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조명, 콘솔, 거치대 등 일상적 소재를 예술 작품으로 표현했다. 사진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 센터
거울, 조명, 콘솔, 거치대 등 일상적 소재를 예술 작품으로 표현했다. 사진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 센터

믿을 수 없겠지만 지금 당신의 사무실 책상 위엔 20세기 최고의 걸작 몇 점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을 것이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Museum of Modern Art)의 건축·디자인 선임 큐레이터 파올라 안토넬리의 견해에 따라 그 수줍고 소탈한 이름들을 나열할 것 같으면, 다음과 같다. 거짓 없고 악의 없는 형태의 순백 티백, 진정한 미니멀리즘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 주는 BIC 볼펜, 핼러윈을 기념한 호박 상자 안의 M&M’s 플레인 초콜릿 캔디까지. 뉴욕 현대미술관은 피카소나 리히텐슈타인 같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가의 작품들을 수집하는 동시에 볼펜, 손톱깎이, 포스트잇 따위의 제품들도 정성스레 모으고 전시한다. 이름하여 ‘험블 마스터피스(Humble masterpieces)’다. 시대를 상징하는 이 경이로운 일상의 디자인은 지금, 이 순간에도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다른 방식으로 일상의 사물을 바라보는 시도는 새로운 발상의 출발점이다.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뿐만 아니라 우리의 식탁 위 스파게티와 포크는 물론, 콘택트렌즈까지 생각해낸 천재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말이다. 3월 15일부터 5월 26일까지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에서 열리는 ‘테이크 미 홈(Take Me Home)’ 전시는 꼭 한번 가볼 것을 권한다. 청년 미술인들의 자발적 전시 플랫폼 소쇼(SOSHO), 아티스트 프루프(Artist Proof), 팩(PACK), 팩토리2(FACTORY2), 카스코(CASUKO)를 소개하며 관객들에게 관람과 구매 경험을 동시에 제공하는데, 너무도 일상적인 소재들이 다양하게 해석돼 새로운 의미가 발생하는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이들 플랫폼은 미술 전시장을 각각의 흥미로운 기획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이 예술가의 작품을 쉽게 접하고 구매할 수 있도록 경험의 장을 넓힌다. 소쇼는 이번 전시에서 거울, 조명, 콘솔, 거치대 등의 다양한 실용적 기능을 내포한 오브제(생활에 쓰이는 갖가지 물건을 작품에 그대로 이용한 것) 시리즈를 제작했다. 전시 장소도 건물 지하 3층의 머신룸으로 이색적이다. 팩토리2는 본격적으로 에디션 사업을 시작한 2012년부터 현재까지 만들어진 에디션 제품들과 작업 재료 및 제작 노트, 인터뷰 영상 등을 전시하며, 이 조각 작품들이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시간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바라본다. 개별로는 작고 쓸모없어 보일 수 있지만 전시 공간 안에서 이들은 저마다의 비밀스러운 스토리를 간직한 예술 작품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주거 공간에도 디자인 숨어 있어

4월 3일부터 7일까지 코엑스에서 열린 ‘2019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도 ‘일상의 디자인’이 있다. ‘행복이 가득한 집 만들기’를 주제로 최신 라이프 스타일 제품이 한자리에서 선을 보였다. 사용자의 음성에 따라 공기 청정기를 켜고 전등을 끄는 인공지능 홈로봇, 사용자의 사용 시간대별 최적 온도를 학습해 적용하는 스마트에어컨 등 소문으로만 듣던 신문물과 요즘의 리빙 트렌드를 읽을 수 있는 제품들이 있다.

모듈러(modular) 가구는 특히 눈에 띄는 제품이다. 모듈러 가구는 일정한 비율과 규격에 맞춰 다양한 형태로 조립하는 가구다. 모듈러 시스템은 모더니즘 건축을 대표하는 르코르뷔지에 디자인의 상징과도 같다. 그는 인체의 척도와 비율을 기초로 황금분할을 찾아 이를 건축과 설계에 적용했다. 사람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디자인에 대한 고민은 21세기에 들어 모듈러 가구로 확장된다.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사이즈와 컬러, 소재도 선택할 수 있는 모듈러 가구는 1인 가구 시대의 디자인 키워드다. 생활 공간의 면적은 줄어들었지만 대신 나만의 스타일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나나랜드’와 같은 맥락이다. 영화 ‘라라랜드’가 꿈꾸는 이들의 유토피아라면 나나랜드는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나만의 기준으로 나를 사랑하는 밀레니얼 세대가 살아가는 도시다. 전시장 내에서 번쩍이는 위용을 자랑하던 유에스엠(USM) 큐브 빌딩이 바로 그런 나나랜드다. 스위스 엔지니어 파울 셰러와 건축가 프리츠 할러가 합작 개발한 세계 최초의 모듈러 가구 브랜드 ‘유에스엠 할러(USM Haller)’는 모듈러 가구의 새 시대를 열었다.

공유 주거(Co-Living) 디자인을 선보인 작품도 눈길을 끈다. 침실 등 최소한의 개인 공간을 제외한 나머지 여유 공간을 이웃과 나눠 쓰는 방식의 공유 주거는 단순히 한집에 여럿이 사는 셰어 하우스 개념을 넘어 일종의 마을 같은 커뮤니티 공동체로 진화 중이다. ‘2019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서는 BMW 미니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미니 리빙’의 총괄 디렉터인 건축가 오케 하우저(Oke Hauser)와 국내 공간 디자이너 김치호가 협업한 특별 전시를 선보였다. 국내에서도 이 같은 흐름을 느낄 수 있다. 코오롱이 야심 차게 선보인 ‘역삼 트리하우스’는 72가구로 가장 큰 펜트하우스가 36.3㎡(11평)에 불과하다. 대신 카페 분위기의 코워킹 스페이스와 루프톱 테라스, 정원은 물론 애완동물 산책 공간을 공동으로 사용한다.

그 밖에도 아티스트 그룹 ‘길종상가’의 박길종이 주방용품 브랜드 코렐(Corelle)을 위해 디자인한 세트, DJ가 종일 턴테이블 디제잉을 선보이던 가구 브랜드 빌라 레코드(Villa Records)처럼 뉴트로 콘셉트로 꾸민 공간이 관람객들의 인기를 끌었다. 전시장 내의 카페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모든 것이 디자인이라면 우리가 냄새 맡고 맛보는 음식 역시 디자인이다. 디자인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기 시작하면 사소한 것도 쉽게 지나칠 수가 없다. 예를 들면 이런 건 어떤가? 세계 박람회가 열리던 무더운 여름, 아이스크림을 담아 낼 접시가 동이 나 급하게 공수한 것이 바로 와플 가게의 바삭바삭한 과자였다는 사실 말이다. 그게 바로 오늘날 아이스크림콘의 시초가 됐고, 1904년 세인트루이스 세계박람회는 ‘풍요로운 뿔이 솟은 박람회’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대단한 깨달음은 아닐지라도 평범한 일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 아닐까? 디자인이란 결국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다. 겸손하고 조용한 지구상의 이 모든 아름다운 것들에 경배를!


▒ 이미혜
패션·미술 칼럼니스트, 문화기획자, 보그코리아 컨트리뷰팅 에디터


Plus Point

아무것이나 디자인은 아냐…‘일상의 디자인’ 규칙 네 가지

“샹들리에부터 백화점 영수증까지 모든 것엔 디자인의 손길이 묻어 있어요. 만약 당신이 아름다움의 규칙을 읽는 법을 배운다면 부엌 개수대의 서랍, 욕실의 수납장조차 걸작이 살아 숨쉬는 박물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예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리고 있는 제22회 트리엔날레에서 만난 총감독 파올라 안토넬리는 이렇게 말했다. 안토넬리가 말하는 ‘일상의 디자인’을 완성하는 아름다움의 규칙이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사물이 그 목적에 맞게 기능을 발휘할 것. 그러니까 슬리브는 뜨거운 커피를 담은 잔에 손이 데지 않게 해야 하고, 모름지기 레코더란 소리를 잘 담을 수 있어야 한다.

규칙의 두 번째는 적정한 가격과 함께 폐기는 용이한지, 재활용은 가능한지 등 환경친화적인 요소다. 에너지와 시간, 자원을 낭비하는 물건은 여기서 제외된다. 초대 카드 하나를 종이에 포장해 리본으로 묶은 후 버블랩(뽁뽁이)으로 둘둘 말아 다시 박스에 넣는 경우다. 제아무리 화려한 척 폼을 잡아도 이건 훌륭한 디자인이 아니다.

그다음은 감성적인 차원으로,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대한 점이다. 이제는 거의 사라졌지만 구식 워크맨, 지하철 토큰 같은 것들도 무척 그리운 물건들이다. 사람을 웃게 만든다면 역시 좋은 디자인이다. 얼마 전 타계한 전설적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멘디니가 만든 사람 얼굴 모양의 와인 오프너 안나 G 같은 것 말이다.

네 번째는 디자이너의 아이디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만약에 그 물건이 없다면 얼마나 아쉬워할 것인가’의 여부다. 아름다운 데다 아련한 향수를 자아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