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강의 명소 재인폭포의 봄 풍경. 사진 이우석
한탄강의 명소 재인폭포의 봄 풍경. 사진 이우석

사오월 청춘, 푸르고 흥겹다. 이제 적어도 한반도 중부까지는 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무르익은 봄을 앞두고 경기도 연천이 슬슬 존재감을 드러낸다. 국내 지명 중 ‘천(川)’ 자가 들어가는 곳이 거개 그렇듯, 연천(漣川)에도 물이 많다. 참고로 국내에 천 자 지명 도시가 많은 이유는 조선 태종 13년(1413년) 전국 지방 고을의 이름에 주(州) 자가 붙은 곳 중 도호부 이하 작은 군현에 대해 산(山)이나 천(川) 자로 바꾸게 해서 이리 많아졌다고 한다.

연천은 그리 큰 고을은 아니지만 자연지세가 좋은 곳이다. 한탄강과 임진강이 지나고 지천인 차탄천이 깎아지른 듯한 주상절리의 협곡을 유유히 흘러내리는 곳, 물 좋기로는 어디에 뒤지지 않는다. 1970년대에는 휴가철마다 임시열차 편을 띄울 만큼 유명했던 곳이 ‘한탄강 유원지(지금의 한탄강 관광지)’다. 당시 국내에서 비키니 차림의 여성을 볼 수 있었던 곳은 해운대와 한탄강뿐이었다고 한다.

한탄강은 인근 동두천이나 의정부, 서울 등에서 미군과 가족들이 여름철 피서를 즐기러 오던 곳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연천이 아쉽게도 지금은 군사지역 정도로만 알려졌다.

하지만 연천 땅은 역사 이전에 세계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 중 하나였다. 구석기 시대 한반도의 수도 연천을 갔다.


전곡선사박물관의 전시실. 사진 이우석
전곡선사박물관의 전시실. 사진 이우석

억겁의 세월을 두고 흐르는 물

고문리 재인폭포는 평지에서 땅속 아래로 떨어지는 지하 폭포다.

이곳에는 한 가지 재미난 이야기가 전해온다. 재인(才人)은 광대, 요즘으로 치면 연예인이다. 그 옛날에도 남자 연예인들은 그 재주로 여심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 재인의 아름다운 부인에게 흑심을 품은 이 고을 사또가 못된 계략을 꾸몄다.

스무 길도 넘는 폭포 위에서 남편이 줄타기를 하는 도중 줄을 몰래 끊어버렸다. 그리고 부인을 품으려 했지만, 정절이 높았던 부인은 사또의 코를 물어뜯고 자결했다.

이후 폭포는 재인폭포란 이름을 가지게 됐고 마을은 ‘코문이’라 불렸는데, 그게 바로 지금의 고문리다.

폭포는 커다란 홀처럼 생겼다. 둥그런 사발을 세워놓은 듯한 모양인데 가운데로 기나긴 물줄기가 떨어진다. 푸른 물은 무대 같고 주변의 주상절리 기둥들은 장식 같아 마치 오페라하우스를 보는 듯하다. 국내 대표 용암대지를 흐르는 한탄강처럼 재인폭포 역시 연천 특유의 지형이 빚어낸 보물이다.

절벽 아래 흐르는 강물을 보려면 차탄천이 좋다. 족히 10층 높이는 넘는 절벽(단애)이 성벽처럼 길게 이어지고 아래엔 녹색 강이 흐른다. 임진교 다리에서 내려다보면 그 풍경이 정말 그림이다. 겸재 정선은 연천에서 뱃놀이하는 풍경을 담은 ‘웅연계람’을 남겼다. 현대에도 한탄강에서 카약을 즐기는 이들을 만날 수 있다.

옥빛 물 위 오색의 카약 선단이 등장하면 웅장한 강변 풍경이 더욱 빛난다. 노 젓는 소리만 겨우 들리는 고요한 물가에 오후 햇살이 비집고 들어가 비로소 연천 땅에 봄이 왔음을 알린다. 기나긴 세월 속 연천은 지난 반세기가 야속할 만하다. 지금 연천은 군사지역으로, 매운탕 맛있는 동네 정도다.

하지만 분단 이전까지 연천은 한반도 역사의 중심지였다.

무려 70만 년 전 구석기 시대에 전곡리는 수많은 선사인들이 강을 오가며 수렵, 채취, 어로 활동을 하던 삶의 거점이었다. 이를테면 ‘구석기 시대의 뉴욕’쯤에 해당한다.

부락을 이루고 살며 지능을 개발해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라는 당대 최고 하이테크 제품을 생산했다. 1978년 미군 병사 그레그 보웬이 찾아낸 전곡리 주먹도끼는 당시 세계적으로도 경이로운 고고학적 발견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모양을 미리 상상하고 그것을 만들기 위해 커다란 자연석을 쪼아내 만든 다목적 도구. 도구의 인간(Homo-Habilis)의 주거지가 바로 연천이다.

고대에도 마찬가지였다. 6세기쯤 남하 정책을 편 고구려는 이곳까지 내려와 당포성, 호로고루, 은대리성 등 세 곳에 성을 쌓았다. 이후 백제와 신라 역시 서로 연천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다. 남북을 잇는 길목에 있어 전술적으로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이후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 역시 연천에 왕릉(경순왕릉 사적 제244호)을 남겼다. 시간은 강물처럼 흐르고, 고려와 조선의 발자취 역시 연천 땅에 선명하게 아로새겨져 있다. 태조 이성계가 남긴 숭의전(崇義殿·사적 제223호)은 미산면 산자락에서 임진강을 바라보고 있다. 숭의전은 태조가 고려 왕조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공양왕의 동생(왕우)과 두 아들에게 땅을 내리고 고려의 8대 왕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도록 한 곳이다. 4대 왕과 신숭겸, 정몽주 등 고려 충신 16인의 제례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역사는 구한말로 이어져, 대한제국 황실 가옥인 염근당을 옮겨 사라진 제국의 역사를 연천에서 잇고 있다.

근현대 역시 연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대. 일제 강점기 1914년에 세워진 거대한 철도 급수탑(등록문화재 45호)이 지금도 연천역에 남아 있다. 경원선 증기열차에 물을 공급하는 시설로, 한국전쟁 당시 총탄과 포흔이 고스란히 상처로 남아 있다.

구석기부터 시작된 연천이란 서사시의 마지막 장은 분단 현실이다. 비록 멈췄지만 공책은 많이 남아 있다. 경원선에 KTX가 다닐 그때가 되면 ‘한반도의 중심 땅’ 연천은 다시 남은 이야기를 써내려 갈 수 있다. 한탄강과 임진강이 유유히 흘러 연천(미산)에서 머리를 맞댄 것처럼, 멈춰진 이야기가 연천에서 다시 이어 갈 듯하다. 70만 년 전 구석기인들이 시작했던 그 오랜 이야기를.


▒ 이우석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전 여행기자협회 회장, 16년째 여행·맛집 전문 기자로 활동 중


여행수첩

둘러볼 만한 곳 한탄강 관광지는 31만2000㎡의 부지에 카라반 25동, 캐빈하우스 16동과 오토캠핑 시설인 강변야영장 88개, 언덕야영장 40개를 갖춘 대형 캠핑장. 카야킹, 루어낚시 등 다양한 레포츠를 함께 즐길 수 있다.

금속 소재의 외관이 아주 멋진 전곡선사박물관은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야외체험장으로 구성됐다. 현대적 전시 기법을 이용한 재미난 볼거리가 많다.(031)830-5600


먹거리 연천은 민물고기 매운탕으로 유명하다. 고문리 불탄소가든(연천읍 고문리)은 메기와 참마자, 참게 등을 넣고 끓여낸 칼칼한 매운탕을 잘한다.(031)834-2770 백학면 노곡리 대교여울목도 마니아들에게 알려진 집이다. (031)835-2528.

군남면 암소한우한마리는 목장을 직접 운영해 한우를 내는 집. 가격에 비해 고기(모둠 1만9000원)가 좋고 선지해장국도 맛있다. (031)832-7903

대광리 금수강산은 능이와 더덕 등 약재를 넣은 한방오리탕이 맛있기로 소문났다. 오리를 맛본 후 끓여 먹는 죽도 일품. (031)834-13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