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훈. 사진 조선일보 DB
소설가 김훈. 사진 조선일보 DB

연필로 쓰기
김훈 지음|문학동네|468쪽|1만5500원

소설가 김훈(71)이 오래간만에 산문집을 냈다. 그는 소설을 쓰기에 앞서 뛰어난 에세이스트로 먼저 이름을 높였다. 소설 ‘칼의 노래’ 이전에 그는 산문집 ‘풍경과 상처’를 통해 밀도 있는 서정과 입심 좋은 서사를 조화롭게 펼쳐놓았다. ‘자전거 여행’이나 ‘라면을 끓이며’ 같은 산문집도 간결하면서 힘찬 문체와 비장하면서 숭고한 어조가 빚어내는 문장의 향연을 베풀었다.

이번에 나온 산문집 ‘연필로 쓰기’는 김훈이 어느덧 고희를 맞이한 지난 3년 사이에 쓴 글을 중심으로 꾸며졌다. “나는 20년째 일산 신도시에서 살고 있다. 쉰 살 때 이사 와서 지금 일흔 살이 되었다”라고 한 김훈은 “너무 늦기는 했지만, 나이를 먹으니까 자신을 옥죄던 자의식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나는 흐리멍덩해지고 또 편안해진다”라고 ‘늙기의 기쁨’을 예찬했다. “자의식이 물러서야 세상이 보이는데, 이때 보이는 것은 처음 보는 새로운 것들이 아니라 늘 보던 것들의 새로움이다. 너무 늦었기 때문에 더욱 선명하다. 이것은 ‘본다’가 아니라 ‘보인다’의 세계이다.”

김훈이 노년의 시선을 투사한 세상이 되비쳐 보여주는 풍경이란, 구체적으로 김훈이 태어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해부터 촛불과 태극기가 충돌하는 가운데 한반도 비핵화와 냉전 종식을 향한 행보가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오늘의 역사 현장으로 꾸며져 있다. 소소한 일상에서 착상을 건진 산문이 대부분이지만, 생활의 정념을 유도하고 지배하는 시대의 사건과 정신에 이끌려 분출되는 노년의 언어는 조금도 주저함 없이 강건할 뿐 아니라 역사와 현실에 대한 연민과 비애 또한 무겁게 머금고 있다. 그렇지만 그 글이 목청을 높이거나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상태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밥’이 상징하는 삶의 소박한 구체성에 늘 기반을 두기 때문에 역사를 지배한 이념의 추상성을, 그것의 허망한 놀음을 가볍게 뒤집어버리면서 경쾌한 문체의 율동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지난해 남북 정상회담으로 전개된 분단 상황은 ‘냉면’을 중심으로 재조명된다. “맛은 인간 정서의 심층부를 형성한다. 삶은 설명될 수 없고, 다만 경험할 뿐인데, 맛 또한 그러하다. (중략) 냉면은 6·25전쟁 때 내려온 월남 피난민들이 부산에서 본격적으로 확산시켰다. 냉면의 확산은 전선(戰線)의 진퇴에 따른 것이었지만, 냉면 육수에는 애초부터 철조망이 없었다. 이것이 냉면의 힘이고 누항(陋巷)의 힘이다. 이러니 냉면이란 대체 무엇인가.”

김훈은 냉면 한 그릇을 놓고 역사를 생각한다. 역사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몸으로 체험한 역사와 책을 통해 추체험한 역사를 두루 모아놓고 걸러내고 이해하려고 애쓴다.

“냉면을 먹으면서 나는 개마고원의 저녁놀과 백두산의 새벽과 압록강 하구의 밀물과 썰물을 생각한다. 냉면을 먹으면서 나는 평양의 박치기꾼과 강계의 미녀들을 생각한다. 냉면을 먹으면서 나는 마지막 철수선이 떠났던 1950년 12월 24일(내가 세 살 때) 흥남부두의 눈보라와 아우성을 생각한다. 냉면을 먹으면서 나는 박헌영, 임화, 김남천의 죽음을 생각하고 병자호란 때 만주로 끌려간 50만 명의 포로를 생각한다. 냉면 육수를 마시면서 나는 이 모든 그리움과 회한과 상처를 다 합친 것보다 더 큰 미래가 있음을 안다. 냉면의 맛은 ‘허수무레하고 슴슴하다’. 냉면은 공적 개방성을 미각으로 바꾸어서 사람을 먹여준다.”

박해현 조선일보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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