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진 전망대에서 본 득량만. 사진 이우석
정남진 전망대에서 본 득량만. 사진 이우석

장흥, 길이길이(長) 번성(興)하는 곳. 지명 중 이만한 이름도 없다. 볕 좋은 남도의 풍요로운 마을, 날이 어떻든 이곳을 찾노라면 언제나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푼다.

현재 남한 땅 북쪽에 대부분이 모여 사는 우리에게 ‘남쪽’이란 일종의 이상향과도 같다. 따뜻하고 온정이 깃든 곳, 동서남북 중 왠지 남쪽일 것만 같다.

많은 이가 그리 생각했다. 시인 김동환은 1927년 조선문단에 발표한 시 ‘산 넘어 남촌에는’에서 남촌(南村)은 ‘빼앗긴 조국’을 상징했다. 일본 작가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남쪽으로 튀어라’는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곳이 아닌 ‘다른 세계’를 남쪽이라 했다. 1986년 ‘남행열차(노래 김수희)’ 작사가 정혜경은 “만날 순 없어도 잊지는 말아요”라고 노래하며 실연의 슬픔을 뒤로하고 떠나는 곳으로 남쪽을 상정했다.

장흥은 정남진(正南津)이다. 그래서 봄이며 여름이 먼저 찾아오는 남쪽 여행 일번지로 제격이다.

전라남도 장흥 정남진은 광화문에서 쭉 일직선을 그을 때 정확하게 남쪽 끝 지점이다. 북으론 중강진, 이 세 지점은 죄다 경도 126도 58분 35초다. 1395년 세조가 광화문(원래는 정문, 이후 세종이 개칭)을 세운 이래 불변의 극남점(極南點)이 됐다. 710년 후인 2005년 장흥군은 관산읍 신동리를 공식적으로 ‘정남진’으로 지정한다.

과연 ‘남쪽’이다. 훈풍이 분다. 먼셀 색상환의 그린 계열처럼 여러 신록이 덧입혀진 남도 장흥의 풍광은 바라보기만 해도 몸이 훈훈해지는 듯하다. 정남진에는 비옥하기로 소문난 득량만 바다를 바라보는 전망대가 우뚝 서 있다. 앞에는 정남진 상징탑이 있다.

엘리베이터로 오르니 사방팔방이 탁 트였다. 뭔가 꽉 막힌 가슴속 얇은 막이 비로소 터져 내려가는 기분이다. 내려오는 길도 좋다. 계단을 따라 층마다 재미난 콘텐츠를 모아놓아 걸어내려오는 재미가 쏠쏠하다.


장흥의 별미 ‘삼합(한우, 표고, 키조개 관자)’ 세트. 사진 이우석
장흥의 별미 ‘삼합(한우, 표고, 키조개 관자)’ 세트. 사진 이우석

이청준, 한승원 등 배출한 문향(文鄕)

인간은 끝 지점을 정복하려는 습성이 있는 듯하다. 과거 아문센도 난센도 에드먼드 힐러리 경도 그랬다. 독도나 마라도, 격렬비열도, 해남 땅끝마을을 가는 명분이기도 하다.

바닷가에 마을 하나가 있다. 키조개와 굴, 낙지(낙조도 유명하다)로 유명한 남포마을. 영화 ‘축제(임권택)’의 배경이다. 아니 장흥 출신 이청준이 쓴 소설 ‘축제’의 배경이라 괜히 낯익다.

앞바다에는 굽은 소나무를 몇 그루 이고 있는 자그마한 소등섬이 있다. 동양화로 그린 ‘몽생미셸’ 같다. 물이 빠지면 육지와 이어져 앞마당 노릇을 하고, 물이 들어차면 외로운 섬이 된다.

인근 대리에 있는 해양낚시공원은 조사(釣士)라면 쌍수를 들고 반길 만한 곳이다. 청정 득량만 앞 대리 앞바다에 낚시 전용 수상 콘도와 부잔교식 낚시데크 등을 갖춰 놓았다. 감성돔이 많이 잡힌다고 했지만, 정작 나는 감성에 상처만 입었다. 고기를 잡지는 못한대도 오글거리는 낙지 탕탕이와 회 한 점을 초고추장에 찍어 입에 털어넣는 재미만큼은 최소한 보장된다.

장흥은 아름다운 산수에서 영감을 얻은 문인이 많이 난 문향(文鄕)이다. ‘한국 문학의 자궁’이란 별칭이 무색하지 않다. 고 이청준과 ‘녹두장군’의 송기숙, ‘생의 이면’의 이승우 등 족히 100명이 넘는 문인이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길도 바다도 얌전한 수문해변 여다지마을에는 한승원 문학산책로가 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한승원을 기념하는 서른 개의 시비가 장장 700m 해변길을 따라 늘어섰다. 한승원은 ‘아제 아제 바라아제’ ‘해산 가는 길’ 등으로 유명한 소설가다. 그의 딸 한강은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받았다. 한승원은 안양면 해산토굴에 산다.

슬슬 하늘이 달아오른다. 그럴수록 숲 향기는 시원하다. 산과 강을 보러 갔다. 탐진강은 장흥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젖줄이다. 구불구불 흐르며 갈대와 수초를 안고 사는 ‘진짜’ 강이다. 곳곳에 인도교와 징검다리가 있어 살아 숨 쉬는 강의 정취를 손에 닿을 듯 즐길 수 있다.

장흥은 천관산(723m)을 비롯해, 사자산(666m), 제암산(779m), 억불산(518m) 등 제각각 다른 산세의 위용을 자랑하는 명산으로 병풍을 둘렀다.

기암괴석의 관을 쓴 것처럼 위풍당당한 천관산은 그 풍경이 아름다워 호남 5대 명산에 꼽힌다. 그리 높지 않지만 바다를 끼고 있어 정상에서 남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맑은 날이면 한라산까지 보인다고 한다.

누운 채 고개를 들고 포효하는 사자를 닮았대서 사자산이다. 사자두봉과 사자미봉 등 두 개의 정상이 있는데, 여러 코스가 있어 등산객이 자주 찾는다.

봄날 장흥 여행의 백미는 편백숲이다.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 싱그러운 편백나무 숲은 시원한 힐링과 휴식을 보장하니 좋다. 억불산 아랫자락 정남진 편백숲 우드랜드에서는 수령 50년에 가까운 편백 향과 피톤치드의 기운으로 지친 심신을 치유할 수 있다.

종잇장 옷을 입고 숲을 산책하고, 그마저 귀찮다면 해먹에 누워 빼곡한 나무가 만드는 조그만 하늘을 바라보는 재미도 있다. 소금 찜질방에서 미리 땀을 쭉 빼놓으면 보송보송한 상태에서 보다 시원한 산림욕을 즐길 수 있다.

산·숲·강·호수·바다를 품은 장흥에는 다양한 먹거리가 난다. 천관산 산자락에선 한우가 무럭무럭 크고 있다. 들과 산에는 표고버섯과 각종 나물이 난다. 남포마을은 겨울에 굴과 키조개를 캐는 곳이다. 비옥한 득량만에는 봄조개 바지락과 낙지·주꾸미·갑오징어·꼬시래기가 올라온다. 청정수역에서 자라 산(酸)처리를 할 필요없다는 무산김도 장흥의 자랑거리다.

장흥삼합만큼은 빼놓을 수 없다. 삼합(三合)이란 세 가지 어울리는 것을 이른다. 장흥에선 한우와 표고, 키조개 관자다. 들·산·바다에서 나는 진미가 한데 모였다. 벽지 문양처럼 화려한 마블링의 한우 등심과 함께 삼합세트(키조개 관자, 표고버섯)를 샀다. 삿갓 모양 불판에 고기를 올린다. 가장자리는 육수가 흘러드는 곳이다. 여기에 살짝 구운 키조개 관자와 표고를 넣으면 된다. 큼지막한 관자에 고기를 올리고 고명으로 버섯을 얹어 한입에 틀어넣는다.

고소한 고기, 쫄깃한 관자, 진한 표고 즙이 한데 어우러져 일제히 육즙을 터뜨린다. 맛의 크레모아다. 제각각 다른 저작감에다 육즙은 특색 있다. 조개와 고기, 버섯은 원래 천연조미료 재료다. 맛이 없을 리 없다. 미처 터지지 못한 감탄이 코로 튀어 나온다.

‘남쪽’에서 즐긴 오감 만족 여행, 탐진강 물 축제를 여는 시원한 여름이 기다려진다. 정남진 어느 방에 누워 내가 사는 북쪽을 생각하자니 갑갑하기만 하다.


▒ 이우석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전 여행기자협회 회장, 16년째 여행·맛집 전문 기자로 활동 중


여행수첩

둘러볼 만한 곳 정남진 편백숲 우드랜드에선 산림욕을 즐길 수 있다. 50년 가까이 자란 편백나무가 오밀조밀 모여 있다. 산 허리에선 ‘좋아요’ 바위도 보인다. 우드랜드 (061)864-0063

먹거리 안양면 여다지 회마을에선 바지락회가 좋다. 회라지만 사실 살짝 데친 것이다. 미나리·표고·양파·고춧가루를 넣고 무친 바지락은 탱글탱글 새콤달콤한 맛이 일품이다. 갑오징어 숙회도 맛있다. 졸깃한 숙회를 먹고 나면 먹물에 밥을 볶아준다. 황홀한 맛을 낸다. 안양면 ‘여다지회마을’에서 판다.
득량만에서 많이 나는 주꾸미는 장흥읍 ‘삭금쭈꾸미’에서 맛볼 수 있다. 주문하는 즉시 내공 깊은 집임을 알 수 있다. 주꾸미샤부샤부에 칼국수며 밥까지 한 방에 뚝딱 해치우게 만든다. 장흥 읍내 ‘만나숯불갈비’는 값싸고 질 좋은 고기와 칼솜씨 좋은 사장이 만나 장흥삼합을 제대로 내는 집으로 소문났다. 남도 특유의 싱싱한 생고기 역시 이 집 시그니처 메뉴 중 하나다.