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계 미국 작가 줌파 라히리. 사진 마음산책
인도계 미국 작가 줌파 라히리. 사진 마음산책

내가 있는 곳
줌파 라히리 지음|이승수 옮김|마음산책
199쪽|1만3500원

줌파 라히리(52)는 인도계 미국 작가로 1999년 첫 단편 소설집 ‘축복받은 집’을 펴내자마자 오늘의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떠올랐다. 그녀의 소설은 섬세하고 정교한 묘사를 통해 삶의 사소한 부분에 담긴 정념의 다양한 양태를 부각하는 것으로 이름이 높다.

첫 소설집은 펜·헤밍웨이 문학상을 받은 데 이어 2000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기도 했다. 이 소설집은 국내에도 번역돼 처음엔 작가들 사이에 화제가 됐다가 점차 대중 독자를 늘려나갔다.

최근 번역된 줌파 라히리의 소설 ‘내가 있는 곳’은 지난해 출간된 신작이다. 라히리는 몇 년 전부터 영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고 있다. 대학 시절에 공부했던 이탈리아어를 더 배우기 위해 어학연수를 떠났고, 이미 두 권의 산문집을 이탈리아어로 써냈다. 이번엔 소설을 냈다.

이 소설은 46개의 작은 이야기를 모은 소설집이지만, 그 이야기는 모두 한 사람의 일화라는 점에서 단편들로 구성된 한 편의 소설이다. 주인공이 단일하고 소설 공간도 단일한 콩트 모음집이기도 하다.

이탈리아로 추정되는 어느 한적한 바닷가 도시에 사는 40대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녀의 발길이 닿는 46개의 장소에서 전개되는 일상과 자아의 풍경이다. 공원, 박물관, 광장, 서점, 길거리, 카페, 수영장, 식당, 병원, 역에 그녀가 들어서면서 작은 사건이나 마음의 파문이 일어난다.

작가는 소설의 첫 문장을 에피그라프(문학작품의 서두에 붙는 인용문)로 시작했다. ‘나는 나이면서 그렇지 않아요. 떠나지만 늘 이곳에 남아있어요’라고 제 소설의 한 부분을 마치 인용한 듯이 갖다 놓았다. 누구나 어느 한곳에 붙박이로 살지만, 떠돌이의 꿈을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그 현실의 장소와 몽상의 지평이 갈마드는 순간들이 삶을 구성한다.

그런 몽상은 대개 ‘어쩌면’이라는 가정법에 미련을 두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나’는 “이따금 내가 사는 동네 길거리에서 함께 어떤 이야기, 어쩌면 인생을 같이 만들어나갈 수도 있었을 한 남자를 만난다”고 했다. 그 남자는 ‘나’의 친구 남편이다. 둘은 절친한 친구처럼 만난다. 심지어 함께 속옷 가게에 가서 물건을 고르기도 하지만, 정해진 선을 넘진 않는다. ‘나’는 말한다. “비록 누구와도 내 인생을 나누지 않지만 따뜻한 포옹만으로도 충분하다. 양쪽 뺨에 가볍게 입 맞추고, 산책을 떠나고, 함께 걷는 것만으로. 원하기만 하면 잘못된 그리고 부질없는 어떤 길로 들어설 수 있다는 걸 우린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안다.”

두 사람은 시내를 잠시 함께 걷다가 자연스럽게 헤어진다. “인사하고 헤어진다. 우리 두 사람도 담벼락에 투사된 그림자가 된다. 포착하기 어려운 일상의 광경.” 주인공 ‘나’의 일상은 그처럼 실체를 상실했기에 붙잡기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나’의 직업은 교사로 추정된다. “이곳에서는 집중하기가 힘들다. 복도를 오가는 동료와 학생에 둘러싸인 채 노출된 느낌이다”는 문장 덕분에 그렇게 추측된다. 그런데 ‘나’는 직업 공간에서도 불안하고 외롭다.

그러다가 자신보다 앞서 이 사무실을 썼던 시인을 생각해본다. 그 시인은 ‘나’가 지향하는 분신이다. “그는 시인이었다. 부인의 말에 따르면 그는 한밤중에 인적이 전혀 없을 때 이 건물에 서리는 밤의 고요함을 사랑했다. 머릿속에 시상이 떠오르면 그는 시를 다 쓸 때까지 돌아가지 않았다.”

박해현 조선일보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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