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한 장면. 사진 월트디즈니코리아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한 장면. 사진 월트디즈니코리아

* 이 글에는 ‘어벤져스: 엔드게임’에 대한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많은 사람의 우려와 달리 ‘어벤져스: 엔드게임(어벤져스4)’은 스포일러(영화의 주요 줄거리나 내용이 공개되는 것)를 당하더라도 보는 재미가 반감되는 영화는 아니다. 누가 죽는지 미리 알았거나 혹은 타노스의 핑거스냅으로 소멸한 인물들이 어떻게 되살아나는지 알게 됐다고 해서 영화관에 가는 걸 주저하지 말자. 필자 또한 인터넷 뉴스 댓글을 보다 누가 죽는다는 사실을 미리 알아버렸지만 영화관에서 보낸 3시간이 결코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감흥은 그런 줄거리나 설정에 있지 않다.

좋은 영화는 삶의 재현에 불과하다. 좋은 영화일수록 그렇다. 소설가 김연수는 좋은 소설을 쓰고 싶다면 언어로 무언가를 전달할 생각을 포기하라고 했다. 대신 재현의 글쓰기를 제안했다. 그는 사랑에 대해서 쓰고 싶다면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쓰지 말고 사랑했을 때 연인과 함께 걸었던 길, 함께 먹었던 음식, 함께 봤던 영화에 대해서 아주 세세하게 쓰라고 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스펙터클한 장면들, 가슴 뭉클한 스토리,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로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영화가 관객의 마음에 정확하게 가닿기 위해서는 오로지 한 가지 방법뿐이다. 삶을 담아내는 것. 삶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그려내는 영화들이 그렇다. 링클레이터는 미국 텍사스주에 사는 여섯 살 꼬마아이 메이슨 주니어의 유년기 12년을 조금씩 천천히 따라가며 우리에게 보여줬다. ‘보이후드’라는 제목으로 개봉한 이 영화를 찍기 위해 링클레이터는 실제로 12년을 기다렸다. 그는 삶의 재현이 어떤 영화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모두에게 똑똑히 보여줬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지만 우리는 영화 속 한 장면 한 장면을 누군가 꾸며낸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링클레이터의 영화에는 어떤 삶이 존재하고 있었고, 우리는 그걸 기꺼이 나와 다른 누군가의 삶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조금 어색하지만 어벤져스4가 그렇다. 블록버스터 히어로 무비를 링클레이터의 영화와 같은 맥락에 놓는 게 정말 어색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어벤져스4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도저히 예상하지 못했던 삶의 재현이라는 과업을 완수하고야 만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하면 흔히 떠오르는 교훈적이고 판에 박힌 메시지가 아니다. 어벤져스4는 캐릭터 한 명 한 명의 삶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11년 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기한 토니 스타크가 꼼지락꼼지락하며 아이언맨 슈트를 만들던 모습을 기억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은 토니가 치즈버거를 먹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로키의 습격에 맞서서 핵폭탄을 안고 우주로 향하는 토니, 공황장애와 불면증에 시달리는 토니, 외계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울트론을 만들기도 한 토니, 꿈에서 만난 자신의 아이 이름을 페퍼에게 말하는 토니까지. 우리는 지난 11년 동안 토니 스타크의 삶을 지켜봤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허무맹랑한 영화 속 캐릭터라는 걸 알면서도 토니라는 한 사람을 기꺼이 인정하고 그의 삶과 죽음에 손뼉을 칠 수 있게 됐다.

11년이라는 시간 동안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역시 나이를 먹고 토니와는 또 다른 자신만의 삶을 살았다. 그 자신이 마약에 중독됐다가 간신히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왔지만 데자뷔처럼 자신의 아들이 마약에 중독돼 재활원에 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아이언맨3’가 대흥행을 한 이듬해의 일이다. 그는 영화 속 토니처럼 세계적인 스타가 됐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잃었다. 우리는 영화 속에서, 영화관 밖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어벤져스4가 달성한 놀라운 성취는 이런 삶의 재현을 가능한 모든 캐릭터에게서 끌어내려 했다는 데 있다. 어떤 시도는 그 자체로 성취가 되기도 한다. 어벤져스 시리즈는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가 중심을 잡고 있지만 다른 캐릭터도 하나하나 없어서는 안 되는 비중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10여 년 동안 그들에 대해서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이따금 지나가는 대사 한 마디, 원작 코믹스의 설정 속에서 영화가 보여주지 않은 그들의 삶을 추측할 따름이었다.

어벤져스4는 그 모든 무신경함에 대한 마블의 사과이자 마지막 작별 인사처럼 느껴진다. 필자는 캡틴 아메리카의 슈트를 벗고 평범하게 늙어간 스티브 로저스의 늙은 얼굴을 바라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퍼스트 어벤져’가 나온 이후로 8년을 참은 한숨이었을 것이다. 느릿한 선율에 맞춰 페기와 춤을 추고 있는 스티브 로저스는 우리가 잊고 있던 캡틴 아메리카의 또 다른 삶에 대한 열망을 보여준다. 브루스 배너는 마침내 헐크와 화해했고, 토르는 자신에게 맞지 않던 왕이라는 옷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바튼과 스캇 랭은 잃어버렸던 가족을 되찾았다. 가모라와 네뷸라는 마침내 두 손을 맞잡고 단단한 시스터후드를 보여준다.

영화의 대단원에 펼쳐진 거대한 전투에서 어벤져스의 여성 히어로들이 힘을 모아 싸우는 장면은 마블이 전 세계 영화팬들에게 전하는 과거에 대한 반성과 미래를 위한 전진의 메시지다.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마블 스튜디오가 제작한 영화 시리즈)를 그 자체로 하나의 삶이라고 치면, 마블은 열두 살부터는 달라질 것이라는 걸 자신의 삶으로 보여준 셈이다. 여성의 참여, 다양성의 확보가 중요하다고 말로 외치는 게 아니라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통해서 말이다.

어벤져스4는 한 편의 영화로 따로 떼어놓고 보면 다소 엉성해보일 수 있다. 군더더기도 많고 감정선의 연결도 자연스럽지 않다. 이야기가 지나치게 늘어지는가 하면 감정이 고조될 때 갑자기 다른 이야기로 바뀌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어벤져스4가 2008년부터 시작된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의 한 세대(마블은 이를 인피니티 사가로 부른다)를 매조지는 작품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이야기와 장면들은 하나하나가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조각이다.

그리고 원래 인생이란 게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법이기도 하다. 인생은 언제나 반전과 복선의 연속이지만 살아가는 순간 내 인생의 반전과 복선을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삶이란 군더더기 같은 하루하루의 연속이고 내 마음대로 풀리는 일이란 건 신데렐라의 구두처럼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 멈춰서 뒤를 돌아보면 우리는 우리가 해낸 많은 것들을 깨달을 수 있다. 군더더기 같은 하루하루가 모여 내가 두 발을 딛고 지낼 수 있는 단단한 터전이 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모두 ‘죽음’이라는 가장 강력한 인생의 스포일러를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일 조금씩 전진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어벤져스4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모두를 위한 마블의 찬사다.

히어로의 삶이란 결국 모든 생활인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면서 말이다. 많은 사람이 영화가 끝나고 훌쩍일 수밖에 없는 건 스크린 속에서 나와 다르지 않은 다른 사람의 삶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다른 삶을 관조하는 건 언제나 그렇듯 나의 지금 삶을 돌아보고 주저하던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힘이 되곤 한다. 그러니 스포일러 걱정은 마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관으로 향하시길.


이 영화엔 이 술

보모어(Bowmore)

스코틀랜드의 아일레이섬은 위스키 산지로 유명하다. 아드벡, 라가불린, 라프로익 같은 개성 넘치는 위스키가 이곳에서 만들어진다. 보모어도 그중 하나다. 아일레이섬에서는 장례식이 끝나고 나면 모두가 위스키를 나눠 마신다. 묘지에서 집까지 돌아오는 춥고 허전한 길을 술기운으로 견디기 위해서다. 모두가 한 잔 가득 위스키를 따라 마시고 난 뒤, 남은 빈 병과 잔은 바위에 던져서 깨버린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게 아일레이섬의 관습이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허전하고 쓸쓸했다면, 위스키 한 잔으로 우리의 히어로들을 배웅하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