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고 예쁜 여자가 어머니가 되고 나중에는 늙고 쪼그라든 할머니가 된다. 다리가 후들거릴 만큼 아찔한 여정이다.
젊고 예쁜 여자가 어머니가 되고 나중에는 늙고 쪼그라든 할머니가 된다. 다리가 후들거릴 만큼 아찔한 여정이다.

나이 듦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한다. 마흔이 넘어서부터는 삶이 예전처럼 막막하게 내 앞에 펼쳐진 것 같지 않다. 관련된 책들도, 영화도 찾아 읽고 본다. 늙음에 관한 상념은 어릴 때부터 시작됐다. 중학생 때 친구와 주고받은 교환일기에도 나는 자주 늙음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를 힘겹게 써 내려갔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로 보일 수 있었는데, 친구는 그런 나를 잘 다독여줬다.

나는 돌이 지나서 젖을 뗀 후 시골의 할머니께 보내졌다. 1년을 그녀의 보호 밑에서 자라다 부모님 품에 돌아갔지만, 이후에도 몇 달씩 할머니와 함께 지내곤 했다. 다정하고 유쾌한 할머니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남해 작은 섬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바다와 숲, 한참을 걸어가야 닿을 수 있는 구멍가게, 동네에 하나 있는 한 학급짜리 학교, 집 앞의 냇가에서 할머니와 엉덩이를 맞대고 조물조물하던 빨래, 돌담 따라 들어가면 대청마루가 보이는 집, 감나무와 머루가 있는 마당, 햇볕에 말린 김과 생선 냄새가 나던 풍경이 그 시절을 생각하면 두서없이 떠오른다.

그곳에는 가로등이 없었다. 밤이 되면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어둠은 두렵지만 신비로웠고 할머니가 밤마다 들려주는 옛이야기의 멋진 배경이 됐다. 먼 기억의 세상이 꿈틀대고 일어나면 익숙한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이야기에 취해 꼬르륵 밤 속으로 삼켜지던 나날이었다.

할머니는 역사의 소용돌이 한편에서 조용한 관찰자로, 역동의 시대를 살던 인물들을 지나쳐서 그들보다 더 길고 아득히 삶을 살다 떠나셨다.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서는 철이 들어 헤아리고서는 깜짝 놀랄 이름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했다. 그들은 그녀의 어린 시절을 함께 한 친근한 어른이기도 했고 누군가는 떠올리기 가슴 아픈 청춘의 배경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당신의 청춘이 얼마나 빛나고 아름다웠는지, 나에게 종종 속삭였다. 작고 통통하고 잿빛 머리의 할머니에게서 예쁨을 상상하는 건 어린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이야기를 자꾸 더 듣고 싶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어릴 때에는 사람들이 너처럼 크고 쌍커풀이 진 내 눈을 보고 뭘 훔쳐가려고 눈을 크게 부릅뜨냐며 놀리곤 했어. 내가 세상을 잘못 타고 난 거지.”

할머니 댁에는 여닫이문을 열면 뽀얗게 세월의 먼지가 쌓여있는 물건들이 어지러이 널린 장소가 많았다. 작은 방이기도 했고 다락이기도 했고 일 년 내내 음지인 광이기도 했다. 나는 거기서 장남인 아빠가 젊은 시절 읽었다는 책더미를 찾아내고 며칠 동안 그 속을 뒤지기도 했다. 낡은 사진첩을 발견하기도 했다. 발굴에 성공한 모험가인 듯, 옛 흔적들을 내 것인 양 헤집고 다녔다.

하루는 내 백일 사진을 보고는 사진 속 아기를 데려다 달라고 울어 젖히기도 했고 눈이 크고 얼굴이 갸름하고 윤곽이 또렷한 여자가 아이를 업고 서 있는 사진을 찾아내기도 했다. 그 사진을 들고 마당에서 김을 말리던 할머니에게 달려가 사진 속 주인공이 누구냐고 물었던 볕 좋은 오후, 그 젊고 앳된 여자가 할머니 자신이고 포대기에 파묻혀서 잘 보이지 않는 아이가 나의 아빠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들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끙끙 앓듯이 헤아리고자 애썼지만 잘되지 않았다. 아빠가 아기였다는 사실은 그나마 상상 가능했지만, 이 젊고 예쁜 여자가 나중에는 늙고 쪼그라든 할머니가 된다는 사실은 다리가 후들거릴 만큼 아찔한 여정이었다. 받아들일 수 없어 마음으로는 뒤로 물러나던 아이는, 할머니 얼굴에 맺히고 펼쳐지는 감정들이 터무니없이 깊고 광활해 몸으로는 멈춰 섰다. 넋을 잃고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허리를 펴고 사진을 받아들고 빠져들 듯 자신의 옛 얼굴에 취해버린 할머니는 내 표정을 살피지도 않은 채 말했다.


돌덩이 ‘쿵’… 아찔했던 할머니의 옛 모습

“할머니, 옛날엔 참 예뻤지? 그렇지?”

그렇다고, 너무너무 예뻤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도 예쁘다고 너무너무 예쁘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쿵, 가슴에 돌덩이가 내려앉는 기분에, 무너지듯 마당에 주저앉아버렸다.

학교에 입학하면서 내가 시골에 머무는 시간은 여름 방학으로만 한정됐고 그렇게 점차 할머니 곁에 머무는 시간은 줄어갔다. 집에 모시고자 하는 노력은 매번 무산됐다. 오셨다간 잠적하듯 시골집으로 돌아가신 할머니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오시곤 했다. 서울 살이가 너희들 곁에 있어 즐겁지만, 나는 홀로 지내는 시골 살이가 더 몸에 맞다고. 늙으니까 이제는, 즐거움보다는 몸에 맞는 일을 따르며 사는 게 더 좋다고도 하셨다.

내가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지만, 할머니는 나의 빠른 성장만큼이나 서둘러 늙어갔다. 아이처럼 사탕을 숨겨 놓으시곤 빼앗길까 전전긍긍하셨고 더 이상 인형처럼 예쁘지 않은 나의 변화를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탄하시기도 했다. 사춘기가 시작돼 몰래 목욕을 하고 싶어 전전긍긍하는 나를 사람들 앞에서 타박하시기도 했다. “볼 것도 없는데, 뭘 숨기겠다고 야단이야?”라고 말씀하셨던 건 두고두고 상처가 됐다. 나는 그녀를 찾아가는 긴긴 여행길을 멈추게 됐다.

그럼에도 하룻밤을 낯선 도시에서 보내야만 다다를 수 있었던, 기차와 버스로 이어진 어릴 적 여행길을 다정한 옛 노래처럼 기억한다. 창밖으로 빠르게 변하던 풍경은 신비롭고 감미로웠고 길고 긴 다리 위를 건너는 기차 밑으로 아찔한 깊이를 깨달을 때면 기차는 레일 위가 아니라 하늘을 나는 중이라고 굳게 믿어보기도 했다.

지금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면 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이 보인다. 그의 커다란 눈 위 쌍꺼풀은 어느덧 늘어진 눈꺼풀에 덮여 버렸다. 키도 몸도 자그맣게 졸아들었다. 우렁찬 목소리는 그대로인데, 나 또한 우렁차지 않으면 안 되어서 예전처럼 다정한 분위기는 나지 않는다.

어제는 첫째 딸이 목욕 후 머리를 말리는데, 그녀의 머리 곁에 내 머리를 흔들어 같이 말리는 시늉을 했다. 거울을 보고 둘이 까르르 웃다가 아이가 내 어깨를 한쪽 팔로 끌어안고서 가슴을 쭉 폈다. 함께 곧게 선 채로 거울 속 모녀를 마주 보았다. 아이는 이제 나보다 반 뼘이 더 크다. 아빠를 쏙 빼닮았던 윤곽에서 조금씩 내 얼굴이 얼핏얼핏 드러난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서로에게 감탄한다. “어쩌면 이리 예쁠까” “아이, 귀여워” “피부가 이렇게 곱다니” “세상에, 너무 똑똑해” “으하하, 정말 재밌어” 같은 말이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진다. 훌쩍 자라버린 딸아이가 정말 예쁜데, 어느새 늙어버린 내 모습이 그럭저럭 친근해서 웃어버렸다. 아이에게 말했다. “나이 드는 거, 참 좋다. 내가 나이가 드니 우리 딸이 이리도 예뻐지는 거잖아.”

세월이 안겨주는 기쁨과 슬픔은 둘로 가르거나 반목할 수 없는 사이임을 조금씩 깨달아 간다. 네가 빛나고 영글고 아름다워지는 시간 속에서 나는 쇠락하고 늙어간다. 하지만 오래전 그녀처럼 내 몸에 맞는 일을 따르는 법을 터득한다. 현명함이 먼저 와서 깨달음을 안내하고 오래전 천진함이 돌아와서 조금 더 나와 내 늙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이와 같이 존재를 거둬 가리라. 조금은 유쾌하게, 짓궂은 장난도 쳐 가면서.


▒ 이서희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영화학교 ESEC 졸업, 파리3대학 영화과 석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