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두고 아끼고 배워가는 관계가 더 멋질 때도 있다.
평생을 두고 아끼고 배워가는 관계가 더 멋질 때도 있다.

한국 또한 그 시장이 넓어지고 있지만, 내가 사는 미국에서는 커플 상담의 인기가 어마어마하다. 나 역시 석 달 정도에 걸쳐 부부관계 상담을 받은 경험이 있고 가까운 친구들 중에서 커플 상담을 받지 않은 친구보다 받은 친구가 더 많을 만큼 미국 중산층 에서는 필요에 따라 커플 상담을 받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다. 관련된 책도 대중적으로 인기를 끄는데, 벨기에 출신 유대인 심리 상담가 에스더 페럴은 현장에서 활동하는 상담가로는 물론 저자 및 강연자로서도 큰 명성을 얻고 있다. 몇 년 전 그녀의 책을 흥미롭게 읽은 데 이어 최근에 그녀의 이름이 오디오북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당장에 구입했다. 그녀가 진행했던 팟캐스트 일부를 오디오북 파일로 만든 것이었는데, 팟캐스트는 익명의 커플을 초대해서 상담을 진행하고 그 과정을 적절히 편집해서 들려주었다. 자칫하면 지루하고 늘어질 수 있는 포맷이라고 생각했으나, 듣다 보니 상담 세션이라기보다는 탐정 에르퀼 푸아로(애거사 크리스티에 의해 창조된 소설상의 탐정)가 사건을 맡아 추리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느낌이 들 만큼 흥미진진했다.

형식은 단순했다. 공감대를 자극할 만한 사연과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피력하는 각자의 입장을 에스더 페럴은 상담 과정을 통해 보다 명료하게 정리하고 문제를 집중적으로 드러나게 한 뒤 적절한 논리와 잠정적 판단을 이어가며 세션을 마무리한다. 진행의 예리함이라든가 내담자의 속 깊은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에스더 페럴의 능숙함은 그녀의 프랑스어 억양 강한 영어 덕분에 더더욱 푸아로(그 역시 벨기에 출신이다)의 추리극을 연상시킨다.

오디오북에 등장하는 여러 커플 중, 작은 마을에 사는 불륜 커플의 상담 세션이 가장 인상 깊었다. 흔히 접하는 불륜 스토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에스더 페럴의 조언이 색달라서 기억에 각인됐다. 가정이 있는 남녀가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각자의 가정을 버릴 만큼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됐지만, 불륜의 당사자인 남성은 상대 여성마저 속이고 다른 관계를 전전하는 걸 멈추지 못했다. 상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어린 시절과 그에 관련된 결핍이 드러나고 그들이 갇혀 있는 사고의 한계와 행동의 패턴이 어느 정도 설명된다. 삶의 선택과 결정의 여정을 두고 성장 과정과 환경을 단순화해 판단하는 시도는 위험하기 짝이 없지만, 에스더 페럴이 이끄는 상담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원인과 결과가 뚜렷한 추리 소설 읽듯 명쾌해서 귀에 쏙쏙 들어온다. 그녀가 적절한 시기에 던지는 질문과 조언 또한 정곡을 찌르는 듯 보여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한다. 인생사가 이렇게 쉽게 풀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인간은 보다 복잡한 얼개로 얽혀 있고, 관계는 제삼자가 등장해서 기적처럼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해결점이 보이더라도 단번에 달라지지 않는다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제삼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봄으로써 관계를 둘러싼 꽉 막힌 대기를 환기시킬 수는 있다. 에스더 페럴이 작은 마을의 불륜 커플에게 던진 마지막 조언은 그들뿐 아니라 세상의 숱한 관계에도 참고가 될 만한 제안이기에 여기에 옮겨 적는다. 에스더 페럴은 말한다. “일반적인 커플로서 지내려고 하는 것보다는 삶 전체를 관통할 수 있는 친구 되기를 실천해 보면 어떨까?”

우리는 자신의 결핍을 잘 알아주거나, 유사한 혹은 연계된 결핍을 가진 사람에게 강렬하게 이끌린다. 그의 결핍을 알아봐 주는 이는 나밖에 없다는 쾌감이 상대의 지속적인 관계 남용을 눈감아 주게 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는 연인임에도 그의 결핍을 이해하고 있다는 지적 우월감과 다른 어느 연인도 자신을 대체하지 못하리라는 기이한 자부심에 취해서 관계를 인내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이것이 둘 사이의 합의와 적절한 소통 및 건강한 책임 등으로 이어진다면 다른 문제이겠지만, 거짓과 회피, 적당한 눈속임으로 무마돼 결국은 관계의 고통이 기쁨을 압도하게 된다면 관계 자체의 성질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관계의 건강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해

존재를 뒤흔드는 매혹은 이질적인 상대에게서도 찾아올 수 있지만, 자기애에 밀착된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나와 닮은 사람, 나의 상처를 나머지 반쪽처럼 품고 있는 상대에 대한 이끌림은 강력하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그와 같은 이끌림을 에로틱한 욕망으로 연결시킨다. 추락하듯 빠져들고 그 속도감이 주는 쾌감은 대체하기 힘들 만큼 짜릿하다. 당연하지 않은가. 추락의 속도만큼 존재를 뒤흔드는 것이 어디 있겠나. 자신과 상대의 무게를 모조리 얹은 무게만큼 치명적인 것이 있을까. 이것을 긍정적 에너지로 치환해서, 안정적인 착지와 도약 및 상승의 계기로 활용할 수 있다면 이상적이겠지만 대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차라리 우리의 사고와 개념을 확장시키면 어떨까. 관계를 규정하는 방식을 좀 더 자유롭게 혹은 다양하게 넓히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 보면서 말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그리고 너무 오래 이성애자인 남녀 간의 우정을 폄훼해 왔다. 쉽게 유지하기 힘들겠지만 유지되는 한 의미가 있음에도 말이다. 연인 관계도 부부 관계도 동성 간의 우정도 어느 하나 쉽지 않은데, 무작정 이성 간의 우정에만 더 힘든 허들이 존재한다고 믿는 건 우리가 살아온 문화와 관습이 편견에 사로잡혀서는 아닐까. 연인 관계에도 사랑과 우정이 공존하는 것처럼, 우정의 관계에서도 어느 정도 에로틱한 긴장감이 존재할 수 있다. 잠깐의 흔들림이 지나가더라도 성숙한 노력이 이어진다면 관계는 보다 더 건강하고 풍부한 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 서로에게 느끼는 강렬한 호감이 모조리 이성 간의 연애와 사랑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보다 길고 보다 느린 템포로, 어쩌면 삶 전체를 지나가며 쌓아갈 우정이 어울리는 상대도 있다. 짧게 태우고 소비하고 지나가는 것보다는, 평생을 두고 아끼고 배워가는 관계 또한 멋지지 않은가. 그리고 이러한 관계란 때로는 연인으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의 긴장감과 거리감을 유지할 때 더 쉽고 더 풍부하게 창조될 수 있다. 동성 간의 친구는 물론이고 아이와 부모의 관계 역시 그러하다. 관계의 종류가 무엇이든, 현명하고 지혜롭게 상황을 헤쳐가고 관계의 건강함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좀 더 관계 자체에 대해 창의적일 필요가 있다. 그것이 결국 삶 전체를 창의적으로 만들 것이다.


▒ 이서희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영화학교 ESEC 졸업, 파리3대학 영화과 석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