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3월 20일 개관한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소재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기념관’ 전경. 사진 연합뉴스
서울시가 3월 20일 개관한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소재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기념관’ 전경. 사진 연합뉴스

동대문 시장은 크게 도매시장과 소매시장으로, 그리고 젊은 세대 타깃 시장과 장년층 이상 타깃 시장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젊은 세대 타깃 시장은 두타(두산타워)를 비롯한 쇼핑몰로 대개 1990년대 후반 이후에 지어진 곳이다. 장년층 이상 세대 타깃 시장은 평화시장을 필두로 한, 이름에 ‘평화’라는 단어가 들어간 시장이다. 그리고 이 ‘평화’ 시장군이 현 동대문 패션클러스터 초기 성장의 원조이자 주역이다.

한국 전쟁 이후 실향민들은 청계천 근처에 거주하면서 의류를 제작하고 생계를 이어나갔다. 이들은 팔 수만 있다면 어떤 종류의 물건이라도 팔고자 했고, 미군 부대에서 나온 군복과 담요를 활용한 옷도 만들어서 팔았다. 당시 청계천 주변은 무허가 건물과 노점이 즐비했으며, 이곳으로 배출된 오수와 쓰레기로 서울시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1958년 청계천을 도로로 복개하는 공사를 시작하면서, 재래시장은 없어질 위기에 처했다. 당시 상인들은 집단적으로 대응해 서울시로부터 부지를 제공받고 건물을 지었다. 많은 상인들이 실향민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평화 통일의 염원을 담아 상가의 이름을 평화시장으로 지었다.

평화시장은 1962년 설립된 약 9900㎡(3000평) 규모의 3층 건물이다. 주력상품은 의류, 특히 기성복이었다. 당시 부유층은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 입었지만 일반 서민들은 옷감을 떼다 본인이 만든 옷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기성복의 등장이 대중에게 큰 인기를 누리면서 평화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청계천변을 걷다가 평화시장 앞 버들다리(전태일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은 왜 이곳에 전태일 열사의 동상이 있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현재의 평화시장은 전 층이 상점으로 쓰이고 공장들은 동대문 주변의 창신동, 신당동 일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1층은 상점, 2~3층에는 봉제공장이 있었다. 그리고 전태일 열사는 평화시장에서 노동자로 근무하다가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울분으로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했다.

평화시장이 성장하자 주변에 생산과 판매가 혼합된 의류상가들이 들어섰다. 동신시장(1962), 통일상가(1968), 동화상가(1969)가 차례로 개발됐는데, 당시 이들 상가와 주변에는 약 550개 공장에 2만여 노동자들이 종사했다고 한다. 이들 상가에서 생산된 기성복은 전국 시장의 70%를 소화하는 규모였다. 이들의 이름이 비록 ‘시장’ 또는 ‘상가’였지만, 실제로는 한국의 의류 산업을 담당하는 복합 생산·판매 단지였다. 1975년 청계피복노동조합 조사에 따르면 당시 한 공장의 평균 노동자 수는 17.2명이었는데, 이는 현재 동대문 패션클러스터의 생산축 역할을 하는 창신동 소재 공장(약 2~5명)에 비하면 세 배 이상 많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스틸컷. 사진 조선일보 DB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스틸컷. 사진 조선일보 DB

열악했던 노동환경

동대문은 대한민국 의류생산의 주축을 담당하면서 빠르게 성장했지만, 노동조건과 노동현장은 열악했다. 하루 평균 14~15시간 근무하면서 매우 적은 월급을 받았다. 단순 작업을 주로 하는 시다(보조)의 평균 연령은 15세에 불과했다. 또한 층 높이 3m를 나눠 복층화해 공장으로 가동했기 때문에, 공장에 최적화된 환경도 아니었다. 이렇게 한 건물에 공장과 창고, 상점이 혼재했던 것은 비단 우리만의 특수성은 아니다. 18~19세기 유럽 산업도시 건물에서도 나타난다. 원재료를 건물의 맨 위층(일종의 재료 창고)에 저장한 후, 밑에 층에서 이를 활용해 제품을 만든 후 1층 상점에서 판매하는 구조였다. 생산과 판매가 공간적으로 단일 건물 안에서 수직적 프로세스를 따라 발생하는 것이 18~19세기 유럽과 20세기 중후반 서울이라는 서로 다른 시간과 지역에서 나타난 것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동대문 성곽 외곽지역, 즉 청계6가 사거리 동쪽 지역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1972년 신평화시장이 개발된 후, 1983년 청평화시장이 오픈하기까지 8개의 대형상가가 개발되면서, 상권은 청계 6~7가 사이로 이동했다.

이들은 평화시장의 브랜드 효과 덕을 보고자, 평화라는 이름을 고수하는데, 신평화, 동평화, 청평화, 남평화, 제일평화시장 등으로 이름을 붙였다. 평화시장이 가파르게 상권으로 성장하면서 2층과 3층 공장들은 주변으로 이주했다.

이는 토지 시장 관점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상점과 공장의 평당 임대료를 비교할 때 대개의 공장은 상점보다 더 많은 평당 임대료를 지불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유명 프랜차이즈 커피숍의 지불가능 임대료를 봉제공장이 낼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상권 확장 시 공장이 건물을 나와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열악한 작업환경의 공장은 철거하겠다는 서울시의 방침도 일조했다. 서울시는 시장과 상가 등 위험작업장 종합안전진단을 실시해, ‘극히 불량한 것은 모두 철거한다’는 방침을 천명하기도 했다. 1975년 이후 평화시장 소재 공장들이 상점으로 용도전환되면서 이들 공장들은 동대문 주변 주거지역으로 이주했다. 동대문 시장 주변 창신동, 숭인동, 충신동, 신당동 일대로 봉제공장들이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처럼 동대문 패션상가에서는 의류를 판매하고 주변 지역에서는 의류를 제작하는 도심 내 판매와 제조가 분리된 거대한 동대문 패션클러스터가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 김경민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부원장, 공유도시랩 디렉터, 금융위원회 금융발전심의회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