘귀신을 쫓는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일본에는 입춘 절분에 귀신을 쫓기 위해 볶은 콩을 던지는 풍습이 있다. 이때 함께 마시는 술이 오니고로시다. 오니고로시는 굉장히 다양한 브랜드가 있는데 국내에서도 이자카야나 대형마트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