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나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풍경. 사진 김진
시에나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풍경. 사진 김진

이탈리아만큼 풍성한 이야기로 넘치는 여행지는 드물 것이다. 걷다가 마주치는 모든 것에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지나치는 모든 것에 의미가 있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은 숙성된 와인처럼 깊고 향기로웠다. 피렌체와 경쟁 관계였던 작은 도시, 시에나(Siena)는 성장이 멈춰버렸기에 아름다웠다.

피렌체의 레스토랑에서 검은 수탉 마크가 달린 ‘키안티 클라시코(Chianti Classico)’를 한 병 시켰다. 피렌체와 시에나 사이에 있는 키안티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으로, 최상품으로 손꼽힌다.

피렌체와 시에나 간 경계가 뚜렷하지 않던 13세기. 틈만 나면 싸움을 벌였던 두 도시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경계를 정하기로 했다. 수탉이 울면 양측의 기사들이 말을 타고 달리다가 서로 만나는 지점을 도시의 경계로 삼자는 것. 시에나는 흰 수탉을, 피렌체는 검은 수탉으로 정했다. 시에나는 흰 수탉에게 모이를 잔뜩 주어 새벽에 힘차게 울어달라고 기원했다. 피렌체 사람은 검은 수탉을 아예 굶겨버렸다. 새벽이 오자 피렌체 닭은 보통 때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울었다. 배가 고팠으니까. 피렌체 기사는 빨리 출발했고 그리하여 피렌체는 시에나보다 세 배나 넓은 땅을 차지할 수 있게 됐다. 시에나는 완패했다. 키안티 와인에 검은 수탉이 새겨진 이유다.

“자, 그럼 우리 시에나로 가자!”

와인 한 병에 시에나라는 도시를 알게 됐고, 술김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일정에 없던 시에나로 향했다. 피렌체에서 남쪽으로 50㎞. 토스카나의 포도밭과 올리브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싱그러운 길에 마음도 싱싱해졌다. 고도가 조금 높아지는가 싶더니 중세 도시, 시에나에 도착했다.


시에나 대성당. 사진 김진
시에나 대성당. 사진 김진

멈춰버린 도시의 아름다움

시에나는 작고 조용한 도시다. 하루이틀을 투자하면 웬만큼 돌아보고 올 수 있다. 한때 피렌체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융성했지만, 14세기 페스트가 대유행하고 1559년 토스카나 대공국에 흡수되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져서 성장은 멈췄고 도시는 사람들에게 잊혔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덕분에 이탈리아 어느 도시보다 중세 모습을 고스란히 보존한, 역사의 도시가 됐다.

작은 도시라 정처 없이 걷기 좋다. 1472년 세계 최초의 은행이었던 건물도 있고,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많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라 곳곳이 볼거리다. 평범한 집 하나도 중세의 이야기를 간직한 것처럼 보인다. 어떤 골목에 가면 모든 창문이 초록색이고, 다른 골목에 가면 모든 집에 파란색 깃발이 매달려 있다. 골목마다 깃발에 새겨진 무늬가 제각각이다. 중세부터 유지해 온 시에나의 17개 구역(contrade)을 상징하는 것이다.

성장이 멈춰버린 흔적은 시에나 대성당(Duomo di Siena)에서 찾아볼 수 있다. 12세기, 시에나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바실리카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시에나 대성당이다. 12세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에 13세기 고딕양식이 더해져 중세 건축의 완전체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재정 악화로 건축이 중단돼 건물 한쪽을 완성하지 못하고 거대한 벽체만 남았다. 건축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성당의 동쪽은 뭔가 허전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건물은 미완으로 남았고, 지금은 시내를 조망하는 전망대로 쓰인다. 여기서 보는 풍경은 포근하고 정겹다. 대성당의 전면부를 바라보면 시에나의 화려했던 시절이 떠오른다. 시에나를 상징하는 검은색과 흰색의 직선으로 표현해 위풍당당하고 균형감이 살아있다. 토스카나 지역에서 생산된 천연 대리석으로 꼼꼼하게 짜 맞춘 대성당의 하얀 외벽은 햇빛이 닿아 반짝거린다. 극단적인 우아함을 뽐내는 귀족 부인 같다.

성당을 한참 마주 봤다. 성당 전면부는 정교하고 현란하기까지 하다. 중앙 문 위에 있는 둥그런 창문엔 부활한 예수를 중심으로 사람을 결속시키고자 했던 건축가의 의도가 담겨 있다.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이 창문에 비치니 마음이 영롱해진다. 내부는 더 화려하다. 상감으로 새긴 모자이크와 프레스코 장식, 초록색·노란색·파란색 등 색 대리석으로 장식한 벽은 융성했던 시에나의 흔적이다.


볶음우동을 연상케 하는 ‘피치 파스타’. 사진 김진
볶음우동을 연상케 하는 ‘피치 파스타’. 사진 김진

따스한 캄포 광장

시에나를 대표하는 것은 캄포 광장(Piazza del Campo)이다. 캄포 광장은 시에나 여행의 시작이자 끝이다. 캄포 광장을 즐기는 법은 등을 대고 누워 보는 것. 완만하게 기울어져 있어 무척 편하고, 주변을 감싼 건물 덕분에 아늑한 기분까지 든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사람들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고 나도 그중 하나가 됐다. 캄포 광장이 유럽의 여느 광장과 다른 점은 부채꼴 모양이며 꼭짓점을 향해 경사졌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집중력이 있다. 기울기가 심하지 않아서 위압적이지도 않다. 캄포 광장은 지어질 때부터 각종 행사나 집회, 투우장, 심지어 공개 사형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매년 7월과 8월엔 말 경주인 팔리오(Palio)가 캄포 광장에서 열려 도시는 숙소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될 만큼 복잡해진다. 광장 바닥엔 하얀 돌을 박아 구역을 9개로 나눠놨는데, 이것은 중세시대 9개 의회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주변을 감싼 적갈색의 건물들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더한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시에나(sienna) 컬러를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유래한 것이다. 영어로는 이탈리안 어스(Italian earth)라고 한다. 눈이 편안한 컬러와 몸이 편한 광장에선 행동도 부드러워졌다. 시에나에서는 다들 느긋했다. 캄포 광장에 누워 눈을 지그시 감으니 여행의 온기가 전해졌다.

이탈리아에 왔으니 본고장 파스타는 필수 코스다. ‘피치(Pici)’는 시에나에서 만들기 시작한 파스타의 일종으로, 칼국수나 우동 사리와 비슷하게 생겼다. 반죽은 보통 밀가루와 물을 기본으로 하고 만드는 사람에 따라 달걀을 넣기도 한다. 토마토소스를 얹은 피치 파스타는 일반적인 토마토 파스타 맛이지만 쫄깃쫄깃한 면발 때문에 한국인 입맛에 특히 잘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